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10부)“
-백배나 돌려받는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중심으로(2)-
계속해서 호크마 주석에서는 ”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라고 보장하신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 속에도 세상적인 물질로 백배 보상을 약속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호크마 주석의 이 해석은 전혀 영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잘못된 해석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이 주석을 참고한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그러하니 이 해석은 참고하라고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호크마 주석에서는 이 말씀이 역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말씀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바른 원리를 깨달은 자라면 오히려 참으로 수긍이 가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꼭 유념해야 할 것이 바로 신앙의 절제이다. 혹 미혹하는 영에 의해 감정적으로 휩쓸릴 때가 있을 것이다. 대개는 부흥회와 같은 종교행사에서 부흥사의 유혹하는 손길에 휘말려 들 수 있다. 그들은 물질적인 축복을 미끼로 한 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때 등장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이 구절이다.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신앙의 절제가 꼭 필요하다. 맹목적인 신앙은 신앙의 삼요소 중에서 지식의 결핍에 따른 결과로 발생한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여 깨닫지 못한다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백배나 되는 물질적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이단들의 유혹에 빠져 가정이 파탄이 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과 같은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 일은 믿음의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된다.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믿음의 삼요소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지식이라는 요소를 견고히 하고자 함이다.
(참조: 칼빈은 ‘지식’(cognitio)을 단순한 지성적 인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cognitio Dei(하나님을 아는 지식)는 단순한 notitia나 scientia에 머물지 않는다.
notitia가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인지하는 것’이라면, scientia는 그것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확신하는 지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칼빈이 말한 cognitio는 이러한 인식과 이해를 넘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분의 성품과 뜻을 경건하게 깨닫고, 그에 순종하는 신앙적 앎을 가리킨다.
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의 성품과 뜻을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
신학자들은 종종 notitia와 scientia를 믿음의 지적 요소로 함께 논의한다. 이는 단순한 인지를 넘어, 이해와 확신이 결합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칼빈이 말한 cognitio—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는 이러한 지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는 이 지식을 인간의 전인(全人), 곧 마음(heart)과 정서(affection)가 함께 반응하는 영적 인식으로 이해했다. 칼빈에게 믿음이란 단순한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경외로 반응하는 전인적 지식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도구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바로 이 믿음의 삼요소 중에서 지식에 대한 참된 가르침을 주려 하심이었다. 이 말씀을 주신 주님의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8:21,22의 말씀이다.
(마 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에서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의 구분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천륜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어떻게 돌아가신 부친을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한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일을 탐하는 자의 세상 일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속한 자라면 죽은 부친을 장사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는 일 중에서 무엇이 먼저일까?
그들에게는 부친을 장사하는 일보다 복음 사역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미친 자로 보일 것이다. 복음 사역이라는 것이 하등의 가치 없는 일, 즉 돈이 되는 일이 아니기에 그런 일을 신경 쓰는 자를 미친 자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자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은 부친을 장사하는 그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부친의 경우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음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라면 둘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할까? 예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의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마가복음 10장의 그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한참 감당하고 계실 때 예수의 친척들이 그 일을 하시는 예수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아 가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척들이 지켜본 예수는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로 자랐는데, 지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또 제자들이 따르고 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정신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을 이해하는 열쇠를 얻을 수 있다.
이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살피면 다음과 같다.
이 일이 일어난 때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하신 초기였다. 이때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막 세우신 그 직후였다. 그리고 이 일이 벌어진 곳은 아마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집에 들어가시니”에서 ‘집’은 베드로의 집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막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막 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막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이때의 상황은, 소문을 들은 무리가 몰려와 예수께서는“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분주하셨다. 아마도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이 계속되어 예수와 제자들이 과로와 과열 상태였을 것이다.
(막 3: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이나 친척들의 판단과 행동이 “그의 사람들이(οἱ παρ’ αὐτοῦ) 듣고 붙들러 나섰으니, 그가 미쳤다(ἐξέστη, 제정신이 아니다) 함이라”였다.
(막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러면 그들이 왜 예수를 ‘미쳤다’고 보았을까?
첫째로는 휴식·식사도 못 할 정도로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일로 과로하는 그 모습에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예수의 끝없는 군중과 논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예수의 말과 행동이 그들이 생각에는 상식 밖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의 계율 속에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내뱉는 말들은 당시의 사회·종교적 충돌을 일으킬 만큼 위험한 말들이었다. 어쩌면 예수의 그 행동으로 인해 가문의 체면과 명예에 누를 끼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해서든지 이를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급기야는 자기들만으로 어렵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모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까지 부른 것이었다.
마가는 이 사건을 A–B–A’로 배치해 의미를 부각시켰다.
A (막 3:21): 가족이 “미쳤다”며 데리러 옴.
B (막 3:22–30): 예루살렘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바알세불 힘으로 귀신을 쫓는다”고 하며 비난. 예수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집은 설 수 없다”,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 약탈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을 모독하는 죄의 엄중함을 선포함.
마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기술함으로써 가족의 오해(A)와 종교 지도자의 적대(B)를 나란히 두어, 예수의 사역을 인간적 오해와 영적 왜곡이 둘러싼 장면으로 극대화시켰다
.
A’ (막 3:31–35):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예수를 부름.
