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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진리에 관하여 - 왜 하나님이 진리이신가?(1부)

by 영동장로교회 2025. 11. 9.

2025. 11. 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참된 진리에 관하여 - 왜 하나님이 진리이신가?(1부)”

 

 

시골 외갓집 앞마당에 늙은 감나무에서 홍시가 익어가듯 그렇게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말없이 홀로 선 늙은 감나무가 이제는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오래전 호랭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부터 이야기는 만들어졌고, 그 이야기는 세월의 물줄기를 타고 흘러 내려왔다. 아버지의 아버지에서부터 전해진 그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학문한다는 것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행위이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애 터지게 목숨이 다하도록 찾아 헤매는 걸까?

 

알고자 하는 것은 곧 살고자 함이다. 살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달려들며 알고자 한다. 이 부단한 도전은 결국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내었고,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오고 있다.

 

자연의 현상에 대해 그 속에 담긴 진실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며 매달린 결과, 자연과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그것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 일에 매달린 자를 과학자라고 부른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며 매달린 그 결과는 신학이라는 틀을 이루었고, 그 일에 매달린 자를 신학자라고 칭한다.

 

과학을 하는 자나 신학을 하는 자 모두는 그 속에 담긴 진리가 무엇이냐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이 진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진리는 사물과 존재의 참된 이치를 말하며, 그 참됨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보편타당하게 존재한다. 만약 오늘 한 약속이 내일에 가서 어겨지면 그 약속은 참일 수가 없다. 따라서 진리라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에 변함이 없이 동일해야 한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개념을 어느 분야에서 다루느냐에 따라서 그 색깔은 달리 드러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신학적 진리와는 달리, 절대적·존재론적 차원보다는 경험적·실증적 차원에서 정의된다. 즉, ‘자연 세계에 대한 올바른 기술(記述)’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뉴튼이 살던 시대에서는 말을 타고 40km 떨어진 도시까지 1시간 만에 갔다고 하면 말의 속도가 40km/h라고 했다. 이 진술은 사실과 일치하므로 이것은 진리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는 그 현상이 실제하는 사실과 일치하면 그것을 진리라고 정의한다. 즉 실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측정해서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 자체가 진리라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 가능한 사실이어야만 진리로 간주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의 진리란 “경험적 검증을 통해 사실, 즉 현상(現象)과 일치함이 입증된 명제”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철학적 진리의 ‘일치설’을 과학적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또 다른 한 예를 들어, “물은 1기압에서 100℃에서 끓는다.”라는 것이 실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가능하므로 과학적 진리로 인정된다.

 

이러한 자연과학 진리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첫째는 경험적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관찰과 실험 결과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가설적(hypothetical)이라는 것이다.

 

과학의 진리는 잠정적(temporary truth)이다. 그래서 언제든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새롭게 수정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뉴턴의 물리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말이 달리는 그런 속도 정도밖에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 속력은 빛의 이동속도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빛에 비하면 정지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빛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는 세계에서는 뉴튼이 만든 공식들은 쓸모가 있다.

 

하지만 빛과 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뉴튼이 만든 공식은 쓸모가 없다. 그때는 아인슈타인이 만든 상대성이론에 따른 그 공식을 적용해야 비로소 현상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빛과 같이 빠르게 움직인다면 시간이 정지한다는데, 이것을 뉴튼의 물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는 아니다.

 

세 번째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검증 가능(verifiable)해야 한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주장된 이론은 반드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반복 재현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형이상학적인 철학과는 달리 형이하학적이라고 한다.

 

넷째는 상호 일관적(coherent)이어야 한다. 새로운 진리는 기존의 검증된 과학 지식들과 논리적으로 일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모형적(model-based)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진리를 절대적 실체로 보지 않고, 자연을 설명하는 근사적 모형(model)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 대상의 현상에만 집중하지, 그 존재의 존재 필연성, 즉 존재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예를 들면, 과학은 “비가 왜 내리는가?”를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비가 왜 아름다운가?”, “비를 내리신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자연에도 ‘말씀’이 담겨있다. 그것을 일반계시라고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은 바로 이 말씀에 대한 ‘들음’과 그를 통한 ‘깨달음’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많은 생각에서 물음을 던졌다. “왜 별들은 존재하며, 저 많은 별들이 우리 인생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하는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많은 사유의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시도 결과는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탈레스(Thales, B.C. 624?~546?)를 탄생시켰다. 그는 만물의 근원(아르케)을 물(水)이라고 주장했다. 탈레스가 '물'을 아르케로 본 이유는 당시 그가 관찰했던 자연현상과 생명의 근원에 대한 경험적 추론에 기반했다.

 

물은 생명의 필수 요소이자 생명 유지에 없을 수 없는 요소였다. 모든 생명체는 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물은 생명체의 성장에 필수적이다. 그가 씨앗이나 식물이 물을 통해 자라나는 것을 관찰했을 때, 물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영양분이자 물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탈레스는 생명체가 습한 곳에서 발생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 대지가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눈에는 물이 고체(얼음), 액체(물), 기체(수증기)의 세 가지 상태로 쉽게 변화하는 것으로 보였다.

