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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원

삼위일체론 - 2. 성경적 증거

by 영동장로교회 2019. 7. 29.

2. 성경적 증거

 

통치주(神的統治主)로서의 하나님, 구속주(神的救體主)로서의 하나님, 성화주(神的聖化主)로서의 하나님을 동시에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 앞에서와 같이 합리적인 삼위에 대한 변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교리는 이성이나 경험만의 근거 위에서 알려진 교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교리이다. 멜리취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은 철학적 사색의 산물이 아니라오직 신약과 구약의 사실들의 반영(反映)이다고 하였다 (Delitzsch, “Old Testament History of Redemption", p. 178)

 

1) 구약에서의 증거

성경에서의 모든 대교리(大敎理들이 다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구약의 암시가 신약에 이르러 확정적으로 명확한 진리로 드러난다. 하나님이 이 같이 하심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삼위일체와 같은 진리를 성경의 시작과 함께 드러내셨다고 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태양을 만드실 때에 그것이 이른 아침에 떠오를 때에는 우리가 육안으로 충분히 보고 감당할 수 있도록 정하셨다. 만약 일출이 정오 때와 같은 밝기를 가지게 하셨다면 이 땅의 누가 정상적인 시력을 보전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하나님이 의)의 태양이신 메시야의 놀라운 인격과 모든 지능, 질서,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의 기이한 인격을 바로 드러나게 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계시하여 사람의 이해력이 진리 전체를 수용할 만치 준비되도록 기다리셨다. 그리고 이 점진적 계시는 추상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 오직 삼위 일체적 생활을 그 다양한 관계에서, 어떤 정도로 창조와 섭리의 사역에 관련하여, 특별히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생적 실재(生的實在)로 계시하셨다. 즉 이 계시는 성자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보다 더 명백히 드러날 때 보다 분명하게 보여진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진리는 신약에서와 같은 명료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의 삼위일체의 교리가 구약에 완전하게 계시되어 있다고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을 무시한 오류였다. 한편 소시너스파와 알미니안파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구약에 전연 발견되지 않는다고 잘못된 주장을 한다. 구약에서의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다른 진리들과 같은 정도로 계시되어 신약에서와 같은 명료성과 충족성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참으로 또는 확실히 계시되어 있다.

 

월필드는 구약은 비컨대 풍부하게 설비 되었으되 희미하게 조명(照明)된 방과 같으니 광명의 도입은 그 안에 전에 없던 것을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으나 다만 전에 그 안에 있으되 오직 희미하게 지각되거나 전혀 지각되지 않던 것의 다량을 밝히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구약에서 밝히 보여지지 않으나 구약계시의 저면에 깔려있어 여기저기서 거의 나타나 보인다. 이리하여 구약의 하나님의 계시는 후에 오는 보다 더 충분한 계시에 의하여 수정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완성 되고 확장되고 증대 될 뿐이다.“고 했다.(Warfield, Op. Cit., P. 142)

 

(1) 복수명사와 대명사에서 주는 삼위에 대한 암시가 있다.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복수 대명사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구별을 지시함이다.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11:7)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구절들에서 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천사들과 협의한 것을 의미하는 우리가 아니다. 천사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들은 피조물인고로 창조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 아니다. 우리라고 말씀하시며 협의하신 것은 삼위간의 협의를 말함이다.

 

창세기 117절의 우리는 그 다음 절에서 분명히 여호와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이시니 스스로 계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창조되지 않은 존재들이 있다면 그들의 본질이 다를 수 있을까? 만약 다르다면 그 존재는 창조되어진 것이 분명하다. 두 존재가 비교될 때 그들이 본체에서 상이하다면 적어도 하나는 창조된 존재다.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니 삼위는 그 본체에서 동일하여야 한다. 이 동일한 본체는 오직 하나로 존재하여야 한다. 삼위는 스스로 계신 여호와이시며 한 본체에 속하시며 한 여호와가 되신다.

 

(2) 하나 이상 수()의 하나님의 위()에 대한 암시를 주는 성구들이 있다.

하나님 안에 하나의 수 이상의 인격이 있음을 언급한 성구는 삼위의 희미한 암시가 된다.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다음 성경 구절에서 여호와’, ‘자기 앞의 사자’, ‘주의 성신이라는 표현도 삼위의 희미한 암시가 될 것이다.

