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2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6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라는 고백에서 드러난 베드로의 성향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2) -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태도는 애정 어린 충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세상적인 욕심이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런 충성은 사실상 예수의 구속 사역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사탄”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책망하셨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에 보여진 베드로의 삶에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한다. 그는 신앙고백을 통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담대히 외쳤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나 그 고백 직후,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자 곧바로 인간적 생각을 앞세워 그 길을 막아서려 했다. 이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한다. 신앙고백 이후에도 “자기의 의”가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고, 본성상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성령의 역사로 중생의 은혜가 주어진다. 이는 죄로 죽어 있던 심령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며, 창조의 은혜가 새롭게 임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 위에 들어서게 된다. 이를 성경은 ‘성화’라 부른다. 성화란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성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즉시 성숙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화의 길에 막 들어선 자는 여전히 세속적 사고와 인간적 욕망이 남아 있음을 경험한다.
그래서 때로는 신앙이 왜곡되기도 한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면서도 권력적 야망을 품거나, 칼을 휘두르고, 심지어 주님을 부인했던 사건은 성화의 과정이 결코 단숨에 이뤄지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막 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 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막 10: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막 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눅 22:56)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눅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의 길에서 “자기의 의”를 경계해야 한다. 신앙고백이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은혜로 시작된 중생은 곧 성화의 과정 속에서 다듬어지고 훈련된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점차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이것이 곧 참된 제자의 길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되어 가는 은혜의 여정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이란 세속적인 욕심이 내포된 자기 뜻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곧이어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라고 그렇게 강하게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세상의 유익을 구하는 그 욕심을 모두 내다 버리라는 것이 아닌가?.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사건은 베드로의 충성심과 열정, 그러나 동시에 성급함·자기 의·메시아 이해의 왜곡을 보여주었다. 그는 스승을 지키려 했으나,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연약함이 훗날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참된 믿음의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으로 행한 행동은 이런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일을 결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참된 주님의 제자라면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아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세 번째로 살펴볼 사건은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신 이후에 일어난다.
앞의 16장에서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메시아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변형되었다. 이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말씀을 나누었다. 이 두 인물은 각각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며,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성취하실 분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이 순간에 베드로는 압도적인 영광의 광경 앞에서 깊이 묵상하지 못하고 즉시 반응하고 만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은 순간의 감정에 이끌린 그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초막 셋을 짓겠다”라는 제안은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현재의 황홀한 체험에 머무르고자 하는 세속적인 안주의 태도를 드러낼 뿐이었다. 세상적인 욕망의 표출이었다.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베드로의 그런 주장은 예수의 중심성을 흐리는 인간적 발상이 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예수, 모세, 엘리야에게 각각 초막 하나씩을 지어 주겠다고 했다. 이는 무의식중에 예수를 율법과 선지자와 동등한 위치에 두려는 위험한 발상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 사건의 핵심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를 증언하는 조연임에도, 베드로는 세 인물을 나란히 세우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어찌 사람과 동등한 자리에 세우려 하는가! 이는 참으로 망령된 행동이 아닌가!
베드로의 이 주장에서는 지도욕과 앞서 나서려는 기질도 잘 드러난다.
그 자리에는 베드로를 포함해서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제자들 중에서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낸 사람은 베드로였다. 이는 그의 주도적이고 앞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다시금 보여준 사건이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를 자기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정도의 인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이도 베드로가 위니 능히 그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베드로는 불쑥불쑥 나서서 예수를 가르치듯 말하곤 한 것이리라.
실제로 베드로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 했다. 이는 그의 스승 예수에게 메시아적 길(십자가)을 오히려 가르치듯 막아선 일이 되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것은 예수의 예언(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스스로 부정하며, 자기 생각을 더 옳다고 주장한 일이었다.
또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의 사건은 불쑥 나서기를 좋아한 그의 기질이 여과 없이 드러난 일이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지키려 하며, 주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베드로의 성향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의 제안은 열정적이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적 열심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바른 믿음은 단순한 열정이나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믿음은 지식(notitia), 신뢰(fiducia), 찬동(assensus)의 세 요소가 조화롭게 함께할 때 비로소 온전하다. 특히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참된 신뢰도, 온전한 찬동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알아가야 하며, 그 지식 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함으로써 바른 믿음을 세워가야 한다.
