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절 삼위일체 교리의 해설
1. 유일불가분적(唯-不可分的) 본체에 관하여
신적 실유에는 오직 하나뿐이면서 나눌 수 없는 본체(= 유일 불가분적 본체 (ousia essentia))가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의 본체적 실유(本體的寶有) 즉 소질적 본성(素質的)에서 하나이시다.
1) 본체의 정의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 되실 바의 그 근원이 되는 무엇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상상의 범위 너머에 계신다.
통상적으로 선은 일차원이라 하고 면은 이차원이라 하며 우리가 움직이며 살고 있는 이 공간은 삼차원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생명이 선위에서만 살고 있다면 그 생명체는 면 위에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땅이라는 면에 발을 딛고만 살았던 사람이 비행기와 같은 나는 물체를 발명하기 전까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그 날아다니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일차원에서의 존재가 이차원에서의 존재를 이해하기 어렵고 이차원에서의 존재가 삼차원에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힘든 것은 낮은 차원의 존재가 보다 높은 차원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결과이다.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하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 현상조차도 초월하는 그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영역이 있다고 하면 그런 영역까지도 포함하는 영역이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 그런 초월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영역에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영역을 소지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영역을 통치하신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영역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초영역에 극히 일부로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영역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영역이 됨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사고능력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셨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구원사역에서의 자신을 드러내심이었다. 그것이 특별계시이며 성경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실 바의 그 근원을 하나님의 본체라고 하면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본체에 의한 그의 어떠하심의 드러남이다.
어떤 상자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인가는 상자의 밖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가능하다. 만약 그 상자 바깥에서 우리가 따뜻함을 느낀다면 그 속의 존재는 열을 발생하는 성질을 지닌 무엇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바깥에서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속에는 소리를 내는 성질을 지닌 무엇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적으로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사역하심에 드러난 그 속성을 살핌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성질의 본체를 가지셨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분하는데,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말씀하신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이라고 하신 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닮도록 주신 그 속성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심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시라는 것, 생적인 존재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존재시라는 것, 인격적인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의 원형이시라는 것, 지적인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시라는 것, 우리를 도덕적 실유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고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우리를 주권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의지를 가지신 자라는 것, 우리를 복 받을 자로 지으심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비공유적 속성이란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들이니 절대적이시고, 자존재하시고,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유일하시다는 것이다. 이 유일하심의 속성이 그의 본체 속에 있으시니 그는 한 본체를 지니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본체’라는 이 용어에 대해 어떤 초대 교부들은 라틴어 ‘썹스탠티아’(substantia,실체)라는 명사를 ‘에센티아’(essentia, 본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썹스탠스’(substance, 실체〕와 ‘에센스’(essence, 본체)라는 명사들은 흔히 교대적으로 사용된다.
예드는 이 용어의 구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에쎈스는 애세(esse=to be)에서 온 것이니 근기 강한 실유를 지시한다. 썹스텐스는 썹스타레(substare)에서 온 것이니 실유의 잠재적 가능성을 지시한다. 에쎈스라는 명사는 하나님을 무한한 완성들의 총화로 묘사하고 쎕스텐스라는 명사는 그를 무한한 활동들의 근기로 제시한다. 전자는 비교적으로 능동적인 말이요. 후자는 피동적이다. 또한 전자는 비교적으로 정신적이요. 후자는 물질적인 명사다. 우리는 물질적 본체 (material essence)라기 보다도 물질적 실체(material substance)라고 말한다.” (Shedd, Op. Cit. Ⅰ, p. 271)
박형룡은 그의 교의신학 신론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진술에서 ‘실체’(substance)란 말을 사용하여 ‘실체는 하나요’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히브리1장 3절의 “the exact expression of his substance" 같은 성경 어구에 기초한 것이다. 이 성경 어구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체의 정확한 표현이라’함이다. 그러나 이 성경 어구가 우리 성경역문에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로 되어있고 소요리문답의 ‘실체‘(substance)란 말도 ’본체‘로 한역(韓譯)되어 ’본체는 하나요’라고 읽는다. 그런즉 이 말의 우리 성경과 신경에서의 표현은 영문의 정확한 역술은 아닐지라도 전단(前段)에 소개된 어학적 해석(語學{的解釋)의 광명에 비추어 보아 매우 적합한 표현이다. 그러나 영문 성경과 신경에서의 ‘실체‘도 하나님의 ’본체’를 가리키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했다.(박형룡, “교의신학 신론”, p. 199)
영어식 표현‘substance’는 다분히 물질적인 측면이 강하게 풍겨지는 용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적이시니 이 용어보다는 ‘essence’가 하나님의 본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보다 더 적합해 보인다. 어그스틴도 ‘substantia‘보다는 ’essentia‘라는 용어를 더 좋아했다.
