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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원

삼위일체론

by 영동장로교회 2019. 7. 24.

삼 위 일 체 론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기 위한 그 준비 작업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떤 사실에 대해 이해하는 일을 할 때에 자신도 모르게 그 때까지 자신이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판다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훈련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학년에서 배운 내용이 고학년으로 진급했을 때 학습하게 되는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되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행학습을 통해 습득한 내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러한 훈련의 결과와 그를 통해 습득한 지식이 이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통상한 지식으로는 하나씩 셋이 모이면 셋일 수밖에 없다. 이는 가장 초보적인 수학의 이해단계에서 습득되는 지식이다. 111=3이라는 사실은 유아라도 아는 사실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대수학의 영역에서 진리로 수납되는 내용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대수학의 영역 속에 우리의 사고가 갇혀지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사고가 대수학의 영역 속에 가두어진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이 고정된 사고는 자신에게 직면한 현상을 판단할 때 유감없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학습된 경험이 대수학의 영역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해함에는 매우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학습한 경험이 있는 또 다른 내용 중에 상대 속도라는 것이 있다. 내가 시속 60Km/h의 속도로 달리는데 나와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차가 그와 같은 속도로 달린다면 내가 느끼는 속도는 그 두 배인 120Km/h라는 것은 쉽게 경험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모두가 경험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고 상대가 반대방향으로 빛과 같이 달린다면 과연 내가 느끼는 상대 속도는 얼마나 될까? 빛의 속도의 두 배라고 해야 하는 것이 우리 경험이 말하는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변함없이 빛과 같은 속도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옳다는 것은 물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수긍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 의한 지식이 갖는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빛의 상대 속도에 대한 이 사실은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초월하는 영역이다.

 

또 다른 예는 우리가 만일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로켓을 타고 간다면 우리는 시간이 멈추는 세계에 들어간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따라서 우리가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주 여행을 하고 지구로 돌아온다면 내가 알던 사람들은 이미 늙어 무덤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경험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가? 이 사실 역시 우리 경험 세계를 벗어난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방식은 처음부터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밖에 있었다.

하나님의 영역을 집합의 개념으로 비유해서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영역은 전체집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역, 즉 인간의 경험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부분집합이 될 것이다. 전체 집합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부분집합에 속한 정도뿐이다. 부분 집합에 속한 것으로 부분집합의 바깥에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으로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추는 그 영역의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이해하려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빛의 상대속도가 변함없이 빛의 속도와 같다는 사실을 우리의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것이 사실인 것은 정밀한 실험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로 조심스럽게 살피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게는 알 수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만큼은 알게 하시리라고 믿는다. 그 정도를 우리에게 허락 하실 것은 그래야만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시고자함이 온전하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정도의 이해를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지금까지의 경험을 과감하게 버리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1 절 삼위일체교리의 개요

