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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 오네시모 그리고 바울

by 영동장로교회 2019. 2. 17.

https://drive.google.com/file/d/1f-yzhGXBZEC7lJ_Abw7zrugjiEZhdueG/view?usp=sharing

2019. 2. 17.

빌레몬, 오네시모 그리고 바울

 

(1:19, 개역)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복음을 빚으로 말하고 있다.

영영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은 그 죽을 자가 살려준 자에게 빚을 진 셈이다. 생명의 은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채무자가 아닌가?

빌레몬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에베소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얻은 자였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내게 빚진 것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한 자가 분명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나아가서 이 빚의 근원은 바로 우리 주 예수이시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성부 하나님께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자요, 따라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자리에 선 자들이다. 이는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범함으로써 죄를 지었고, 이 행위는 모든 인류의 원수격으로 행한 일이었기에 우리 모두는 범죄한 자의 신분이 된 것이다.

(5:8, 개역)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래서 영원한 죽음이 선고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불행이 도래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삼으셔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지심이었다. 이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는 죄인된 신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큰 사랑의 선물이요 우리는 이 큰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값없이 얻었기에 주님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빚인 것이다.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그러나 우리 중에 이 복음의 빚에 대해 생각하며 사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값없이 주신 이 사랑을 그냥 선물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겨버린 우리가 아닌가?

 

빚이란 반드시 갚아야할 채무이다. 세상의 도덕적 기준으로도 빚을 갚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는 자라하면 그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할 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세상의 법으로 그는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는 형벌에 처해진다.

 

세상의 법이 이러한데 하나님의 그 사랑의 빚을 지고도 그 빚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이는 양심의 법을 전혀 위반하는 무거운 범법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바울의 이 편지에서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오히려 바울 자신에게 빚진 자된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다.

(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12)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 된 네게랴

(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1: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1: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1: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의 종이었다. 그런 자가 도망을 쳐서 바울에게까지 왔고, 그 바울을 만나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라 칭하고 있고, 믿음의 아들이기에 그를 위해 비록 자신에게 복음의 빚진 자가 되어 있는 빌레몬일지라도 그에게 다시 돌아갈 오네시모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그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복음의 빚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주님은 아무런 선한 것이 없는 우리를 오직 당신의 믿음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부 하나님께 우리를 향한 진노를 멈추어 달라고 간구하신 것이다.

 

어쩌면 빌레몬이 비록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그 종, 오네시모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그 간청을 들어 그를 이제는 종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큰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는 그가 그 땅에서 종의 신분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그 자유도 누리는 그 빚까지 지게 된 것이다.

 

바울에게서 오네시모처럼 주님께서도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는 그 신분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참된 자유자가 되는 그 은혜를 베푸셨으니 이보다 더 큰 빚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을까!

 

바울은 이런 복음에 대한 빚의 원리를 온전히 깨달았기에 그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그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14, 개역)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가 평생에 이룬 이방세계에 복음 전하는 그 선교사역이 그에게 있어서는 빚 갚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 복음 전하는 일을 자신의 공로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라 하는 우리도 우리의 빚을 갚기 위해 열심을 내어야 하지 않을까?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불꽃이 다시 피어올라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