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3부)“
- 부자 청년의 구원 여부를 중심으로(2)-
부자 청년의 이 이야기를 쫓아가다가 보면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은, ”이 부자 청년이 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구원받았을까“하는 점이다.
정말로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 부자 청년이 훗날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는 세 공관복음서(마 19:16-22, 막 10:17-22, 눅 18:18-23)에 모두 나오지만, 그 이후 그의 삶이나 결말에 대해서는 성경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눅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눅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눅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의 이야기는 예수의 부르심 앞에서 큰 재물을 버리지 못하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만 기록되면서 끝을 맺는다.
이후에 그가 회개했는지, 예수를 다시 따르게 되었는지, 혹은 계속 부에 집착하다가 멀어졌는지는 성경이 침묵한다.
따라서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며, 의도적으로 비워둔 공백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즉, 독자가 자기 자신을 부자 청년의 자리에서 성찰하도록 여지를 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다.
오리겐(Origen)은 이 부자 청년이 당대 율법적 의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전형으로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결말은 알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이해한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청년이 율법의 요구는 지켰으나 "사랑"(caritas), 곧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버리는 헌신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가 끝내 회개했는지의 그 여부는 모른다고 결론했다.
칼빈(Calvin)은 이 청년의 질문이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했으나, 결국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드러낸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내 구원받지 못했다는 단정은 피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 부자 청년 이야기가 ‘제자직(Discipleship)’의 본질을 보여주는 교훈적 사례이지, 특정 개인의 운명을 추적하려는 목적은 없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그의 마지막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이는 청년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나중에 변화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열린 가능성을 남겨둠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그 인물의 운명이 아니라, “너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혹시 이 부자 청년이 예수를 무덤에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인물과는 어떤 연관성은 없을까?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를 무덤에 장사지낸 인물과 부자 청년 사이에는 명시적인 연관은 없다. 예수를 장사지낸 인물에 대해서는 4복음서에서 모두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 27:57–60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마가복음 15:42–46에도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언급하고, 누가복음 23:50–53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언급하였으며, 요한복음 19:38에서도 역시 “아리마대 요셉, 예수의 제자였으나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던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 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마 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 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막 15:42)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막 15: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막 15: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주는지라
(막 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 15:47)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요세: 신약 성경에서 “히브리어/아람어 이름 ‘요세프’(יוסף, Yosef)”가 그리스어로 표기될 때, 마가복음에서는 “요세”(Joseph → 요세), 다른 복음서에서는 “요셉”(Joseph → 요셉)으로 번역되거나 표기 방식이 다를 수 있다. 즉, 마가복음 15장 43-47의 요세는 마태복음 27장 57-61, 누가복음 23장 50-53, 요한복음 19장 38에서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과 동일 인물이다.)
(요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 19: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 19: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 19: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모두가 이름은 ‘요셉’이고 출신은 ‘아리마대’라고 밝히고 있으며, 부유하거나 유력한 인사였다고 하고, 예수의 제자였으나 일부 기록에서는 ‘비밀 제자’로 언급되고 있다.
마가복음 10:17–22, 마태 19:16–22, 누가 18:18–23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서 등장하는데, 이름이나 출신, 사회적 지위가 명시되지 않았다. 누가는 단지 ‘관원’이라는 정도로 그 사회에서 그냥 유력한 지위에 있다는 정도로 소개했다.
성경 기록의 이 사실은 우리가 구원을 받음은 “누구의 자손“이거나,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아무리 나의 부모님의 믿음이 모두가 인정할 만큼 뛰어나더라도 나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지, ”믿음 좋으신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을지라도 이삭은 구원받았고, 이스마엘은 제외되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믿음을 인정하셨음에도 그의 아들 에서는 구원에 이르지 못했고, 야곱만 구원을 얻었다. 이것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냄이다. 그래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와 일대일의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부자 청년의 이 이야기는 그것을 강조하려고 그의 이름이나 어느 가문의 자손인지 그리고 그의 직위가 무엇이었는지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런 이유로, 만약에 혹시 그가 요셉과 동일 인물일지라도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이 장면에서는 그가 요셉과 동일한 인물임을 밝히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그가 요셉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기록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부자 청년이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다”라는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일부 신학자들이 문학적 상징으로 부자 청년과 아리마대 요셉을 동일 인물로 연결 짓기도 하지만, 공인된 학설이나 전통적 주석에서는 연관성을 두지 않고 있다. 결국 목적상 ‘부자 청년’과 ‘아리마대 요셉’은 각각 다른 교훈적·신학적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구원과 관련해서 “제자도의 희생과 재물 의존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함이었으며,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은 예수 장례를 통한 “존경과 헌신, 예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성경 내에는 부자 청년과 예수 장례를 담당한 아리마대 요셉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나 동일인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자 청년이 구원을 얻었을까 하는 점에는 관심이 끌린다.
