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2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9부)“
-백배나 돌려받는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중심으로(1)-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아주 묘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내어 버리라는 투로 말씀하시고는, 여기서는 또 재물을 백 배나 돌려받는다고 하심으로써 재물에 대한 욕심을 부추키는 듯한 발언을 하신다.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에 대해 “The Pulpit Commentary”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참조: The Pulpit Commentary는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약 100여 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방대한 주석 시리즈이다.
총 편집자(Editors-in-chief)는 Joseph S. Exell (1849–1909 영국 성공회 목사, 다작의 편집자이자 설교 자료집 출판가)와 Henry Donald Maurice Spence-Jones (1836–1917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성직자이자 학자)이며, 이 두 사람이 총괄 편집자(General Editors)로서 전체 시리즈를 기획하고, 여러 신학자들에게 각 성경권별 집필을 맡겼다.
출판은 1880년대부터 1919년까지 순차적으로 출판되었으며, 특징은 성경 각 절마다 설교적 적용과 주해가 풍부하게 실렸는데, 학문적 주석이라기보다는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참고하도록 만든 ‘강단용 주석’이었고, 신학적으로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당시 영국 성공회의 색채가 짙다. 특히 마가복음은 Edward Henry Bickersteth가 주로 집필했다.)
Mark 10:29
St. Matthew (Matthew 19:28) here introduces the great promise, to be fulfilled in the regeneration, that is, at the second coming of Christ—at the second birth of the world to a new and glorious state. It may be that St. Matthew was guided to record it, inasmuch as his Gospel was written for Jews. Its omission by St. Mark and St. Luke may be explained by the fact that they were writing, the one to Romans, and the other to Gentiles generally. Omitting further notice here of this great promise recorded only by St. Matthew, St. Mark's words seem general, common to all faithful Christians. This leaving, of house, or brethren, or sisters, etc., might be rendered necessary from various causes. But they are all covered by that one expression, for my sake, and for the gospel's.
Mark 10:30
But he shall receive a hundredfold now in this time ( ἑκατονταπλασίονα). St. Luke (Luke 18:30) says ( πολλαπλασίονα) "manifold more"—an indefinite increase, to show the greatness and multitude of the recompense. He who forsakes his own for the sake of Christ will find others, many in number, who will give him the love of brethren and sisters, with even greater affection; so that he will seem not to have lost or forsaken his own, but to have received them again with interest. For spiritual affections are far deeper than natural; and his love is stronger who burns with heavenly love which God has kindled, than he who is influenced by earthly love only, which only nature has planted. But in the fullest sense, he who forsakes these earthly things for the sake of Christ, receives instead, God himself. For to those who forsake all for him, he is himself father, brother, sister, and all things. So that he will have possessions far richer than what earth can supply; only with persecutions ( μετὰ διωγμῶν). This is a very striking addition. Our Lord here includes "persecutions" in the number of the Christian's blessings. And no doubt there is a noble sense in which persecutions are really amongst the blessings of the believer. "If ye be reproached for the Name of Christ, happy are ye;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eth upon you" (1 Peter 4:14). St. Peter, who must have had in his mind the "with persecutions" of our Lord when he wrote these words, here shows that the blessedness of the Christian when suffering persecution is this, that he has a special sense of the abiding presence of the Spirit of God, bringing with it the assurance of future glory. "Rejoice, and be exceeding glad: fa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The words are also, of course, a warning to the disciples as to the persecutions that awaited them. And in the world to come eternal life. This is that splendid inheritance in which the blessed shall be heirs of God and joint-heirs with Christ; and so shall possess not only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all things that are in them, hut even God himself, and all honor, all glory, all joy, not merely as occupiers, but as heirs for ever; as long as God himself shall be, who is himself "the eternal God."
이 주석의 국문 해석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10:29:
마태복음(마 19:28)에서는 ‘중생(重生, regeneration)’ 즉, 세상이 새롭고 영광스러운 상태로 다시 태어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성취될 큰 약속을 소개한다. 마태가 이 내용을 기록한 것은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마가와 누가가 이 부분을 생략한 것은, 마가는 로마인들을 위해, 누가는 일반적인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태만 기록한 그 큰 약속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고, 마가의 기록은 보다 일반적이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되는 말씀으로 보인다. 곧 집이나 형제나 자매 등을 버리는 일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표현, 곧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로 요약된다.
마가복음 10:30:
“이 세대에서 백 배를 받되”(헬라어: ἑκατονταπλασίονα, hekatontaplasiona) — 누가는 “여러 배”(πολλαπλασίονα, pollaplasiona)라고 하여, 보상의 위대함과 풍성함을 드러내는 무한한 증가를 뜻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것을 버린 자는 다른 사람들, 수많은 이들로부터 형제와 자매의 사랑을 받게 되는데, 이는 원래 가졌던 가족의 사랑보다도 더 크다. 그래서 그는 자기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자까지 붙여 다시 받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랑은 자연적 사랑보다 훨씬 더 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불러일으킨 하늘의 사랑으로 불타는 자의 사랑은, 단순히 본성에서 비롯된 땅의 사랑보다 훨씬 강하다.
그러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이 땅의 것들을 버린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는다. 모든 것을 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형제, 자매, 곧 모든 것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이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소유를 갖게 된다.