1. 난해한 계시교리

삼위일체의 교리는 성경 속에 분명히 드러난 계시의 진리이다. 이 교리는 통상적으로 매우 난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취급당하는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부분집합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진리들이며 인간의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 양식 전체를 전체집합으로 가장하면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영역에 해당되는 그 부분집합의 영역에 해당하는 만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정도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당신의 속성을 드러내어 보여주셨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을 드러내어 보여주셨다. 그러하기에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의 내면적 성질에 관한 것을 성경에 계시된 것 만치 알 수 있을 뿐이니 하나님의 삼인격성 전부를 우리의 지혜의 능력으로는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다른 어느 성경 진리보다도 더 독점적으로 계시의 산물이어서 자연이성의 영역밖에 있으니 이것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그 깊이를 우리의 지혜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교회역사에서 교회가 이 교리를 정립하려고 시도할 때에 이것을 합리화하여 성경적 논거에 불합하는 구조를 가지게 하려는 시험에 반복 끌려 들어간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는 유신론자들도 신격의 위적 복수성을 부정하는 자 많다. 그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교리를 삼신론이나 고금에 보통한 다신론의 일종으로 보려고 한다. 초자연적 계시를 떠나 인생적의식이나 경험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향한 단서를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위적 복수성을 부정하는 것은 셋이 하나이 수 없는 인간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일이다. 셋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삼신론을 주장하는 경우는 성경이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씀하셨기에 사람의 경험한 지식 안에서는 세분의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삼위일체에 관한 결과는 우리의 경험한 지식의 범위에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모순이다. 따라서 바르게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험한 지식에서 오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버릴 때 비로소 길이 열리게 된다.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자가 되시기에 그 존재하실 바 그 양식을 당신의 뜻대로 하셔도 될 터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전능하신 자이시므로 그 존재 양식이 어떠하여야 할 바를 자신의 능력대로 하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구약에 분명히 나타나신 대로 그냥 여호와로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유지하셔도 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독 삼위일체의 양식을 취하신 것은 분명히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저들이 죄인의 처지에 서게 될 것을 아셨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래를 어떻게 아시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점쟁이처럼 그렇게 아시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두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신다. 우리가 아는 양식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시는 양식으로 아시는 것뿐이시다.

 

시간이라는 것은 유독 인간에게 종속된 개념이다. 인간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이 있어 인간은 여기에 종속된다. 그래서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의 흐름을 인간은 거스를 수가 없다. 오늘에서 어제로 갈 수 없고 반드시 내일이라는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시간의 구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시간이라는 굴레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물론 이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영역 중에 속하는 요소이기는 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간을 지배하신다. 태양이 중천에 머문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시간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음을 보여준 예가 된다.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원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원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는 원주 위에 있다고 상상하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는 원주 위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12시 방향의 위치에서 9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세월의 흐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12시에 있다고 하면 이 12시가 오늘이며 그때 1시의 위치는 어제이고 11시의 위치는 내일에 해당한다. 다시 11시의 위치로 이동하면 내일이던 것이 오늘로 되고 그래서 세월이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의 중심에 계시므로 우리를 보실 때 항상 현재로 보시는 것이다. 우리의 어제도 현재로 보시고 오늘도 현재로 보시며 내일도 현재로 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할 것도 하나님은 현재로 보신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한 것을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불가하다. 그는 도덕적 속성을 지니셨기에 반드시 죄를 벌하셔야 하는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그 죄인을 살리실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죄를 정하신 이가 죄를 없이 한다면 그는 결코 공의로울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 하신 말씀을 변개하시는 이가 아니시다. 그것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상 불가능하다.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형벌을 정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셔야만 한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어겼기에 하나님은 그를 향한 공의를 집행하셔야 한다.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런 죄인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모순 없이 이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성자 하나님을 있게 하셔야만 했다. 영원에서 하나님은 한 본체를 지니셨다. 이는 스스로 계신 존재였다. 그 본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드러난 것이 하나님의 위적 존재이시다. 스스로 계신 이는 우리에게 전혀 인식이 되지 않는다. 이를 하나님의 본체라 한다. 그 본체가 우리에게 드러나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역하시는 그때에 드러나신다. 이때의 모습을 우리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삼위로 드러나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그 행하실 바를 하나님의 속성에 모순되지 않으시도록 사역하심에 의하는 것이다. 공의의 집행과 사랑의 실현이 모순되지 않도록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본체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의 삼위로 되셔서 그 사역을 감당하신다. 공의를 집행하실 성부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실 그 일을 함께 행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따라서 죄인을 구속하시는 그 일을 성자하나님이 담당하도록 하시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으로 합당한 하나님의 처사이시다. 이렇게 삼위로 드러나심으로 하나님의 그 속성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에 필요한 모순을 스스로 제거하신 것이다. 성부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의 공의를 요구하시고 성자하나님은 죄인된 자를 그 죽음에서 구하시는 그 사랑을 이루시고 성령하나님은 그 사랑하심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가장 복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 일을 행하실 자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 것이다. 이 모든 행하심을 하나님의 본성에 조화롭고 모순됨이 없게 행하시려고 하심이 삼위로 드러나심인 것이다. 우리를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본체로부터 삼위로 드러나셨을까!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 존귀하심에 한이 없으신 그 하나님이 그리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그 만드신 사람이 죄인될 것을 아시고도 그 사람을 만드셨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살아계신 참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인격의 근원되시는 그 속성을 지니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홀로 계실 수 없는 필연적인 속성을 지니셨다. 그는 또한 사랑의 본질을 소유한 사랑의 속성을 지니신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격적 대상을 만드실 수밖에 없으시다. 이는 외부적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 기쁘신 뜻에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와 인격적 사랑을 교류하심으로 그의 속성이신 아름다움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무위로 끝날 수는 없다. 그는 또한 전능하고 전지한 속성을 지니고 계시기에 그의 의도하시는 일은 절대적으로 당신의 뜻과 같이 완전하게 이루신다. 따라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통해 영광 얻기를 원하시는 그 일이 우리가 끝내는 구원을 얻어 천국 백성이 되는 날 완성되게 되어있다. 그날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온전히 만족하시는 그 기쁨을 얻으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시려는 것이 삼위일체되심의 이유이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이 사역을 이해함이 없이는 삼위일체의 올바른 이해는 있을 수 없다.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것은 삼위일체되심에 대한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어떻게 한 본체를 가지면서 삼위로 사역하는 것이 가능한가?