 

탈레스는 이처럼 하나의 물질이 모든 형태의 물질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이야말로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근원 물질이라고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한 탈레스의 주장은 현대 과학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틀렸지만, 그의 중요성은 최초로 신화적인 설명(mythos)을 배제하고 자연현상 자체 내에서 만물의 근원(logos)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서양 철학과 과학적 사고의 시초로 평가받을만했다.

 

이와 같은 철학에서의 진리는 “생각이나 말이 실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이 정의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명확히 언급했다.

“진리는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즉, 사실(Reality)과 인식(Knowledge)이 일치할 때 철학에서는 진리라는 것이다. 이를 “일치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라는 진술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므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에서도 현상만을 볼 수밖에 없으니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본질에서 명확하게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어 보이는 대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자연과학과 철학에서는 답할 수 없는 그 한계를 초월해서 진리에 대한 그 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진리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철학, 신학, 과학, 윤리 등 모든 사유의 중심에 자리한 질문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 순간조차 인류가 품어 온 이 근원적 물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진리에 관하여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 자신을 진리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진리이실까?

 

사물과 존재의 참된 이치를 진리라 하고, 그 본성은 보편타당하며 불변하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진리이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보편타당하고 불변하는 것”은 고대 형이상학에서 진리의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실재, 즉 “이데아”를 진리의 영역으로 보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근본 원리에 대한 참된 인식”을 진리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사물과 존재의 참된 이치”라는 정의는 고전 철학이 이해한 진리의 본질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철학에서 말하는 “사물과 존재의 참된 이치”가 하나님 안에 존재하여야만 하고, 그 본성 또한 “보편타당하고 불변한다”라는 그 속성을 지니셔야만 한다.

 

철학은 주로 이성적 탐구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 존재, 인식, 윤리 등의 근본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과 논리적 추론에 기초하여 존재의 원리와 의미를 탐구하지만, 신적 계시나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인식은 본질적으로 제한적이다.

 

반면 신학은 철학이 탐구하는 영역을 포괄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인간의 이성을 함께 고려하여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철학이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이며 영원불변하고 인격적인 진리를 다룬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구속, 삼위일체,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 사역 등은 철학적 논리를 넘어서는 영역에 속한다.

 

이처럼 신학은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을 다루기에, 철학은 신학의 부분집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은 철학이 다루는 내용을 충분히 포괄하며, 철학이 말하는 “사물과 존재의 참된 이치”가 하나님을 탐구하는 신학에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보편타당하고 불변하는 속성”이 하나님에게도 반드시 존재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할 때에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구분한다. 그중 비공유적 속성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보편성’을 논한다. 이 보편하시는 속성에 따라 하나님은 편재하시며 모든 보편의 근원이 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보편타당하신 분이시며, 또한 보편타당하여야만 진리로 인정될 수 있기에, 이러한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적어도 ‘진리 자체’이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불변하는 것을 진리의 속성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진리이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변하셔야 한다. 이 점에 있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논할 때,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성품을 지니신 분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적어도 철학이 말하는 진리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신다. 즉,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분명히 진리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사물과 존재의 참된 이치가 영원에서부터 완전하게 실현되어 있으며, 그분은 보편성과 불변성을 지닌 참된 진리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철학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진리 되심에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신학의 시선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과연 계시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그리고 왜 진리이실까?

 

신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철학이나 자연과학이 정의하는 진리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

철학과 과학이 주로 이성적 추론과 경험적 검증을 통해 ‘사실과 명제의 일치’를 진리로 삼는다면, 신학은 진리를 절대적 실체, 곧 존재 그 자체와 연결하여 이해한다.

 

그렇다면 신학에서 진리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신학에서의 진리는 단순히 철학적 일치설에 따른 명제의 사실과의 일치나, 과학적 검증을 통한 현상과의 일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근원적 실체 그 자체를 진리로 본다.

 

따라서 신학은 진리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한다. 하나는 존재 자체로서의 진리, 곧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심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진리, 즉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

 

존재 자체로서의 진리를 말할 때, 신학,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진리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진리이시며, 이는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되신다. 성경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증언하고 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이 그에게서부터 나왔다"라는 이 표현은 신학적 관점에서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힌 말씀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아르케)이시며, 따라서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되심을 선언하고 있음이다.

 

모든 참된 원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니, 하나님은 참된 이치의 근원이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진리이신 것이다. 이 말씀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은 모든 원인의 원인되시는 실유이시다”라는 명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세 동사는 하나님의 궁극적 근원성과 완전한 순환적 존재 구조를 드러낸다. 이는 곧 경륜적 삼위일체의 질서 속에서 성부로부터 시작된 모든 존재가 성자를 통하여 역사하고, 성령 안에서 완성되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거룩한 순환의 원리를 증언한다. 그리하여 만물의 기원과 목적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며, 그 통일의 중심에는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심이 드러난다.

 

즉, 성부로부터 기원하고, 성자를 통하여 성취되며, 성령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질서가 곧 진리의 존재론적 구조인 것이다. 주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모든 만물의 기원(Origin)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선포이다. 이는 분명히 진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힘이다.

 

이 삼위일체적 순환의 질서는 곧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 즉 진리의 존재론적 구조를 보여준다.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