다만, “핍박과 함께”(μετὰ διωγμῶν, meta diogmon)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주님은 여기서 “핍박”조차도 그리스도인의 복 중 하나로 포함시키셨다. 실제로 믿는 자에게는 핍박이 복 가운데 하나라는 숭고한 의미가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베드로는 이 말씀을 쓸 때, 분명 주님의 “핍박과 함께”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핍박 중에 누리는 복의 본질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항상 임재하심을 특별히 경험하는 데 있으며, 그것이 장차 받을 영광의 보증이 된다고 설명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2)
또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가올 핍박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는다.”
이것은 장차 성도들이 얻게 될 영광스러운 상속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며,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모든 존귀, 모든 영광, 모든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단순한 점유자가 아니라, 영원히 상속자로서 누리게 될 것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신 분이신 만큼, 그 상속도 영원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The Pulpit Commentary“의 주석의 설명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호크마 주석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다.
참고로 이 성경 구절에 대한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해설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John Chrysostom)는 재물과 관계를 위해 버린 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영적 복을 주시며, 문자적 보상이 아니라 “영적 축복의 역설”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특히 공동체와 영적 유대로 되돌려 주는 복이라고 강조했다.
Meyer (19세기 주석가)는 “백 배”라는 표현은 문자적 보상이 아니라 풍성한 복의 상징으로 보았다. “많은 복”이라는 말과 병행해 현세에서의 놀라운 축복을 표현하며, 단순한 재물의 풍요를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Henry’s Complete Commentary에서는 원가족을 포기하면 얻게 될 것은 세속 가족보다 더 끈끈한 교회적 관계 즉,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영적 가족의 확대와 회복을 강조했다.
장 칼빈 (John Calvin)은 이 구절에 대해 명시된 주석은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팔라”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내면의 탐욕과 애착을 제거하는 영적 치유의 말씀이라고만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 생각을 밝힐 차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먼저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의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마가는 분명히 이 사건의 전개를 시작할 때,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라는 그 질문을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물질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생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성경은 세상적인 관심사를 말하지 않는다. 더더욱 세상적인 복을 구하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을 나누는 그 삶을 이루도록 하는 경지에 도달하도록 안내하는 지침서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영적인 입장으로 바라보아야만 그 답이 보인다. 그런데 호크마 주석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막10: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 3복음서에 모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결국 예수.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 것에 대해서도 누가는 “아내”를 첨가하고 “전토”를 생략하나 뜻에는 차이가 없다. 마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를 삽입시킨다.
성 경: [막10:30]
금세에 있어...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 본서의 특색은 “핍박을 겸하여 받고”에 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 없이 받은 축복은 마귀의 선물인 것이다(욥42:12-16). 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라고 보장하신다.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치 못하면 주의 깊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의 ”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라는 이 언급 자체가 이 주석서는 이 말씀을 세상의 물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 또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라는 이 말도 그 이면에는 물질적인 보상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고 있음일 것이다.
역시 ”정당한 수고가 없이 받은 축복“이라는 이 말속에서도 물질적인 관점에서의 보상을 염두에 둔 해석이라는 것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용한 욥의 축복에 관한 이야기도 그러하다. 욥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시험하신 고난을 모두 통과한 후에 그가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부의 회복과 새로운 자식을 얻게 된 그 이야기이다.
욥의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욥이 시험을 통과한 후에 ”이제는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그 이전까지는 ‘들음’에 기초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욥이 이전까지는 ”그러하다고 하니 나도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라는 그런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래 믿음이란 지식과 찬동과 신뢰라는 삼 요소로 구성된다. 귀로만 들었다는 것은 확신을 가지고 찬동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이전까지의 욥의 믿음이란 참된 경지에 이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있었던 욥의 믿음일지라도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훌륭한 믿음이었다.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잔치라도 하면 그 잔치 날이 지나서 욥은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다.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이런 욥의 믿음을 어떻게 모자란 믿음이라 할 것인가!
(욥 1: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어쩌면 욥의 이 믿음은 우리의 믿음을 상징하고 있음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거룩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순간에도 흔들이지 않는 믿음, 그것은 욥이 고난을 당한 후에 ”내가 귀로만 들었사옵더니 이제는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는 그런 경지에까지 이른 그 믿음일 때만 가능하다.
그때의 믿음이 바로 온전한 믿음이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한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제자들의 믿음이 그랬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그들 앞에 나타나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은 들은 믿음이었다. 주님이 장차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들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의 들은 믿음이 되었다. 그랬으니 주님이 붙잡히시던 그 순간에 그들 모두는 주님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부할하신 주님을 만나보았을 때에서야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변했다.
그래서 끝내는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이 들은 믿음이 아니라 직접 뵈옵는 그런 믿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물질을 다시 주시되 곱절로 주셨다. 다시 자녀들도 주셨는데, 그 주신 복이 얼마나 컸으면 그에게 주신 딸들이 전국에서 가장 이뻤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을까!
처음 얻었던 딸들의 미모에 대해서는 성경이 언급하지 않았는데, 두 번째로 얻은 딸들은 이렇게 미모가 뛰어났다는 것은 자녀를 주시되 최고의 복으로 채워주심을 잘 묘사한 표현이다. 욥에게 그런 복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는 온전한 믿음의 상태, 즉 영화단계에 이르면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그 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심이다.
그러하니 욥의 그 이야기는 주님이 지금 말씀하고 있는 그 복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이다.
(욥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 42: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욥 42: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욥 42: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내용이 길어서 마무리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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