2020. 12. 2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예수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성탄절이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온 세상이 이 날을 기쁨으로 지킨다. 축제의 날인 것이다. 이 날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까지도 설렘이 가득한 날이다.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이 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왜 예수는 세상에 오신 것일까?
우리가 아는 예수는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대게는 예수는 사람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많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일반적으로는 세계의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를 그렇게 부른다.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듯이 예수도 사람일뿐이란 것이다.
만약 예수가 사람일뿐이라면 우리가 굳이 예수를 믿고 따를 이유가 없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그 말에 귀를 기우리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굳이 예수를 믿고 따라야만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천지만물이 존재하는 것이 우연일까?
이 우주에는 지구와 유사한 별들이 무척이나 많다고 한다. 얼마 전에 과학자들이 그 수많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별들에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을 컴퓨터를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많은 별들 중에 상당히 많은 별들이 그 가능성에서 탈락하고 겨우 몇 개의 별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지구와 같은 정도로 생명이 존재할 확률을 가진 별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보았을 때 겨우 지구만이 살아남는 ‘우연’(?)이 발생했다고 한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그냥 우연이었을까?
그 많은 별들 중에 유독 지구만이 생명이 존재하는 환경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결과였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전능한 존재의 의지에 의한 결과가 아니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그런 결과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이다. 그 ‘어떤 전능한 존재’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존재이시다. 그래서 그 지으신 것들을 보면 본래부터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화가나 시인이 주로 자연을 그 대상으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는 것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찾고자함일 것이다. 자연이 본래부터 아름다웠던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그 사랑은 무한하므로 그 사랑이 하나님 안에만 내재되어 제한을 받는 상태로 머무를 수는 없다. 그 사랑은 적극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하나님과 사랑을 교류할 수 있는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존재가 바로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구체적인 형상은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 지극하신 사랑이 나를 있게 하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형상, 즉 온전한 사랑의 소유자 된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넘치도록 받은 존재들이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그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었다)을 지켜야할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인생의 사는 목적이 되었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조상 아담은 한 가지 조건을 잘 준수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약속한 이것을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왜 이렇게 하셨을까?
애초에 이 선악과나무를 두지 않으셨으면 죄를 범할 일이 없었을 터인데, 왜 그것을 굳이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을까? 그 나무를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하나님의 책임이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 그를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세우셨으니 그는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 다스릴 대상들에 대해 가진 지식은 완전했다. 아담이 능히 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완전했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그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위한 그 믿음에서는 완전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원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할 처지에 있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믿음에서는 초보자와 같은 그가 이 ‘자유의지’를 잘 활용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키워나가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의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선악과나무가 필요성은 그것이 바로 이 순종을 배우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가 늘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연습은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믿음의 삶이 완전하여지기 위해서는 그는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끝까지 따먹지 말았어야만 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런데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삶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에덴동산‘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허락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내신 이후에 우리를 위해 허락하신 최대한의 배려이었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하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향상시켜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선악과나무를 통한 행위언약을 세우셨다. 죽으리라는 표현을 통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만두지 말 것을 원하셨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이다.
원수란 무엇인가?
원한이 맺힐 정도로 내게 해를 끼친 존재를 원수라 한다. 진실로 미워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나를 가장 복된 자리에서 떨어지게 한 자가 바로 그 참된 원수라 할 것인데, 그 존재가 바로 사단이다. 그 사단이 뱀을 입고 아담에게 다가왔다. 그 사단이 아담을 바로 유혹하는 대신 하와를 먼저 유혹했다. 하와는 아담에게 가장 소중한 자였다. 그가 하와에게 이르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자라고 고백했다. 이는 완전한 사랑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하와를 사단이 공격했다. 사단은 타락한 천사이니 그 아는 것이 얼마나 탁월했을까! 그러하니 능히 이 사실을 알고 하와를 먼저 유혹한 것이다. 하와를 공략하면 아담은 자동적으로 넘어올 일이었다.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 여자는 사단을 상대했고(상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만지지 말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왜곡했다.(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이 이단이 되는 길이 된다.) 결국은 그가 욕심을 냄으로써(창 3:6)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이로 인해 죄를 범하는 길로 들어섰다.
선악과나무 열매를 먹는 일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요, 이는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니 이는 하나님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일이다. 하나님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자는 하나님에게 가장 큰 원수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원수 된 자의 자리에 선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셨기에 사랑으로 창조하신 이 우리를 결코 버리실 수 없으셨다.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실 수 있는 그 길을 스스로 열어두셨다. 이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에서 스스로 ‘삼위’(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로 되셨다. 우리와 언약을 세우시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하시고, 그것을 먹을 때 죽음이라는 형벌을 계획하시고 집행하시는 그 일은 성부 하나님이 담당하셨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언약을 파기한 자에게 그 죄를 반드시 물으셔야만 한다. 그래서 그 공의를 집행하셔야만 한다. 그 공의를 집행하시면 그 누구라도 영원한 죽음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영원한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자가 존재할까?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 그 길을 마련하신 것이다. 그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방법을 열어두셨다. 이 일이 바로 여자의 후손을 통한 우리의 구원에 대해 계획하심이시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원수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셔서 살리시려고 자신의 독생자를 대신 제물로 삼으셨다. 이와 같은 우리의 구원 계획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암시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예표 하셨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를 물려받은 남자의 피로 태어나는 자로 오셔서는 안된다. 그는 죄 없으신 인간의 몸을 입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있는 제물이 되실 수 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족속들은 자신들의 죄를 사할 제물로 양을 드렸는데 그 속죄용 양은 흠이 없는 양으로만 했다. 흠 없는 양은 주로 그 예수를 상징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처녀의 몸을 빌려서 죄 없으신 몸을 입으셔야만 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벌써부터 예언하고 있었다.
(겔 46:13) 아침마다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라 하리라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또한 그 주님이 태어나실 곳도 예언되고 있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베드레헴의 옛이름)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오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시다. 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실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베들레헴을 택해 나심으로 가장 작은 자의 자리에 서심으로 우리들의 본래의 모습을 비춰 주셨다.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작은 자(겸손한 자-흙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셨다.
베들레헴의 의미는 음식집, 떡집이라 하니 이는 육신의 양식을 해결하는 중요한 장소라는 의미이므로 이곳에 예수님이 탄생하심은 생명의 떡인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눅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곳은 다윗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그는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든 위대한 왕이었다. 그 구세주 우리 주님이 그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실 것이라는 상징을 갖고 있다. 그 분이 오시면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의 신분이 회복되어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우리가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될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러 오신 주님을 진실로 나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자. 이는 단지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성인 중의 한 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가르친 많은 윤리적 교훈만 따른다면 그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그는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살리신 구세주이신,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셨다. 오히려 쉽게 이해하자면 하나님이신데 우리를 살리시려고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죄 없는 육신을 입으셨던 것이다.
오신 주님(성자하나님)과 그 일을 미리 예비하신 성부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는 우리가 되자.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은 그 본체에서 한분이라는 사실이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사역하심에서 나타난 삼위이시고, 그 본체에서는 동일하시니, 하나님은 그 본체에서 한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귀한 믿음의 삶을 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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