통상적으로 사람의 경험에서는 이것을 이해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이런 난관은 삼위일체의 존재방식을 사람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데서 발생한다. 사람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면 불가능한 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에 대한 이해를 전혀 불가능하게 버려두시지는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에 가장 먼저 빛을 만드셨다. 이 빛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그러한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빛은 인체에 생리적 작용을 통해 여러 가지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는데 특히 정신적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빛을 차단하면 우울하게 만드는 호르몬이 뇌에서 과다하게 분비되고, 빛을 쪼여주면 눈을 통해 그 우울하게 만드는 호르몬 분비가 차단된다. 문학적으로는 빛은 우리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묘사되곤 한다. 창세기에 언급된 그 빛은 그래서 우리의 희망 없는 죄인 상태에서 건져주실 구속주 메시아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빛은 물리적으로 이중성을 지닌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거울로 빛을 반사시키면 일정한 방향으로 반사되는데 이러한 결과는 빛의 입자성이라는데 따른 결과이다. 또 한편으로는 빛이 파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빛의 파동성이라 한다. 따라서 빛은 입자처럼 일하기도 하고 동시에 파와 같은 일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빛의 이중성이라고 한다. 빛이라고 하는 한 본체에서 입자와 같이 또한 동시에 파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이 빛의 특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삼위일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길을 열어주신 그 은혜의 산물이 아닐까? 주님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이 빛을 통해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길을 열어주신 것은 과연 우리를 향하신 인격적이신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라 믿는다.

 

삼위가 왜 한 본체를 가지셨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한 목적을 가지신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상 인격적이시고 도덕적 하나님이시기에 필연적으로 행하실 일이시다. 만약에 삼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이 따로 세분으로 존재하시면 본체가 서로 구별되는 셋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한 목적을 가지시기에 이는 본체가 동일하시다는 의미가 되며 본체가 동일하니 한 본체를 지니신다는 것이 된다.

 

하나라는 용어가 히브리어에서는 우리말보다는 더 세분화 되어 있다. 히브리어에는 우리말의 하나에 해당되는 용어가 엑하드약히드의 두 가지로 사용된다.

우리 성경에서 확인하면 다음 성구에서 사용된 한 몸’, ‘하나인 여호와‘, ’한 소리로하나는 히브리어로 엑하드가 사용되어 있다.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반면에 다음 성구에 하나의 의미로 사용된 독녀’, ‘독자약히드를 사용함으로써 하나에 대한 의미를 구별하고 있다.