이 부자 청년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다.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 입장에서는 이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을 경우,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왜냐하면. 택함이 없으면 예수께 나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개신교와 루터파의 입장에서는 성경이 결말을 기록하지 않아, 구원 여부를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 이야기는 구원에 관한 교훈적 의미에 초점을 둔다고 본다.
반면에 알미니우스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반응에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되므로, 근심하며 떠난 이 청년이 끝내 회개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R.C. Sproul같은 신학자는 “예수께서 그를 보고 사랑하셨다”라는 이 표현은 은혜의 표시이며, 선택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해석했다.
Martin Luther는 부자 청년의 질문과 근심은 인간의 죄성과 재물의 우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았고, 구원 여부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했다.
N.T. Wright는 청년의 행동은 천국 진입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이며, 최종 구원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알미니우스파의 신학자인 John Wesley는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떠난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았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보았으니, 그는 이 청년이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것으로 본 것 같다.
현대 신학자들의 입장은 인간이 예수께 나올 수 있었지만, 물질에 대한 집착이 문제였다고 해석하고, 따라서 최종 구원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표현을 근거로 그의 구원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의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예수의 부르심이 구원의 초대였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신학자들은 그가 예수의 부르심을 거부한 점을 들어 구원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들은 부자 청년의 재물에 대한 집착이 구원의 장애물이 되었음을 지적하며, 예수의 가르침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임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부자 청년의 구원 여부에 대한 신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로 해석될 수 있다.
부자 청년의 구원에 대해서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이러한 견해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는 이 성경 구절을 관심 있게 살폈다. 마태와 누가와는 다르게 마가만이 예수께서 그렇게 그에게 관심을 가지신 점을 놓치지 않았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나는 그가 훗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른 자라고 본다. 분명히 그는 이미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예수를 만나러 나올 수 있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모세의 율법만 따르는 유대인인 그가 예수께 자원하여 나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를 보고 “사랑하셨다”는 그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만약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를 예수께서 보셨다면, “사랑하셨다”는 표현보다는 “그를 보고 민망하게 여기사”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구원받을 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 전 영원에서 선택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가 선을 행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가 선을 행했으므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결정하심에 따라 장차 죄를 범한 자 중에서 구원할 자를 누구의 간섭 받음이 없이 스스로 선택하셨다. 이를 ‘예정’하심이라 한다.
이렇게 선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이 중생하는 은혜를 입히신다.
죄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은 말씀을 들어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말씀을 사모함도, 예수께로 나아오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자들 중에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결국 예수를 떠났다. 말씀을 들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택하심을 입지 못하면 죄인인 자는 여전히 영적 죽음 상태에 머문다. 선택되지 않은 자는 영적으로 죽어 있기에 그들에게는 말씀이 아무런 능력을 일으키지 못한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성령의 중생하시는 은혜에 따라 영적으로 죽어 있던 영혼이 다시 사는 재창조의 은혜를 입는다. 그래서 영적으로 산 존재가 되기에 말씀의 갈급함이 생기고,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는다. 이렇게 말씀으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 ‘성화’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아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고 물은 것은 바로 이 성령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그 은혜가 임하였음에 대한 증거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가능하지 못할 일이었다.
