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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by 영동장로교회 2020. 12. 13.

2020. 12. 1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주님이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4복음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건 중에 하나로서 대표적인 것이 주님께서 소경을 고쳐주신 일이다. 물론 이 사건 외에도 우리가 주목하여야할 것들이 많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소경을 고치신 일이다.

 

대개는 생각하기를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소경 한 사람을 고치신 것이 무어라고 대단한 일도 아닐 것이라 여기고 쉽게 넘어갈 것이다. 과연 나도 그러한가?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사건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들의 기록일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성경책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우리를 구원하게 될 그 믿음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지식함을 전제로 한다. 말씀을 바르게 깨달음 없이 주님의 참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참된 믿음의 고백 없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논리적으로 참될 수가 없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사건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의 백성이 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이야기는 나를 구원하여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하심이어서 결코 사소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러하다면 주님이 소경을 고치신 이 일은 나의 구원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마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 9: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마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마 9: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이 장면에 소경이 등장한다. 성경에서의 소경은 영적인 지혜가 어두운 것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소경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의 영적자각을 위해서였다. 특히 주님의 사역의 참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거기서”는 야이로의 집을 가리키는 듯하며,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말인데 소경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들은 그대로 순종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들은 그대로만으로 믿었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신 그 말씀에 따른 실천이었기에 주님은 이를 의롭게 여기셨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이 은혜는 그들이 구원 얻는 그 복된 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새 삶을 얻었다는 것이며, 이 새로운 삶이란 언젠가 미래에 이루어질 그날에 얻게 될, 구원 얻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으로 살게 될 그 영원한 복된 구원 얻은 자의 삶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 하신 것은 바로 이 구원을 얻게 되는 그 복을 의미한다. 이 구원을 얻어 누리게 되는 그 복은 이 땅의 그 어떤 복하고도 비교가 될 수 없다. 이 땅에서 흔히 말하는 재물 복,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그 복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이 땅에서 아무리 화려한 궁전을 지어도 그 기초를 보석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가 거할 그 처소는 그 기초석 조차 12보석으로 되어 있다.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계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소경이 눈을 뜨고 보게 되었다는 것은 구원 얻을 것에 대해 미리 보여주심이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보지 않고도 믿었다는 그 믿음 때문이었다. 주님은 이 믿음을 담보로 하여 그를 의롭다 하신 것이다. 그가 결코 의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단지 주님을 믿었다는 그것 하나를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신 것이다. 이를 “칭의”라고 한다. 이 칭의는 그 믿음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신 것은 소경으로부터 믿음의 고백을 듣고자 하심이다. 이때까지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상태였다.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고백한 것도 이 일 후의 일이다. 주님의 이 물으심에 그 소경들은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그들의 믿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제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시려고 가르치신(교육시키신) 일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특별 은총을 베푸실 때 이와 같이 반드시 그로부터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게 하셨고 그에 대해 아브라함이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과연 나는 주님 앞에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믿음대로 되라”하심은 믿음, 그것이 홀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능력을 나타낼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놀라운 역사를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심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자들이 이 의미를 깨닫고 난 뒤에 비로소 모든 이들이 아는 것이 순서이니 제자들이 깨달을 때까지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사건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소경이 눈을 뜨는 이 사건이 있었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능력 있는 예수를 따라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능력 있는 예수를 통해 능력 없는 그들이 덕을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막 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 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세상적 출세를 바라기보다는 주님을 대신해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전하는 그 막중한 사명들을 감당할 자들이라는 인식이 있어야만 할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분명 소경이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소경을 치료하시는 그 이적을 제자들 앞에서 베푸신 것이다. 그 이적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이 일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

어쩌면 이 제자들이 바로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주님께 구하는 것이 세상적인 것이라면 나도 이 제자들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 사건을 지금 내게 다시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주님은 우리에게 단지 물질의 복을 주려고 오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여 살리시려고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마 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안식일 날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며 예수를 송사한 그 사건 후일 것이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의 정확한 헬라원문은 “그 사람은 귀신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 마태는 그 사람의 병의 원인이 특별히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에 의한 것이라는 바리새인들의 모함에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이 표현으로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임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이적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처럼 간략하게 기록하여 처리한 것은 이적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영적 장애(귀신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다. 진실로 주님은 영과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셨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여 구할 것은 죄로 인해 영영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나를 죄에서 건져달라는 것과 이 일을 이루어주신 주님께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그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 이 땅을 살게 해달라는 것이 나의 유일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때에 나는 비로소 영적인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일, 이는 주님에 내게 진실로 바라시는 바일 것이다.

