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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소고(小考)

by 영동장로교회 2025. 10. 5.

2025. 10. 5.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소고(小考)”

 

삼위일체의 교리, 그것은 머리만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기독교의 정수(精髓)가 되는 핵심 교리이다. 이는 오직 성령의 주시는 은혜에 따라 가슴으로 깊이 공감함을 통해 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식이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삼위일체에 대한 깨달음에 다가가면 갈수록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은혜를 보다 더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깊이와 풍성함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성부 하나님은 신적 기원의 원천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을 그 속성으로 하신 분이시기에 창조의 뜻을 품으실 수밖에 없으셨다.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그 뜻을 역사 속에 드러내신 구속의 주체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자 하나님을 통해 실현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성자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성부의 뜻이 인격화된 존재, 즉 ’로고스(Logos)‘로 드러남이니, 우리 성경은 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표현함이다. 성부 하나님의 뜻이 성자 하나님에 의해 드러났으니, 그래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성령 하나님은 그 구속의 은혜를 우리 마음속에 실제로 적용하시는 임재의 영으로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분이시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하게 도우신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이 셋은 본질상 하나이시며, 그 사역하심에서 구별되신다. 이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내밀한 존재 양식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적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만남이다.

 

삼위일체를 깨달아 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더 깊이 알아 간다는 뜻이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 성자 하나님의 순종, 성령 하나님의 교통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실체를 배운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그 신비를 체험하는 자만이 은혜의 세계를 참되게 맛볼 수 있고, 믿음은 점점 더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으로 자라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스스로 삼위의 인격으로 존재하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으로서의 존재 양식인 이 삼위일체는 교리의 끝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이며, 우리의 모든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영원한 신비이다.

 

우리를 구원하려 하시는 그 한 목적을 위해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때의 그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진리를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다면 하나님의 그 사랑과 구속의 심정을 이해시키시기 위해 굳이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지 않아도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머리로만 깨달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서 자식을 보게 하셨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스라 표현한다. 그러나 남녀가 참된 부부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그들은 에로스로서의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아니한다. 그들의 사랑은 아가페로서의 사랑 그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그 사랑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조건 없는 희생의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가 아닌가!

 

그러한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 가운데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하나님 사랑의 모형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되심의 진리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녀로 만드신 이유, 결혼을 허락하신 이유, 자녀를 통해 사랑을 배우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시려 함이었다.

 

구속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는 그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사죄를 요청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그 마음은, 반역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아들이지만 죽임을 당할 때, “내 아들 압살롬아!”하며 통곡하며 외친 다윗의 그 심정만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다윗이 압살롬의 아비가 되는 그 자리에 설 수 없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그 경지에 어떻게 이를 수 있었겠는가!

(삼하 18: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땅의 참된 부모 된 자들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그 일에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 그냥 다 할 뿐이다. 이 단계에 이른 자만이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가슴으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부모들은, 자신들이 낳은 그 자녀들이 이 땅에서 끝까지 잘 성장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모든 정성을 쏟는다. 이는 사랑으로 돌봄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의 이 사랑을 따라올 또 다른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성령 하나님의 내적 조명과 견인(堅忍)

성자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고, 그 사역의 종료로 승천하셨다. 그러하니 이제, 죄에서 건짐을 받은 그 영혼들을 부모가 자녀들을 돌보듯이 그렇게 천국에 이를 때까지 돌보며 인도할 그 일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눅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신적 기원의 원천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원에서 성부의 영과 성자의 영을 보내심으로써 이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셨다. 이렇게 보내심을 입은 영을 성령 하나님이라 칭한다. 성령 하나님은 단순한 돌봄을 넘어,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하나님의 사랑을 내적으로 조명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견인(堅忍)하시는 이 사역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되었다.

우리의 가정 경험을 통해 배운 아가페적 사랑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인치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천국: 온전한 사랑의 완성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이 당신의 삼위일체 되심의 그 진리를 이해시키고, 드디어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 경지에 이르게 하시려고, 이 땅에서 우리를 남녀의 자리에 각각 서게 하시고 결혼을 통해 자녀를 보게 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 이 진리를 깨달아야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날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때는 우리가 더 이상 남녀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부부라는 그 관계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자녀와의 관계도 이 세상에서의 그 단계를 초월하여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간다. 온전한 사랑을 깨닫고 그 단계로 나아간 상태이니 이 세상에서 필요했던 결혼이라는 방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따름이다.

(막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 12: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래서 천국에서는 굳이 남녀라고 구분을 지을 필요도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진실하고 진정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맺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웃하는 모두와는 더 함도 덜 함도 없는 동등한 참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오롯이 가슴으로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그리하신 그 일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셔서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오롯이 느껴 깨달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참사랑의 행위이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그 심정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

 

그것을 느끼고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남녀로 만드셨고, 자녀를 낳게 하셨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그 방법 외에 또 다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이용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남녀로 지으신 것이 하나님의 그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가장 최선의 오직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에서의 순종: 사랑과 구속의 모형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가 성부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사명, 십자가 위에서의 그 고통을 감수하며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라는 그 명령을 받들 수 있었을까?

또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때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그 일이 효력이 있었을까?

 

이 사건의 모형은 구약에서 잘 드러난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그 사건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그가 그 아들 이삭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제사에 효험이 있었을까? 그리고 또 그 아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가 스스로 단 위에 올라섬으로써만 가능했던 그 참된 제물이 될 수 있었을까?

 

이삭은 그 아비 아브라함을 너무나도 사랑하였기에 그 순간의 아브라함이 하여야 할 그 일을 그가 자원하여 기꺼이 이루어 주려고 자신이 스스로 단 위로 걸어 올라간 것이다.

이것이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에 성부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제물이 되시려고 오신 그 일의 모형이었다. 이것이 참사랑, 아가페였다.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우리의 구속을 위한 제물이 되게 하시려고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그 깊은 심정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던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 가운데 유일하게 가슴으로 온전히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땅의 참된 아비 된 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것이요, 이 땅의 참된 자녀 된 자들은 성자 하나님의 그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진리의 깨달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남녀로 각각 만드신 연후에 결혼을 통해 자녀를 낳게 하심으로, 그리고 동시에 자녀가 되게 하심으로 깨닫게 하셨다.

 

그러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제도를 주신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물이었고, 우리가 온전한 행복과 사랑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최대 행복 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전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 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전 4: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고, 성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그 구속 사역의 효력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희생과 순종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참된 사랑 또한 이와 같은 아가페의 모습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녀로 창조하시고, 결혼의 제도와 자녀를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시려는 최선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 그 심정, 그리고 성령을 보내어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그 은혜를 우리는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녀로 지으신 것이 그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가장 최선의, 오직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이제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희생과 순종 속에서 나타나며, 그 깨달음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삶 속에서 경험하는 참된 아가페의 모습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가슴으로 느끼며,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배우고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참된 삶의 길임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매 순간 경험하며 깨달아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은혜를 가슴으로 느끼며,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배우고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참된 삶의 그 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우리에게 베푸신 넘치는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