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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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라는 것이 미래지향적임을 우리는 안다. 언젠가 그 날에 주님이 심판주로 오시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복을 누리는 그곳에 임할 것이라는 것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것을 지금 이 순간에 현재의 일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그 복이 임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그래서 현재는 보지 못하는 그 일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누구라도 인정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 사실에 대해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오직 주님이 부르신 우리 성도들만이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믿는 자, 부름 받은 자라고 한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간혹 죽었다가 수 시간 또는 수 일 내에 다시 살아나는 예는 간혹 있지만 결국은 다시 죽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나온 자는 결코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반드시 죽고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경험적으로 지식한다. 그런 그들의 경험적 상식으로는 사람이 다시 살아서 영원히 사는, 영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6장에 기록된 사건은 이런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절대 불가한 사건의 기록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분명히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 이는 로마 병정들이 확인한 사실이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을 정확히 확인하는 전문가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자들이 확인한 주님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분명히 죽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그 사실을 처음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심히 놀라 떨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 그 경이로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삶 속에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 그녀에게 벌어진 것이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메시아로서의 필연적인 일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 부활은 우리가 다시 살 것에 대한 예표였다. 만약 그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살 것에 대한 믿음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셨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다시 살 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의 부활하신 것을 경험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과 함께 했던 자들에게 가서 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그 부활을 자신들이 보지 못했으니 믿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제자 도마도 그러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러나 믿음은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주님께서 그런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어 천국 백성이 되는 그 일은 믿기 이전에 선행하여 경험할 수 없고 반드시 미래적인 사건이기에 이 일에 대한 참된 믿음을 얻게 하시려고 이 같이 교훈하신 것이었다. 결국 이 가르침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그로서 이루어질 그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셨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제자들 모두는 바로 이 믿음이 없었음을 주님의 부활 소식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서 유추해서 알 수 있다.
(막 16: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 날에 자신들도 주님처럼 그렇게 부활할 것이란 사실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생겼을 것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을 말한다. 그 믿음은 너무나도 확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인데, 이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고 단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동할 때 거쳐야 되는 문과 같은 것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원한 복된 천국이 있는데 그 문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그 복된 천국에 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었으니 그 비밀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게 말해주는 그것이 복음 전파하는 일이다. 주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 이웃은 나의 사랑하는 자들인 셈이다. 그런고로 당연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그 하나는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 비밀을 알지 못하니 당연히 전하지 않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가 비록 교회에 출석할지라도 그는 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이기적인 자이다. 그 복된 천국을 자기만 소유하려는 욕심을 가진 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자에게는 천국이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은 사랑이 충만한 자들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적인 자들에게는 그 천국이 허락될 수 없다. 주님이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것도 결국은 그 복음을 전파하는 그 일을 통해 그가 사랑이 충만한 자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구원의 은혜의 선물을 주려 하심인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모두 사랑의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어갔다. 베드로가 그러했고 후에 사도로 부름을 입은 사도바울이 그러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주님이 천국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믿고 세례 받으라 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부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살리실 자이시고 주님의 은혜로 나도 그 날에 부활하여 천국 백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지식하고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찬동하는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이 정도면 족할 것인데 굳이 세례를 받으라 하심은 왜일까?
세례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형식에 사로잡힌 그 세례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된 세례, 즉 자신이 죄인이며 주님이 아니면 도무지 구원받을 길이 없는 자임에 대한 고백을 전제로 하는 그 세례이다.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천국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 되고 만다. 즉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이기적인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는 자는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려드리려고 애를 쓸 것이다. 천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오직 하나님께 진실로 영광 돌려드리는 곳,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곳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세례를 받으라 하신 것이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와 같이 진실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면 여러 가지 표적이 따를 것이라 하셨다. 이 표적들은 구원이 주어질 것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이런 표적은 천국 백성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증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주어짐이다. 이미 사단은 십자가에서 주님에 의해 패배를 당했으니 그 수하들인 귀신들이야 주님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는 것이 당연하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면 능히 그 일이 이루어진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 사단의 무리는 늘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쫓도록 유혹한다. 그 생각을 버리는 것은 곧 귀신을 내어 쫓는 그 일이다.
사도시대에는 사도들이 직접 귀신을 내어 쫓는 일들을 해주었다. 지금은 성경이 완성된 시대이니 성경의 말씀으로 스스로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 더 주류를 이룰 것이다.
또한 새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 했는데 새 방언은 무엇일까?
방언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고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얻고 나면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진리의 비밀을 깨닫게 되니 그 깨달은 말을 할 것이다. 그 말을 그 이웃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전까지는 듣지 못했던 그 이상한 이야기, 그것이 새 방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새 방언이라는 문자 그대로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에 각기 다른 지역의 방언으로 그 진리를 말하였고, 지금도 방언을 하는 성도들이 많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믿는 자가 되면 뱀을 집어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도들은 뱀을 집어도 해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뱀이란 통상적으로 사단을 상징한다. 하와를 유혹한 뱀은 말로 하와를 유혹했다. 뱀을 잡는다는 것은 이단의 그 유혹을 대면함일 수 있다. 온갖 이단사설을 갖다 대어도 이미 진리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이 되면 그 유혹에 넘어갈 리가 없을 것이다. 그 이단의 독이 침투해 와도 그 독에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마비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믿음은 견고한 바위 같아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가 말씀을 전하면 자신의 원죄로 인해 죽음을 향해가는 그가 건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즉 죽음의 병이 치료되는 일이다.
문자 그대로 사도들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는 역사도 이루어 냈다. 그러나 사도 시대가 지나고 성경이 완성된 이 시대는 그런 문자적인 그대로의 의미 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구원사적 관점에서의 해석과 그에 따른 믿음의 생활이 더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지금 문자 그대로 뱀을 집고 무슨 독을 마셔도 해가 없을 것이라 주장하고 그대로 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는 결코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과연 제자들은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순교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그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하였으니 우리도 마땅히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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