 

 

(마 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마 15: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사야가 언급했던 ‘이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는 말에서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방인인 그들이 이와 같은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이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유대인들이 일부 그와 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예수의 그 능력이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맹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영안을 열어주려고 이 같이 애를 쓰셨다. 맹인을 치료하시는 것으로 그들의 영적 맹인된 것을 지적하셨다. 그들이 깨닫고 주께로 나아왔다면 그들은 구원을 얻는 참된 복을 누렸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이스라엘과 같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마 20: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마 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막 10: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막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막 10: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막 10: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눅 18: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눅 18: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눅 18: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눅 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8: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눅 18: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눅 18: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 18: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눅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여기서 마가와 누가는 소경 한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고 마태는 두 사람에 대해 말한다. 또한 누가는 주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 마태와 마가는 여리고를 떠나실 때 그리하셨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두 소경이 있었는데 하나는 들어오실 때 고쳐주시기를 빌었고, 떠나가실 때 다른 소경과 함께 고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마태는 고침 받은 두 소경을 다 말했고 마가와 누가는 그 두 소경 중에서 특별히 예수님에게 말한 대표자를 마음에 두고 말했다.

 

바디메오의 “다윗의 자손 예수여”란 말은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냥 튀어나온 말이 아닌 의식적으로 한 말이었고 그것은 믿음의 고백이었다. 꾸짖어 잠잠하라 하여도 더욱 소리 지른 것은 그의 담대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서서’ 그를 부르셨다. 이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배려이시다. 이 부르심에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난 것은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고 전심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귀한 신앙이다.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바로 그 믿음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명하여 데려오라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빌라도 앞으로 데려감을 당하시는  그 모습과는 대비된다.  이는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길에 불쌍한 소경에게 진실로 위엄 있는 권위로 은혜 베푸시는 왕으로의 모습이시다. 그러나 빌라도 앞에 서실 때에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이기에 진실된 종으로서의 순종의 그 모습을 보이시게 되었다.

공생애의 마지막, 이제 죽음을 향해 가시는 길에서 일어난 본 사건의 앞 문단에서는 깨어 있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 야욕에 불타고 있었던 제자들의 영적인 어두움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장 이후에는 제자들의 영적 무지로 말미암아 예수와 제자들의 내면적 괴리감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고,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기 위한 온갖 궤계를 다 동원하는 대적들의 영적 눈먼 상태가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눅 18: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눅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소경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영적 안목을 가졌다.

 

 

(마 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이 장면에서 주님께서는 영적인 소경이며 불구자인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육신의 불구자들을 맞이하여 저들을 고쳐 주사 성전에서 진실로 기도하고 찬양하도록 하셨다. 이처럼 성전에의 출입이 제한된 신체장애자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고침을 받게 함으로써 성전에 대한 그의 우위권, 즉 자신이 성전보다 큰 이임을 입증하셨다.

(눅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눅 19: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마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막 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막 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막 8: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 사건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기록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주님께서 두 단계를 거쳐 소경으로 하여금 온전하게 눈을 뜨게 하셨다. 주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리했을까? 그렇게 하신 것은 그의 제자 베드로의 신앙에 눈 뜸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예언적 보이심이었다.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신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이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그것을 구한 탓이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한다.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하심도 그들이 이적에 집착하고 복음에는 착념치 않은 까닭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아뿐임을 밝히고 있다.

(사 35: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따라서 주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적을 베푸신 것은 그 자신이 메시아임을 강력하게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다. 본 사건은 특별히 안식일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일이었다. 이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드러내신 일이었다.

한편 치료과정에서 흙을 이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과 대비해서 이 일이 주님께서 하시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행위이심을 암시한다. 안식일 날 환자를 치료하고, 이를 위해 침을 바르고, 진흙을 이기신 것은 모두 랍비들이 안식일에 금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모두를 행하심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밝히고 있다.

 

주님의 그 고치심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안이 열리게 하사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고자 하신 일이셨다. 또한 그 고치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는 애곡하거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암시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더욱 강력하게 증거 하시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도우신 것이다.

 

이제 그 주님께서 그 제자들과 같이 나의 영안도 열려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그 자리에 올바르게 서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