(11:34)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그의 무남독녀라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대체적으로 절대적인 하나뿐인 경우는 약히드를 사용하고, ‘일체동등의 의미에서 하나일 때는 엑하드를 사용하고 있다. 삼위일체에 사용되는 일체는 엑하드를 사용함으로써 삼위가 하나됨을 드러내고 있다. 삼위 하나님이 한 분 여호와가 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라 불리는 엘로힘은 항상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주의하여 볼 일이다.

 

빠빙크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의 심장이다라고 했다.(H.Bavinck, “ Gereformeerde Dogmatik," VoI. n, p. 289).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이 삼위일체의 원리가 우리를 구원코자 하는 그 원리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에 관한 교리의 온전한 이해가 불가하다. 구원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앙생활은 결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박형룡목사님은 그의 교의신학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기초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독립성(獨立性)과 자충족성(自充足性)을 주장하기 어렵다. 일위신(-位神을 믿는 자들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보전하기 위하여 물질의 영원성이나 영원적 필연적 창조를 거의 본능적으로 가정한다. 그것은 일위신은 영원한 물질이나 창조없이는 가장 고독하고 적막한 실유로서 우교(友交)사랑긍휼, 공의에 제한을 받아 자충족하기 불능하리라는 것이 느껴지는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위신주의 (Unitarianism) 의 신개념은 자주 범신론에 경향한다.”고 했다. (박형룡, “교의신학 신론,” P. 187)

일위신이면 우교, 사랑, 긍휼, 공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혼자서 사랑을 하며 혼자서 긍휼과 공의를 베풀 수 있을까? 그래서 일위신의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물질이 영원에서 이미 있었다거나 영원적 필연적인 창조를 가정하여야 한다. 그래서 범신론으로 나아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립성은 의존성을 전제함이니 만일 일위신이면 그에게는 의존의 개념이 무의미하고 따라서 독립성도 무의미하게 된다.

하나님의 삼위되심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만약 하나님이 일위신이라면 사랑의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홀로 존재하는데 사랑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사랑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 삼위의 성립은 하나님이 그 속성을 사랑으로 하심에서 비롯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 각위에게 충분한 신성을 돌림으로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신학체계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 교리는 성부와 함께 그리스도와 성령을 다 신위로 신앙하기 때문에 창조섭리구속에 포함된 삼위의 모든 활동을 다 신적 사역으로 보아 참된 하나님 중심의 신학체계를 구성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신학의 연구에 상위의 어느 한 위나 사람을 중심보다도 삼위일체의 입장에서 전진할 것을 우리에게 지시함으로써 개혁파 혹 칼빈주의 신학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서 자리를 잡고 그리스도 중심이거나 인생 중심의 잘못된 신학과 구별을 짓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가 하나님이실 뿐이라면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할 십자가의 대속물이 되실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죄 없으신 사람이셔야만 한다. 그래서 동정녀를 통한 탄생은 절대적으로 요구되셨다. 또한 그가 온전히 사람만이시고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없으시게 된다. 죄인의 그 죄를 사하실 수 있으신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그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 되셔야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구원의 중심이시며 원천으로써 신학체계에 매우 숭고한 지위를 가지시는 것이다.