여기서 드디어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29절과 30절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셨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에 속한 자들에게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심어주셨다. 이 가르침은 혈연 중심의 결속에서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이라는 관점에서의 새 가족 규범으로 재정의하심이 되었다.
예수의 가족 구성은 야고보, 요셉(요셉/요세), 유다, 시몬과 여자 형제들이었다.
(전통에 따라 ‘형제’의 범주 해석은 다름.)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요한복음 7장 5절의 기록은 예수의 형제들이 처음엔 믿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부활 후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막 6: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막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행 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행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행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행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행 15: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행 15: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행 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행 15: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요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여기 본문에서 “미쳤다”(ἐξέστη)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제자리를 떠났다/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에게도 비슷한 비난이 있었다. 이는 예언자적 열정을 사회는 때때로 광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행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이러한 과격한 공개 행동은 가족 구성원의 입장에서는 집안 명예가 손상될 위험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영에 속하지 아니한 가족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당연히 개입하였을 것이다.
이 사건을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이 사역은 가족의 선의적 오해와 권위자들의 적대를 동시에 받는 일이 되었다. 제자도는 혈연보다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으로 규정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를 데려가려고 왔을 때, 예수는 드디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선포하셨다. 바로 이 말씀 속에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을 해석할 열쇠가 담겨 있었다.
(막 3: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막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제 장면을 변화시켜 마가복음 10장으로 가보자.
예수께서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전토는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땅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곡식의 수확을 기대하는 땅으로 전토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육에 속한 자들의 언어이다. 믿음의 백성이 되면 영에 속한 자가 된다. 영에 속한 자가 할 수확은 복음을 통해 얻어질 그 수확이다. 영에 속한 자에게 있어서는 이 수확이 곡식을 수확하는 그 일보다 우선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그는 자신이 소유했던 세상의 그 많은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다. 대신에 영의 수확을 기대하고 복음의 열매를 얻는 전토를 바랐다. 그 결과 그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소아시아 전체를 영의 전토로 얻었다. 그가 얻은 복음의 영지가 이전에 소유했던 그것들과는 비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이 땅에서 복음의 수확을 얻을 영의 그 전토는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얻게 될 그 복에 대한 그림자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그 복을 이미 준비하셨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 전토를 버리는 자는 금생에 백배로 보상받으리라고 말씀하심이었다.
이 사실의 그림자는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생활 속에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광야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거리로 삼았다. 그 삶은 주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가르친 그것의 예표였다. 광야에서의 그들의 그 삶이 넉넉했을까!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모세의 인도를 거부한 자들은 선동하기를 고기 가마를 걸어두었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부추겼다. 만약 그들이 광야에서 먹거리가 풍족했고, 고급스러운 주택이 있었더라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까?
(출 16: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주님이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는 것은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에 만족하라는 가르침이셨다. 이 땅은 우리가 이를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잠시 거쳐 가는 곳으로서 믿음의 훈련을 받는 훈련소가 아니던가!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훈련병에게는 넘치는 먹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훈련을 받는 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양만 제공한다. 훈련병에게 먹거리를 넘쳐나도록 제공함으로써 배가 남산만 해지도록 만든다면 그곳은 바른 훈련소가 될 수 없다. 또 그런 훈련병은 본적도 없을 것이다.
훈련소는 임시적인 처소다. 훈련을 끝마치고 나면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믿음의 백성에게는 이 세상이 바로 그런 훈련소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 구절이 이 땅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모세의 인도를 거부한 그런 자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주님은 마가복음 3장에서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참 형제요 부모가 있음을 가르치셨고, 천국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가르치셨다. 어쩌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가족 공동체만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의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있게 될까!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눅 2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눅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주님과 복음을 위해 세상에만 속해 있는 부모 형제를 떠난 우리에게 단순히 숫자적인 백배의 부모와 형제만 생기겠는가!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백배란 완전하게 많을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의 백배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호크마 주석에서는 ”금세에 있어...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 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모친과 아내 등을 몇 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해석을 하지 못함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구절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이 구절의 바른 해석을 막는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된다.
사도 바울은 홀로 독신으로 살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디모데를 아들이라 불렀다. 디모데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있었을뿐 아니라 자기에게 믿음을 심어준 바울, 즉 믿음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해준 바울은 믿음의 아버지였다.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도 믿음을 알게 해준 믿음의 스승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우리를 태어나게 해준 자들이니 부모에 해당한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믿음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있겠는가!
(막 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실제로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실 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다.
(요 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전토를 백배나 받는다는 것은 복음 전할 대상지를 말함이다. 그런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전체를 전토를 받았다. 영의 농사를 짓는 땅이다. 사람들은 세상적으로만 생각하니 곡식을 가꾸는 토지만 생각하여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주님은 말씀을 맺으실 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하심으로써 끝을 맺으셨다. 이는 참으로 엄중한 경고였다. 깨어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화가 미칠 것이다.
(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하셨다. 기회를 잡으라 하심이셨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이렇게까지 애태우시며 말씀하셨을까!
(막 4: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의 원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교회 시대의 백성들에게 장자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우리가 나중 된 자였는데, 지금은 우리가 장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우리가 먼저 된 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우리 중에서라도 이 말씀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역시 나중 된 자의 자리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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