(6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다음 성경구절의 거룩하다의 세 번 반복과 세 번 부른 축도문은 삼위에 대한 또 다른 암시일 것이다.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수기의 이 축도에 대하여 쿨즈는 이 축도식사는 신적 삼위일체와 그에 의하여 수행될 구속의 신비 전부를 발달되지 않은 형식으로 즉 맹아와 같은 것으로 이미 포함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종교적 지식에 장차 더 명료하여질 바 삼위로 전개되어 인류구원의 사업에 삼중양식으로 공작하시는 한 하나님의 인격의 일정한 견해를 연락하기로 의장되었다라고 하였다.(Kurtz“Sacred History“)

 

(3)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구별의 명백한 표시로 드러난 구절이 있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천사를 여호와와 동일한 자로 또는 그와 구별된 자로 제시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구별의 명백한 표시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사람과 교제하시는 경우에 여호와의 천사는 여호와와 일체되시되 오히려 그와 구별되시는 자로 나타났다. 그는 여호와 자신으로서 말씀하셨고 여호와의 권능을 행사하셨고 신적 예배를 받으셨고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셨다. 이러한 성구들은 하나님 안에 위적 구별이 분명히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16: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8: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8: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19: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구약에 나타나는 이 천사는 우리의 구속주로 이 땅에 오실 주님의 현현이시다.

성부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시는 자이시다. 반면에 성자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시려고 우리를 만나주실 하나님이시다. 만약 성부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시면 그 누구라도 그 앞에서 죄에 대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며 그는 그 죄로 인한 심판의 결과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가 그 죽음을 면한 것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실 그 주님의 현현을 목격한 것이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구약에 나타나는 그 천사는 오실 주님의 현현이셨던 것이다.

2) 신약에서의 증거

신약에서도 삼위일체교리는 조직적으로 기술되지는 않았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삼위되심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로 취급되고 있다. 마치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듯이 그렇게 삼위일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빨트레트는 신약에서 삼위일체론적 표현들이 곳곳에 풍성히 꽃피어 나옴으로 이 제목에 관한 광명을 추구하는 공손하고 공평한 독자는 증거 구절들의 부족 때문에 고통을 보지 않고 풍부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고 하였다. (Bartlett, Op. Cit., p. 22).

 

월필드도 신약전서가 삼위일체론적 사상으로 포화되어 있음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본적 증명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오, 성령은 신적 인격이시라는 어떤 종류의, 어떤 근원에서 온 증명이든지 또한 삼위일체의 교리를 위한 증명이라 함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에 가서 삼위일체의 증거를 찾아볼 때에 우리는 삼위일체에 향한 헤어져 있는 관설(關說)들에만 이것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그것들이 아무리 다수하고 교훈적일지라도) 기초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적 인격성을 위하여 제공하는 증거의 전체에 추구할 것이다. 우리의 이런 말은 실로 신약의 전체는 삼위일체를 위한 증거라고 말함이다. 왜냐하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신적 인격성의 증거로 포화되어 있는 때문이다.”고 했다. (Warfield, Op. Cit. p., 146).

 

(1)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신약과 구약이 유일 참 하나님을 가르침에는 다름이 없다. 구약의 다음 성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하고 있다.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유일하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2: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은 그 본체에서 유일하시다는 의미이다. 본체가 따로 여럿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부의 본체가 따로 있고, 성자의 본체가 따로 있고, 성령의 본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본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본체를 삼위일체에서는 일체로 표현하고 있다. 이 한 본체로부터 우리의 구원 사역을 위해 성부는 성부로 사역하심으로 드러나고, 성자는 성자의 사역하심으로 드러나며, 성령은 성령의 사역하심으로 드러나신다. 그렇게 드러나시는 인격을 삼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래서 이 모든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삼위일체가 된다.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은 구약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원리이며 신약에서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2) 성부성자성령은 각각 다 하나님이시다.

신약은 구약과 함께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하는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다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다.

성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음 구절들이 밝히고 있다.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에서 성자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고 단언되어 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성령 또한 하나님 되심을 다음 성경구절들이 증언하는 바이다.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성령을 속인 일이 하나님을 속인 일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증언하였으므로 성령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버지께로서 나오는 성령은 그 자체로 아버지와 같은 것이며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니 성령 또한 하나님이시다.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이 하나님이신 것은 구약과의 대조를 통해 증명이 가능하다.

