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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원

삼위일체론 - 일체에 삼위의 증명

by 영동장로교회 2019. 7. 26.

2 절 일체(一體)에 삼위(三位)의 증명

 

삼위일체는 영어로 Trinity (라티어 Trinitas)인데 이는 라틴어 Tresunus, Trinus로부터 인출되었거나 혹은 헬라어 트리아스 로부터 인출되었다 한다. 그 원어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에 셋, 혹 셋인 하나 또는 하나인 셋이다. 세겹 (triplex)이라는 의미는 아니다라틴어로서 Trinitas Triplicitas 가 아니다.

 

이는 동일한 본체를 갖는 따로 있는 따로 있는 셋이란 의미는 아니다. 따로 있는 셋이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따로 있다는 것은 물질적 관점에서 보는 우리 경험의 산물이다. 이 경우는 동일한 본체라 하더라도 한 본체를 생각할 때는 따로 있는 셋을 모아 겹쳐 놓고 보아야 한다. 한 본체를 이렇게 사고하는 것은 물질적 관점에서 사고하려고 하는 우리 경험의 오류이다.

 

하나님은 따로 떨어진 셋에 똑같은 본체가 각기 주어진 형태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오직 한 본체만 있으시고 이 본체에 셋인 삼위가 계시는 것이다. 이는 이미 빛이라는 예를 들어 설명한 대로이다.

하나님은 한 본체에서 우리의 구원사역을 위해 동시에 삼위로 드러나시는 것이다. 동시에 삼위로 드러나신다함은 한 번은 성부로 드러나시고 또 다른 한 번은 성자로 드러나시며 그 후에는 성령으로 드러나시는 그런 형태로 드러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드러나심인데 이와 같이 드러나심은 소위 양태론이라는 형태의 드러나심이 된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직접적으로는 사용되지 않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한 본체가 영원한 삼위로 실존하신다는 성경의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대 교리의 중심적 사실을 표현하는 술어다. 헬라어 트리아스168~183년 어간의 수리아 안다옥감독 데오빌러스가 최초로 사용하였고 라틴어 ‘trinitas‘220년 경에 털툴리안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한 본체가 영원한 삼위로 실존하신다는 것은 한 본체가 때와 장소에 따라 셋으로 그 양식을 달리해서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고하는 경우를 양태론이라 한다. 한 사람이 가정에서는 아버지로, 학교에서는 교사로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삼위일체의 삼위로 실존하신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존재의 동시성을 반드시 만족시키는 그런 양식으로 드러나야 한다.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하심이 있어야 한다. 이는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빛은 처음부터 입자성을 가졌고 동시에 파동성도 가졌다. 본체는 하나이나 두 가지 성질을 처음부터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파동성이 드러날 환경에서는 파동처럼 일을 하고 입자성이 드러날 조건에서는 입자처럼 일을 하는 것이다. 이는 빛이 어떤 때는 빛으로 나타나고 어떤 순간에는 변하여 입자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파요 입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위일체도 그런 것이다. 처음부터 성부가 계시고, 성자가 계시고, 성령이 계신 것이었다.

 

영어 트리니티(Trinity)는 트리 유니티 (Tri-unity)의 단축이다. 신학적 전문술어로서의 이 말이 함의하는 바는 하나님의 삼위와 그 일체되심을 연결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말할 때에 우리의 의미하는 바가 일체에 삼위, 삼위인 일체라는 것은 물론이다.

 

 

1. 인격성과 복수성(複數性)의 관점에서의 삼위의 증명

 

1) 인격성의 필연에 의해 삼위로 계신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논할 때 하나님은 도덕적 실유이시다고 했다. 이 도덕적 실유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의 원천이라는 것이 함의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실 수 있었고 그 사람은 당연히 인격적 존재로 나타날 수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활은 분명히 인격적 생활로 나타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안에 있는 그 인격을 고찰함으로써 그 원형인 하나님의 인격이 어떠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은 인격적이요, 하나님은 초인격적이라고 말하지 말지니 초인격적인 것은 인격적이 아닌 때문이다. 신적 인격은 인적 인격보다 무한히 더 크나 하나님을 비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범신으로 지시하여 결국 무신(無神)을 단언함이 될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사람 안에 불완전히 존재한 바가 하나님 안에 무한 완전히 존재한다고 말함이 옳을 것이다. Boettner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는 반드시 인격적일 것이다. 우리는 절대의 원리를 예배하기 불능하며 우주적 능력(宇寅的能力)과 교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은 초인격적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굉장한 어구(語句)를 가지고 스스로 속이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83).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라는 것은 인격적인 우리와의 교제를 이루시려는 그 열망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음의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특별한 배려하심이다. 이 배려하심은 비록 우리가 죄인이 된 후에도 우리 속에서 인격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시지는 아니하셨다.