“실체‘가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말하여지지만 ’실체‘라는 것이 하나님이 되어 계실 바 그 무엇(whatever it is to be God)이라고 한다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상상할 우려가 있으므로 오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실체’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삼위일체되심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목적으로 도형을 이용해 본체의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그림( ) 삼위일체의 모형도
하나님의 그 본체는 우리에게 드러나 보일 수 없으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속성을 이해함으로써 분명히 하나님의 본체가 존재함을 말할 수 있다. 그 드러나지 않는 ‘본체‘가 있으므로 우리는 한 정삼각형의 도형을 가정하고 그 삼각형 안에 하나님의 본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물론 하나님은 무한하시니 그 본체가 유한한 삼각형 안에 제한되어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삼위일체를 모형적으로 설명코자함이니 그렇게 가정할 뿐이다. 삼각형의 내면에 하나님의 본체가 존재한다고 하면 그 본체를 가지는 삼위의 존재 역시 그 삼각형의 내면에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는 그 삼각형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고 동시에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은 삼각형의 내면에서 드러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삼각형의 내면은 하나님의 본체인 동시에 삼위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된다.
그러나 아직 삼각형의 외면으로는 그 삼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삼각형의 바깥은 우리와 관계를 가지는 사람의 영역이 될 것이다. 사람의 영역이라고 해서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그 공간이 됨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드디어 사역하시는 때에 삼각형의 각 변으로부터 하나님의 위가 드러나실 것이다. 가령 정삼각형의 왼 쪽 변을 통해 성부의 사역하심이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성부하나님이 계심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왼 쪽 빗변의 바깥 영역이 성부하나님의 사역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이 영역은 우리 눈에 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속에 있는 상상의 공간인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삼각형의 오른 쪽 빗변을 통해 성자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사역을 행하심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실 것이다. 우리의 구속사역이 행해지기 전에는 성자하나님이 삼각형의 내면에 머물러 계심으로 우리에게는 드러나 보이지 않으시는 것이다. 구속사역이 집행될 때 비로소 성자하나님의 계심이 우리에게 드러나시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삼각형의 밑변을 통해 성령하나님의 드러나심을 상상할 것이다. 성령하나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견인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까지는 삼각형의 내면에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을 행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하나님의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가 정리하면, 먼저 삼각형의 세 변을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가정하면 ‘메두사‘가 될 수 있다. 한 본체에 세 개의 머리(성부, 성자, 성령)를 가진 꼴이 되므로 이는 분명 메두사와 같다. 그러나 삼각형의 이 세 변은 하나님의 사역하심이 드러나는 방향을 지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만 이 세 변은 바깥에서는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안에서는 바깥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나올 수 있는 문과 같은 것으로 상상함이 좋을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가정하여, 하나님의 본체가 그 내면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은 왼 쪽 변을 통해 본체에서 성부로 드러나고 다음 차례에서는 오른 쪽 변을 통해 본체에서 성자의 모습으로 드러난 뒤에 마지막 순서로 밑변을 통해 성령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형식으로 삼위의 드러나심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전형적인 양태론의 모형이 될 것이다. 한 본체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모양을 변화시켜 나타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이 양태론이다.
그러나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처음부터 함께 삼각형의 내면에 계신 다고 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구별되신 사역을 각기 담당하시는 것이다. 이는 빛이 처음부터 입자성과 파동성을 그 자체에 동시에 가지고 있다가 어떤 대상에 작용할 때 비로소 입자성이 나타나고 파동성이 나타남과 같다. 한 본체를 가지신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사역에 참여하실 때 비로소 구속을 계획하신 성부하나님, 구속을 집행하시는 성자하나님, 그리고 구속을 적용하시는 성령하나님으로 드러나심과 같다. 이 사역의 적용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빛이 처음부터 한 본체에 입자성과 파동성이 존재했던 것처럼 하나님도 처음부터 한 본체에 삼위로 계셨고 우리의 구원사역에서 삼위로 드러나 보이셨다.
하나님은 한 본체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나 상호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사역하신다. 이 사역하심에서 성부는 성부로서의 실존을 지니시고, 성자는 성자로서의 사역하심에 의해 성자로서의 실존을 지니시며, 성령은 성령으로서의 사역하심에 의해 성령으로서의 실존을 지니신다. 이 삼실존에는 ‘구분’이 있으심이 아니라 ‘구별’이 있으시다. 구분이라함은 본체 안에서 성부로서의 영역과 성자로서의 영역과 성령으로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체는 언제나 하나이되 사역하실 때 그 본체가 성부하나님의 실존의 근원이 되고, 성자하나님의 근원이 되며, 성령하나님의 근원이 되는 그런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2) 본체는 유일하시며 분리되기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 속성에서 유일하시다고 정의 되었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본체와 속성이 같은 것이란 의미에서의 단순성과 하나님의 절대성과 관계되는 단수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 본체는 절대자는 하나뿐일 수밖에 없는 그 단수성을 만족해야 하므로 유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적 실유에는 유일불가분적 본체가 있다 할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니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삼위는 그 하나님의 본체를 각기 필요한 만큼씩 나누어가지신 것이 아니라 한 본체에 삼위가 계시는 것이다. 삼위가 각기 그 전 본체를 가지고 따로 계시는 것도 아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본체라고 가정한 그 삼각형 안에 삼위가 있음을 명시했기에 하나님은 한 본체에 삼위가 계시는 것이다. 만약 삼위가 그 본체를 가지고 각기 따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세 개의 삼각형을 상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형태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동일한 본체를 가지신 셋 따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분명 삼신론이 되고 만다.
