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3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2부)“
-부자 청년의 구원 여부를 중심으로(1) -
마가는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는냐“고 예수께 질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이 부자 청년이 어떤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까?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부자 청년의 이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첫째로는 경건한 질문과 진정한 갈망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부자 청년의 질문이 진심 어린 영생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신학자들도 일부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음을 자신 있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내면, 특히 마음의 소유 문제(재물 사랑)를 꿰뚫어 보셨다.
David Garland NIV Application Commentary on Mark에서는 말하기를 “청년의 질문이 진실했고, 예수님은 그 마음을 “사랑으로 바라보셨다(“Jesus … loved him”)”고 해석했다.
(주: David E. Garland가 쓴 마가복음 주석서로서, 그는 미국의 신약학자이며 Baylor University의 George W. Truett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학장을 지냈다. 신약학, 특히 복음서와 바울 서신 해석에 강점이 있는 학자다.)
“마가는 이 사건의 기록을 통해 누구라도 외적 순종만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다. 행함으로는 누구라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라고 했다.
과연 영생은 사람의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영생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선을 행함과 그 공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해 주시는 은혜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두 번째는 율법적 자랑과 외적 순종의 한계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따르는 신학자들은 이 청년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그는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진정한 경건과 신앙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고 본다.
국내의 어느 한 중견 목사는 이 청년이 계명을 의무감으로 지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킨 것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소유하는 ‘맘몬’을 더 사랑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참고: ‘맘몬’은 아람어 mamōn을 말하는데, ‘재물’, 또는 ‘소유’를 뜻하며, 성경적 의미로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우상화된 재물을 의미하며, 신학적 의미로는 사람을 지배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물질주의적 힘을 말한다. 그래서 맘몬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돈이 신처럼 군림할 때의 우상적 개념이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사랑과 도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가 있다.
Walter Chantry 목사는 이 질문이 신중하지만, 아직은 교리적 이해에 머물러 있는 단계로 보았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지적하였으며, 그것은 재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제자도’의 요구였다고 말한다.
(주: Walter Chantry 목사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으로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신학자는 아닐지라도,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에서 복음과 교회, 영적 확신과 성경적 신앙생활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이 청년의 질문을 율법적 답을 구하는 것으로 보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복음의 본질적인 요구인 헌신적 제자도를 위한 도전이었음을 강조했다.
네 번째로는 가톨릭 등의 신학 전통의 해석을 따르는 견해가 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이 사건을 “온전함에 이르기 위한 초대”로 보았다.
예를 들어, Justus Knecht는 이 청년의 열망을 “완전함(perfection)을 향한 고귀한 욕망”으로 해석하며, 청년이 그 제안 앞에서 “세상에 너무 얽매여 있어” 떠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부자 청년의 질문에는 진실한 갈망이 포함된 동시에, 자신의 행위(계명 준수)에 대한 자랑 또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었다고 보는 것이 신학적으로 균형 잡힌 분석일 것이란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속 냉담함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제자도의 요구 즉, “예수를 위하여 재산을 버리고 따르라”라는 초대를 통해 참된 헌신을 요구하셨다.
이 사건은 단순히 “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포기하겠는가”라는 믿음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나는 부자 청년의 이 행동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 부자 청년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단히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착실하게 준수해 왔으니 그 누구보다도 신실한 신자로 보였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자기는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진실로 그 길을 알고 싶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십계명을 철저히 잘 지킨 그것을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청년은 유대교 안에서 자기가 그런 믿음의 사람이라는 그 자체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그 질문 속에 담긴 이면적 의도는 “내가 이렇게 모세가 말한 율법을 잘 지켜왔는데,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내 믿음의 생활방식 외에 또 달리 영생을 얻는 길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아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질문했을 것으로 나는 본다.
그러면 그 사실을 주님께서 모르셨을까?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니 모르실 것이 아무것도 없으시며, 사람의 그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아신다. 그러므로 그 청년이 그런 의도로 질문한 것도 이미 아셨을 것이다.