 

신적 인격(神的人格)과 인적 인격(人的人格사이에 판연한 차이는 사람은 한 인격이요, 하나님은 세 인격이시라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경우에 이 인격이 우리의 구원에 관해 사역하심으로 드러나실 경우에는 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이 세 인격()적 존재人格()的存在]는 신적 실유(神的實有) 안에 반드시 그리하셔야만 하는 한 필연이요,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세 인격()적 형식 이외의 다른 형식으로 존재하시기 불능하셨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이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이 일위신이라면 그는 사랑이실 수가 없다. 대상 없이 홀로이신 자가 사랑하실 수 있을까? 사랑은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위신(二位神)이라야만 사랑이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삼위 되심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의 완성이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셔도 되고 하시지 않으셔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의 속성을 지니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자하는 그 사랑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이루셔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하지 않다고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 전제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셨으므로 우리를 향한 그의 구원하심은 필연이 되는 것이다.


2) 복수성은 왜 필요한가?

하나님이 삼위되심에 대한 증명을 위해 다양한 설명이 시도 되었다.

 

쉐드는 자의식에 세 요소로써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이 만일 그 자체에서 삼위가 아니시라면 그는 자기묵상(自己默想)자기인식自己認識)자기교통(自己交通)이 불능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Shedd“DogmTheo1.", Vol, pp. 393 f., 251 ff., 178 ff.). 하나님에게서의 자기묵상, 자기인식, 자기교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는 손상이 있을 바는 아니다. 또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자가 굳이 삼위로 계셔야만 그것이 가능할 것도 아니다.

 

빨트레트 (Bart1ett)는 인격은 다른 인격과의 접촉을 요하며, 인격은 격려되어 발전하거나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다른 인격들과 교결(交結)하여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니신 인격도 그의 안에 있는 다른 인격들과의 교결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Op. Cit., part.).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가 되셔야 한다는 것인데, 완전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이것이 사실일 것이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완전하시므로 인격들의 교결이 있어야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다른 이유에서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찰스 하지는 일위신론(유니테리안)적인 한 인격의 신은 존재하였을 수 있고 만일 그대로 계시되었다면 그의 주재격(主宰格)을 승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로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우리에게 전연 사고될 수 없는 자로-고독하여 환경없는 자, 우교없는 외로운 실유 혹은 도덕적 우교없는 의식적 실유(意識的寶有). 객체없는 주체환경없는 의식적 인격우교나 도덕적 관계나 바른 행동의 영역(碩域)없는 외로운 실유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어디 사랑, 진실, 신뢰 혹 동정적 감정의 영역이 있을 것인가? 창조 전에는 영원한 암흑이었고 창조 후에는 졸병들(장기의)의 세계들로 더불어 무궁한 독구회(獨球를 놀으실 것이다고 했다(“Systematic Theology“ Vol. , p. 127).

 

이 말은 하나님이 심심하지 않으시려고 삼위가 이루어졌다는 논리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시다. 창조 전에 암흑이라는 것도 인간의 입장에서 경험한 결과에서 나오는 오류이다. 암흑은 인간에게 속한 공간이지 하나님에게 적용될 공간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공간에도 제약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너원한 적막에 대한 인격적 우교(人格的友交의 필요에 의해 삼위 되셨다는 이 사고는 참으로 유치한 발상이라 할 것이다. 오직 우리를 향한 그 진실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삼위 되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믿음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사랑의 복수성에 의한 삼위의 증명이 있다.

박형룡은 하나님 안에 사랑의 속성이 그 안에 위()들의 복수성을 중명한다는 이것은 오래 동안 사용되어온 관례적 변론이다. 즉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체전달적(自體傳達的)인데 한 위만인 하나님에 있어서는 사랑이 열망뿐이요만족을 얻지 못하여 현실적인 것보다도 가능적인 것의 범주 아래 있었을 것이다. 이 변론은 다시 단언하기를 하나님은 무한하시니 그의 사랑은 반드시 무한할 것이요, 따라서 무한한 대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두 위(인격)는 이들의 사랑을 전달하며 받을 수 있는 제 삼위를 요구한다고 한다. 이 노선의 변론은 충분히 결정적인 효능을 가진 것이 아닌 듯이 보일 것이다. 한 인격이 홀로 있다고 해서 그것의 사랑의 속성이 소실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인격들과 우교(友交)가 있을 때에 그 사랑에 풍부와 충만과 강력이 주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서만 인격이 최선한 양태(樣廳)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므로 삼위일체의 기초위에서만 우리가 자의식적 영이시며 살아있는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충분히 정당한 개념을 가지는 것이다.”고 했다.(“교의신학 신론”, p, 193)

 

우리의 구원과 관계를 가지지 않은 의미에서의 이 사랑의 복수성에 기초한 삼위의 존재증명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은혜를 별로 느끼지 못하게 한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도덕률, 사랑의 정신, 진실함, 위로에 대한 신뢰 등의 본질이 어디에서 올 수 있는가? 이러한 속성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 스스로 이러한 속성들을 갖고 계셔야만 한다. 그래서 한 인격으로 존재하셔서는 불가능하고 복수로 계셔야만 성립이 되는 이 속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그 인격이 복수로 존재하셔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맺으실 이유가 없었다면 굳이 그 자신에게 이런 속성들이 있게 하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실 그 필연 때문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위 되셨음은 발생과 발출로 설명될 수 있다.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성부는 성자를 발생하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발출하셨다. 그리고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렇게 삼위로 계셨다. 삼위로 계심 속에 구원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삼위되어주신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사랑의 은혜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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