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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아들 시몬아(2)

by 영동장로교회 2020. 11. 22.

2020. 11. 2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요한의 아들 시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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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15절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이름, ‘베드로’라고 부르시다가 뜬금없이 이제 다시 ‘시몬’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몬’이라는 이름 앞에 ‘요한의 아들’이라고까지 하신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요한의 아들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그렇게 부르신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제 네가 네 능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라는 간접적인 물으심이자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에 대한 깨달음을 확인시키시는 순간이었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베드로 그 자신에 대한 존재인식이셨다. “네가 누구냐?”라는 물음이셨고 “네 자신을 바르게 알라”는 가르침이셨다.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그렇게 부르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지 삼년이 지난 지금, 똑 같이 물으심으로 베드로에게 그 자신의 존재인식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느냐고 다시 물으신 것이다.

 

과연 그 순간까지 베드로는 모든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려고 했다. 주님을 섬기는 것도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이 잡히시는 그 순간에 자신이 주님을 지키겠노라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신의 칼로 베어버린 그였다. 그러나 그 일은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었고 그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하신 이 부르심 후에 주님은 그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는 베드로가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존재인식을 깨달아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부터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이제는 자신의 의지, 자신의 능력 등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사람의 아들 시몬’에서 ‘하나님의 아들 베드로’로 거듭나게 하시는 순간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능한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위대한 사도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일찍이 주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그 때,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셨다.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는 자연인 그대로의 베드로 모습을 지칭하신 것이다. 아직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이 전혀 없는, 단지 한 촌구석 갈릴리의 이름 없는 어부로 살아가는, 그러면서 그 성질은 급하고 고약한 그런 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신 말씀이셨다. ‘시몬’은 ‘시므온’이라고도 표기 되는데,

(행 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행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그들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중의 한 사람인 ‘시므온’의 그 이름이다. 야곱의 둘째 아들인 시므온은 베드로처럼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다.

(창 34:25)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 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창 34:26)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창 34: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창 34: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창 34:29)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창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의 충동적이고 급한 그 성미는 바로 나의 그 성격을 말함인지도 모른다.

(요 18: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요 18: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요 18: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8: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막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과연 그 ‘시몬’은 비록 주님이 ‘베드로’라고 부르시며 자신의 제자로 삼아 삼년이나 데리고 다니셨지만 그 기간 내내 베드로는 자신의 그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일삼음으로써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가 되었다. 어쩌면 이 순간, 우리도 알게 모르게 그 베드로처럼 그렇게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바르게 되어있지 못한 것이다.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막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막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그러나 주님은 그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면서 그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다. 하나님이신 주님이시기에 한 순간에 그를 변화시켜 당신의 제자다운 제자가 되게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베드로의 인격을 짓밟는 일이기에 그의 인격을 존중하시면서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허락된 그 ‘자유의지’로 변화를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이는 참 사랑의 행위이셨고 그 사랑은 결국 베드로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심은 우리에게도 그리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그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심중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일이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안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상대를 알게 되듯이 믿음에서의 그 중요한 요소인 ‘지식’은 바로 진실한 사랑에서 이루어진다.

 

믿음의 또 다른 요소들인 ‘신뢰’와 ‘찬동’도 이 진실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하다. 베드로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 그 순간에 그는 비로소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된 베드로는 그 때부터 위대한 사도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 ‘참된 믿음’이 내 것으로 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또한 ‘참된 가르침’은 주님의 그 가르치심과 같이 강압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복음 전하는 일은 가르침을 동반한다. 그 가르침은 주님의 이 같은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결코 무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전도’가 아니다. 그 전도하는 일에 돈으로만 하려는 것도 일종의 무력을 사용함과도 같다 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이 사랑으로 이 사랑을 전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시몬’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기록을 ‘시몬’으로 시작해서 ‘시몬’으로 끝을 맺으면서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시몬은 흔들리는 ‘갈대’라는 뜻이다.) 이기적이고 세상의 유혹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같은 우리를 주님이 부르셔서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네가 아직도 시몬이냐?”라고 물으신다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제는 내가 베드로이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베드로라는 말은 “내가 진실로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여전히 세상적인 방식을 고집하고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으로 하고 있는 ‘시몬’같은 나 자신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