교리역사에서 그리스도의 품위를 둘러싸고 신학체계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자들은 다른 중요한 진리들을 가볍게 여기고 천박한 체계에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의 체계는 안정되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서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포기 하여 사람 중심의 신학이 되기까지 하는 데로 경향했다. 일위신론파(Unitarians)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신학의 중심위치에 두어 존숭하여도 그를 사람으로만 보니 그들의 신학은 결국 사람 중심의 신학으로 되고 만다. 금일에 매우 보통한 현대주의 혹 인본주의는 사람 중심이어서 우리의 사람에 대하여 아는 바로 하나님의 성질을 재구성하기로 시도하며 그리스도를 사람뿐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 같은 모든 오류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신학의 중심에 모셔야만 피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구속적 진리의 열쇠가 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람의 구속에 없을 수없는 관계를 가진 다른 모든 교리들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이 교리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의 신성, 성육신. 성령의 인격성, 중생, 칭의, 십자가의 부활의 원리와 같은 중요 교리들을 이해할 수 없다. 헨리 비 스미스 (Henry B. Smith)은 말하되 삼위일체를 위한 강한 예비적 변론은 이 교리가 어떤 형식으로 항상 기독교회의 공언바 한 바 되어왔고 이것에 반대하는 모든 것은 내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 교리가 버림을 당한 때에는 속죄와 중생 같은 다른 주요 신조들이 논리적 필지 (論理的必至)에 의하여 거의 항상 이것에 따라 버림당하기를 마치 보석경주(寶石環珠)꿰미에서 선()을 빼어버리면 모든 보석들이 나뉘어 떨어짐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Henry B. Smith, “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p. 49).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없었다면 성육신, 객관적 구속,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없었음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없었다면 성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로 행동할 자격을 가진 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어 신성과 동시에 인성을 지니시고 수난하여 무한한 공로를 세운 자만이 인류의 죄를 속할 수 있다. 또한 신성 없는 성령이 인생 영혼에게 구원을 실시하실 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한 위뿐 이였다면 그는 우리의 재판관은 되셔도 우리의 구세주와 성화주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월필드는 말하되 설혹 신자가 그의 구원의 의식으로부터 삼위일체의 교리를 구조(構造)하여 내기는 불능할지라도 오히려 그의 구원의 의식의 요소들은 삼위일체의 교리에 의해서만 그에게 해석되고 질서 있게 되나니 그 교리는 그 요소들의 밑바닥에 있어 그것들에게 의의와 구원과정에 관한 성경교훈에게 조응성(照應性)을 준다는 것을 그는 발견한다. 이 교리의 방편에 의하여 그는 구원하시는 하나님과의 삼중관계(三重關係)를 명백히 또는 필연히 생각하기 가능하니 그 하나님은 구속주를 보낸 부성애(父性愛), 구속을 집행한 구속애(救續愛)구속을 적용한 구원애(救援愛)로 그에게 경험되신다 ... “삼위일체의 교리 없이는 그의 의식적 그리스

도인 생활은 과연 비실재(非實在)의 기풍을 가지지 않으면 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남아있을 것이요,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지면 그 생활의 매() 요소에게 질서의의실재가 온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교리와 구속의 교리는 역사적으로 도입(倒立)올 함께 한다. 일위신론파 (Unitarian) 신학은 보통으로 펠라기우스주의 인론(人論)과 쏘시너스주의 구원론(救援論)과 결합된다. 에프··코닉 (F.E Koenig) 이 제출한 중언은 눈부시는 것이다. “나는 알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구속의 전() 역사를 내어버린 것은 다른 이유로 인한 것 아니라그들이 삼위 하나님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때문이다” (Warfield, Op. Ct, pp. 139, 167).

 

구속에는 이중적용이 있다. 전자는 근본적인 적용으로 성부의 행위이시다. 우리의 구속을 위해 보증되시는 성자에게 적용하시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구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이다. 후자는 종속적인 적용으로 성령의 사역이시다. 회심이라는 역사 속에서 우리의 구속을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실질적으로 적용시키시는 것이다. 성부의 우리에 대한 구속을 계획하시고,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켜주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구원에 전적으로 무익하고 무력할 뿐이다. 성부는 선택하시고, 성자는 구속하시고, 성령은 효과적인 소명이라는 사역을 통해 선택과 구속의 모든 열매를 우리 영혼에 생생하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시고자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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