사도행전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성령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인용문의 출처인 이사야서에서는 그 성령이 바로 여호와라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성령이 여호와이시니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히브리서3장의 성령이 이르신 그 말씀을 구약 예레미야31장에서는 여호와의 그 말씀이시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은 곧 여호와시다.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하나님으로 인정하지만 성부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성자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성령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하지 말 것이다. ‘이라는 것은 우리말에 있는 의존명사로 사람을 높여 부르는데 사용하는 말이다. 이 용어를 삼위에 각각 붙여서 사용하면 하나님이 세 분 계신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적절한 사용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이 이라는 말은 한 본체에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영어 성경의 ’one God’을 우리말로 하여 한 분 하나님이라 할 때 사용하고, 영어 성경의 ’Father’를 우리말로 아버지라고 할 때 그 아버지한 분이시다라는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8:41)에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다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은 ‘one Father’으로 표현되어있다. 성부하나님은 분명히 인격적 존재이시기에 이라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우리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표현을 자제함이 가할 것이다.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우리는 경험상 성부하나님 한 분‘, 성자하나님 한 분‘, 성령하나님 한 분이라고 표현하면 셋이 각각 따로 분리된 셋의 형태를 상상하게 된다. 그것은 이 셋을 물질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경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 분리되어 있는 세 사람의 이미지를 이어서 떠올리게 되어 진다. 이 결과로 삼신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가 세 사람이라는 이미지로는 절대 떠올라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적 대상이 아니시다. 그는 영이시기에 물질적으로 사고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시다. 성자가 우리의 눈에 인식되시는 형태로 우리 앞에 오신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려는 성자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의 은혜인 것이지, 성자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물질적인 형체를 지니셨던 것은 아니다. 그도 성부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존재이셨다. 한 본체 안에 삼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그 존재양식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해 있다. 이것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믿음으로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신약은 오직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3)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의 인격적 교제를 통한 근거로 삼위가 증명된다.

신약에서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 상호 인격적 교제의 대상들로 나타나시기에 삼위는 같은 인격들이 아니시고 서로 다른 인격들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1, 2, 3인칭 대명사로 서로 말씀하고 계시다.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시며 영화롭게 하신다.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자는 성부께 기도하신다.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성부는 성자를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처럼 신약은 위의 네 가지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즉 신약은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과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 각각 다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들은 판이한 인격들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4)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을 말씀하심이 삼위 되심의 증거가 된다.

삼위에 동등함이 있지 않고 높낮이가 있다면 삼위 되심이 성립하지 않는다. 삼위가 서로 동등하여야만 삼위일체의 교리가 성립할 수 있다.

삼위의 동등을 말씀하시는 증언이 다음과 같이 주어져 있다.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월필드(Warfield)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는 기독교의 창립자가 그의 가장 엄장(嚴莊)한 성문선언중에 삼위일체를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알리는 권위적 공포이다. 이스라엘은 유일 참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 아래 예배하였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유일 참 하나님을 아버지아들성령의 이름 아래 예배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판연한 특징이니 우리 주 자신의 이해에 의하면 삼위일체의 교리는 그가 창립하신 종교의 판연한 표지라고 말함과 같다라고 했다. (Warfield. op. Cit., p. 155)

 

또 다른 삼위의 동등을 말하는 성구로는 사도축도문에서 발견된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식사에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각 위의 신성이 동등함이 당연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 그 삼위는 실체(substance)에서 하나이시오, 권능과 영광에서 동등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전통적인 교회 전래의 해석이다.

여기서 실체라는 것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 우리의 경험에서는 실체라는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이 실체를 물질적인 어떤 보이는 형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기록에서도 삼위일체의 실재에 관한 명확한 교훈이 발견되는데, 성자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어 모든 사람에게 보이시고 성부 하나님의 음성은 하늘로부터 발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였고 그리스도 위에 성령의 강림은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났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의 성탄의 예고에서도 삼위가 동등하게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과 나실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성령과 성부와 성자가 동등하신 것을 함의함임을 이해해야 한다.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리스도의 최종 강론과 기도에서 그는 성부에게 또는 성부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제자들을 지도, 교훈, 영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여기서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이 다시 명확히 인정된 것이다. 그 중에도 요 15:26 같은 구절에는 한 절에 삼위가 동열로 지명되어 있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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