“예수께서 그를 보고 사랑하사”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이 말에는 원전에서는 ‘ἐρώτησεν’(erōtēsen, 질문하다)와 ‘ἀγαπᾷ’(agapā, 사랑하다)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이 표현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영적 은혜와 구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사랑을 나타낸 것일 것이다. 개혁주의 해석에서는 이 사랑은 선택된 자에게만 내리는 은혜적 관심과 기회로 이해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다면, 누구라도 스스로 예수께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질문하기 위해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 하에 놓인 자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만약 예수께서 택하지 않은 자를 만났다면, 인간적 반응으로 “민망하게 여기시다” 또는 “책망하셨다”라는 이러한 표현들이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하셨다(ἀγαπᾷ)”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대하시며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래서 ”사랑하사“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구원 가능성을 전제로 한 긍정적인 반응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에게 회개와 순종을 촉구할 수 있는 은혜적 상황을 제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께서 영생의 길을 구한 부자 청년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라고 말씀하셨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신 이 말씀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주님의 이 이면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에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었던 그였기에 그는 주님의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도 평소에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이 없다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은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 모습이 부유한 믿음일 수 있겠는가?
부자 청년이 예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이라고 칭했다. 누가도 선한 선생이라고 기록했지만, 마태는 그냥 선생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이 ”선하다“라는 이 말을 자기의 생각 속에 떠올렸을 때는 자기도 율법을 잘 지키는 믿음 생활해 온 그것으로 이미 자기도 선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말이란 늘 생각하는 가운데서 생겨난다.
자기가 선한지 아니 한지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내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인데, ”어떻게 하여야 선한 자리에 서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면 그 청년은 결코 마지막에 근심하며 가는 그 일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사도바울은 회심하기 전에는 스스로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회심한 후에는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고 고백했다. 사도바울은 결단코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해 의로워지려는 그런 욕망을 품지 않았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런데 이 청년은 스스로 선한 자라고 생각했거나 선해지려는 욕심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 정도의 믿음이라면 예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하고 물은 그 의도는 자신의 믿음이 의롭다고 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어 과시하려는 의도가 크게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라면 ”신앙의 관성“에 의해서 그러한 잘못된 믿음의 상태에 놓이기 쉽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칫 이 신앙의 관성에 따라 잘못된 믿음의 상태에 놓이기 쉽다.
그래서 늘 깨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노력은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의무이다. 이 노력은 구원을 얻는 일에서 결코 공로가 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도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공짜를 바라는 일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다.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마지막에 이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
만약 그 청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선택되지 않았더다면 이런 염려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왠 이상한 놈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고 무시하며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다.
그 청년은 부자였고, 관원이었다. 이 표현은 그 청년이 그 사회에서 유력한 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자기가 그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로 사는 것은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재력에서 나온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런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하고 계시니 그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이는 아직 완전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믿음의 백성의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냄이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의 우리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라면 주님의 그 지시대로 내가 가진 재물을 모두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이 갈림길 위에서 고뇌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믿음의 백성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부자 청년을 전혀 나무라시지 않으셨다. 단지 그 재물이 구원에 이르는 일에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주실 뿐이었다.
재물과 구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당신의 백성들을 대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그 심정을 마가는 담담히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는 그 말로 드러내어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깨닫지 못하는 그 청년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셨다.
(막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막 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막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막 10: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재물과 같은 것들로 인한 세상의 유혹에 갈등하고 있는 지금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그러하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런 우리일지라도 미워하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리신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는 결국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 말씀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이다. 이 말씀으로 보자면, 그 부자 청년도 우리와 같이 분명히 구원에 이른 자가 되었을 것이다.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정리하면 부자 청년이 예수를 향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심 덕분이었다.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라는 이 표현은 그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며, 구원받을 수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가 결국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렀는지는 성경이 명시하지 않지만, 택하심과 사랑의 표현 자체가 구원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서는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께서 부자 청년을 보고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구원의 초청과 진리의 제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나도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한 표현은 예수께서 이 청년의 영혼을 진심으로 아끼시고, 그가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시려는 깊은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진정한 관심과 구원의 초청을 포함한다.
부자 청년을 향한 주님의 이 마음은 곧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그 마음이 어떠하시다는 것을 대신 표현함이 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진리를 전하시며, 그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러한 진리의 제시는 예수 사랑의 표현이며, 그를 향한 구원에로의 초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께서 부자 청년을 보고 사랑하셨다는 이 표현은 그를 향한 진정한 관심과 구원의 초청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의 사랑이 단순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 은혜가 지금 우리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차고 넘치기를 축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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