(잠 19:2)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니 바른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는 바른 믿음의 지식을 얻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일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이다. 이 사건이 벌어진 단계에서의 베드로의 믿음은 아직 완전한 성령의 임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는 성경을 기록할 정도의 완전한 믿음의 지식을 이룬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성령의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 온전한 믿음의 지식을 이룰 수 있기를 원하는 기도를 늘 해나가야 한다.
곧이어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를 동등하게 놓으려 한 베드로의 생각은 잘못된 메시아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이 선언을 통해 오직 예수만이 구속사의 중심이며,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가 되심을 확증하셨다. 이는 곧 베드로에게 바른 믿음의 지식을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교정이자, 참된 제자로서의 눈을 열어주시는 사건이었다.
베드로는 황홀한 체험 속에 머물고 싶어 했으나, 예수의 길은 산 아래 현실, 곧 십자가로 이어졌다. 제자라면 영광의 순간을 경험하되, 그곳에서의 안주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함을 이 사건은 보여주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허구라는 사실을 이 사건은 강력히 암시하고 있었다.
변화산에서의 사건에서 베드로는 성급하고 감정적이며, 영광에 안주하려 하고, 예수의 중심성을 흐리며, 앞서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심으로써, 베드로의 인간적 열심을 교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독보적 중심성을 이 사건을 통해 강조하셨다.
이제는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하는 그 사건으로 가보자.
베드로의 이 부인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 사건의 배경은 이렇다.
이 사건은 십자가 직전의 긴박한 시점에서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시는 길에 이 말씀을 하셨다. 곧 체포와 재판, 십자가 죽음이라는 절정의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것이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 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스가랴 13:7의 말씀으로, 목자가 타격을 입을 때 양들이 흩어지는 예언이었다. 이는 예수의 체포와 십자가 사건 속에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칠 것을 암시한다.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순히 제자들의 실패만을 지적하지 않으셨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하신 말씀은 부활 이후의 재회를 약속하신 선언이었다. 이는 제자들의 실족이 최종적인 버림이나 단절이 아님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곧 장차 있을 연약함과 넘어짐 속에서도 끝내 회복시키시겠다는 위로의 약속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너질 제자들을 정죄하기보다, 그들을 회복의 길로 이끄실 은혜의 목자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런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도 베푸시려는 주님의 그 사랑을 이해하겠는가?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 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때 베드로는 역시나 누구보다 먼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그의 뜨거운 성격과 예수에 대한 충성심을 잘 보여준다. 베드로는 늘 제자들 중 가장 앞서 나서고, 행동이 빠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주님께 충성하는 일도 내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임하여야만 가능한 일임에도 베드로는 자기의 능력만으로 감당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지극한 교만이었다.
결국 그 자신감과 충성심은 그가 세 번 부인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자신의 의지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태도가 드러났다. 예수의 말씀(예언)보다 자기 결심을 더 믿었기에 영적 현실을 냉정히 보지 못했다. 이 자기 과신이 조금 후에 세 번 부인하는 일로 이어졌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주님을 버려도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충성을 남들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려는 성향을 잘 보여준다.
어쩌면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를 따르면서 얻게 될 몫을 더 챙기려는 세상적인 욕심도 깔려있었으리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는 고백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닥쳤을 때 현실과 괴리된 말이 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마음은 원했지만 육신이 약했던 제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베드로의 그 연약한 믿음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베드로가 훗날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교회의 반석이 된 것은,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를 허락하실 것에 대한 증거로 보여주심이었다.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 사건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연약함을 예언하심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 후 회복을 약속하시는 순간들이었다. 베드로는 외견상 충성과 열심이 누구보다 강했으나,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성향을 지녔다.
그는 예수를 사랑했지만, 인간적 열심만으로는 믿음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베드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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