그림( ) 삼신론의 모형
하나님의 유일성을 나타내는 다음 구절들에 의해 신적 본체의 유일성은 확정된다.
(신 4: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왕상 8:60)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2. 삼위 혹은 삼실존의 의미에 대하여
1) 위(位)는 무엇을 뜻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행하시지 않기로 작정하셨더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인식을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그 도덕적 속성에서 나오는 필연적 행위이셨다. 하나님의 그 도덕적 속성상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해 침묵하실 수가 없으셨고 또한 그로인한 심판에서 선택할 자를 사랑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수밖에 없으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통해 드러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는 용어로 채택한 것이 위(person 인격)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마디로 삼위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의 인격적이신 활동이 드러나심이다.
이 ‘위’라는 용어가 하나님의 삼위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표현하는 용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삼위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어떠하신 바를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인간 편에서의 묘사이기에 절대로 완전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최선한 하나님의 묘사를 위해 선택한 사람 편에서의 용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라고 하는 ‘person‘은 품위, 격위, 신위, 인격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그 관념의 불안전한 표현뿐인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 용어는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이성적 도덕적 개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쓰인다. 자기의 동일성이란 타인과 구별되는 한 개인으로서 현재 자기가 가진 특성이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같으며 미래에도 이어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경험하기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위’라면 그 위가 있는 곳에는 그것과는 구별되는 개체적인 본체가 반드시 있는 것을 안다. 사람의 한 인격을 생각하면 그 인격이 있는 곳에는 바로 그 사람 자체가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를 생각하면 구원을 계획하신 그 인격이 성부로 드러나시는데 그는 반드시 한 본체에서 나오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신적 본체에 삼인격(삼위)이 존재하신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삼위를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서 이것을 완전히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전혀 표현되지 못한 채로 버려둔 바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2) 위(位)의 구별인가 구분인가?
칼빈은 “내가 의미하는 위는 신적 본체 안에 한 실존(subsistence) - 다른 둘과 관계되었으되 공유(共有〕될 수 없는(incommunicable) 특성들에 의하여 구별되는 실존이다”고 말했다.(기독교 강요 1권 3장 6절)
여기서 한 실존이라 함은 성부이시든지, 성자이시든지, 성령이시든지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하나의 양식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의 세 가지 양식을 가지신다 할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표현으로는 이 세 양식이 서로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아니하고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격적 교류를 하시는 관계를 가지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이는 성자가 성령과 관계를 가지고 교류하심이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이는 성자가 성부와 관계를 맺고 계심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그리고 하나님의 이 존재의 세 양식은 각자가 독특한 특징을 지니시기에 서로 공유될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실존이시라는 것이다. 공유될 수 없는 특성이란 하나님의 우리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성부는 계획하시고, 성자는 집행하시고, 성령은 적용하시는 이 특성이 서로 같을 수 없기에 공유될 수 없는 특성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 세 실존은 서로 관계되어 있기에 ‘구분’되시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신다고 해야 한다. 이는 신적 본체 안에 위(인격)적 자아에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에게 사용되는 이 ‘인격’이라는 용어를 통상적으로 사람에게 사용하는 ‘인격‘이라는 용어와 혼동하면 안된다. 하나님 되심을 표현하는 용어가 ’인격‘이다. 이 인격이라는 말은 자결정과 자의식의 재량이 있는 존재에게 사용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자체에 삼 인격이 있으시다. 사람의 인격은 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하나님의 각 위의 인격은 성부, 성자, 성령의 각각에만 속하고 삼위에 공통으로 속하지 않는 비공유적 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삼 인격을 갖고 계신다.
3) 삼위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조화하는가?
하나님은 윤 한 의미에서 유일이시오, 전연 다른 의미에서는 삼위시다. 이 말은 ‘속성’이라는 의미에서는 하나이시라는 것이며, 전연 다른 의미인 ‘특성(하시는 일)‘이라는 의미에서는 삼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이라 칭하는 모든 신적 완성들을 구성하는 영원적, 자존적 신적 본체는 동일한 의미와 정도로 모든 위들에 공통한다. 이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이시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부는 여호와요, 성자도 여호와요, 성령도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이시니 스스로 계신 자는 논리적으로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유일신’이시다.
그러나 이 신적 본체는 인격(위)적 특성들에 의하여 구별되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영원적으로 존재하신다. 이 의미에서 그들은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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