(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요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 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요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우리라면 그 순간에 질책하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너의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알게 해 주마” 하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응하신 모습은 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마가는 예수의 그 모습을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자기가 의롭다고 주장하며 구원을 당당히 요구하는 그 모습을 우리라면 사랑할 수 있을까! 얄밉고 괘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가가 예수께서 대응하신 그 모습을 그렇게 기록한 것은 죄인으로서 구원 얻을 자로 선택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심정이 어떠하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 함이었을 것이다. 죄인 된 우리가 무어 그리 예뻐 보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죄인인 우리일지라도, 구원을 베푸시려고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리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하시니, 그런 은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도 항상 그 부자 청년처럼 ”내가 의롭다“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때로는 ”지은 죄도 없는데, 어찌해서 자꾸 죄인이라고 말하는가“하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드러내지도 않았던가!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질책하시기보다는 조용한 권면을 하시면서 바른길로 인도하셨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그 처사를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심이었다.
이 부자 청년은 분명히 잘못된 믿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계명을 충실히 따르며 지키는 삶을 살았다. 이는 일종의 ”믿음의 관성“이다. 부모가 그런 믿음의 생활을 했으니 자신도 그 모습을 당연시하며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은 없이 그냥 따라 했을 것이니, 그것은 ”믿음의 관성“이었다. 그것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였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셨을 때는 이 계명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드러난 그대로만 따라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모세가 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 그때의 이스라엘은 신앙에서는 왕초보 단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성품의 어떠하심과 그 성품에 따른 하나님의 행하실 바, 그 원리를 설명했더라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우리도 가르칠 때 그 상대의 수준에 맞는 교육 방법을 선택한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어떤 원리를 가르쳐 준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다.
그래서 광야 생활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최소한으로 정해서 가르친 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그 삶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사 온전히 깨닫도록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그 은혜 안에 거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그 순간에 그의 생명을 곧바로 거두어 가지 않으신 것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려 하심 때문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범한 그 순간에 그의 생명을 바로 거두셨다면 아담은 절대적으로 그의 죄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담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셨을까?
만약 아담이 지옥에 떨어졌다면 그는 불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고 만다. 왜냐하면 그의 창조물 중에서 최고 걸작인 인간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창조의 불완전성을 드러냄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심을 그 속성으로 가지시는 존재이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런 불완전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 하나님은 불완전하신 고로, 참된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신 자이시므로 그의 창조작업에는 결코 흠결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는 불완전할 수가 없다.
완전한 창조이므로 사람에게는 결국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끝내는 이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이루시려고 아담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취하여 먹는 그 순간에 그곳에 함께 하지 않으시고 자리를 피하셨다.
하박국 선지자가 말씀하시되 하나님은 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그러니, 아담이 범죄 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기자가 그 현장을 기록할 때, 하나님의 모습은 그곳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시는 모습이 기록되고 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이 죄를 범하고 훗날에 완전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달은 연후에는 다시 그와 더불어 교제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일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
그 예정을 입은 아담은 그래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행위언약에 따른 그 죽임의 집행에 즉시 놓이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여 성화의 과정을 걷게 하셨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아담은 그 후에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를 이루고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에 따라 그 땅에서 성화를 이루어 갔다. 이는 그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이 제사 지내는 삶을 산 것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이루시기를 원하셨기에 광야에서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성화 되는 삶을 살게 하셨다. 그러니 이 십계명을 준수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깨닫는 일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안이 어두워 보지 못했으니 외형적인 그 모습만을 단지 흉내 내는데 그치는 믿음의 생활을 한 것이다. 우리라고 다를 리가 있겠는가!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가 보면 어느새 우리도 믿음의 관성대로 살아가게 된다.
이 믿음의 관성은 깨어있는 믿음의 눈이 없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 부자 청년이 그랬다. 그러나 그가 비록 믿음의 관성대로 신앙생활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청년을 사랑하셨으니 그를 부르신 것이다. 이는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은혜에로의 초대인 그 ‘부르심’이었다.
그랬으니 주님께서 그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음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섰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욕심이 아직도 그를 사로잡고 있었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의 재물이 많았기에 그는 그 재물을 선뜻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근심을 안고 돌아간 것이었다.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인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를 건드려주신 그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단지 자기의 신앙의 관성에 따라 지켜온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그의 답변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깨달음이 없는 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막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청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를 자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히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 하에 거하게 하셨다. 비록 우리가 그 부자 청년처럼 어리석어서 바른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하고 옆길로 빠질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그 은혜가 주어진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에 따라 바른 믿음의 길로 돌아와 걷게 하시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천국에서의 그 삶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삶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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