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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1부)

by 영동장로교회 2025. 8. 24.

2025. 8. 2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마가복음 10:29-30 말씀의 의미에 관하여(1부)“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했다.

”마가복음 10:29-30이 기복신앙을 옹호하는가요?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젊은 관원을 보시고 재물을 다 버리고 나를 쫒으라고 하나 관원은 근심을 띠고 돌아갔다는 말씀이 나오고 그 다음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사람이나 국가나 시대나 부유할수록 믿기가 어려워진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하나님의 역사로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이 27절에 나옵니다.

 

정작 문제는 10:29-30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형제, 자매,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영어성경, ...now in this time) 백배나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는 되어있지만, 언뜻 믿음을 위해 인간관계나 재물을 버린 자는 반드시 이 현세에서도 관계나 재물을 백배 (혹은 여러 배)를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이해되어집니다.

 

그럼 앞 절들에 언급된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예수님을 쫒을 수 있고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신 말씀과 뉘앙스가 달라집니다. 많은 설교에서 이 구절을 잘 믿으면 현세에서 재물을 백배나 받는다는 기복신앙을 옹호하는 구절로 사용됩니다. 호크마 주석서를 보았으나 명확하게 설명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균형 잡힌 해석을 부탁합니다.“

 

이 질문을 던진 자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성경 구절을 접한 그 한순간의 호기심에 이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성경 구절을 해석해 놓은 주석책까지 찾아가며 보았을까!

 

이렇게 말씀의 의미를 참되게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나무란 것을 깊이 상고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는 말씀을 사모하여 그 뜻을 깨달아 알고자 하는 의욕이 처음부터 없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선택된 자로서 구원에 이를 자들은 이처럼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을 찾아 알고자 하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과연 선택된 자들이라면 구원과 말씀에 대해 깊이 사모하는 삶을 산다는 이 말이 참일까?

 

신앙의 본질을 묻는다면 많은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려는 구체적인 갈망 속에서 진실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이 갈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바로 말씀에 대해 사모함에서다. 성경은 선택된 자들이 말씀을 갈급해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산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말씀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자 구원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참된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한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편의 기록에서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사랑이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임을 보여준다.(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선택된 자는 의, 곧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갈급해 한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붙들어 사는 것이 특징이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에 앞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비롯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정은 인간의 자율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은 추상적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 성도의 삶 속에 표징을 드러난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를 증언한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 새 마음은 말씀을 향한 갈망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삶은 예정받은 자의 내적 증거이다. 시편 119편 기자가 주의 율법을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시적 미사가 아니라, 새 마음을 받은 성도의 본질적 태도를 드러내어 보여줌이다.

 

죄로 인해 상한 영혼은 연약하여 때때로 말씀을 붙잡고 사는 이 일에서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끝까지 붙드신다.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 칭한다. 그래서 말씀을 붙잡고 사는 이 일에서 일시적으로 떨어져 나간 자를 다시 바른길에 들어서게 하신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했는데, 이 말씀에서 택함받은 자가 견인 받음과 왜 말씀에서 떠날 수 없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하시되 말씀을 통해 그들을 붙드신다.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행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선택된 자는 견인의 과정에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게 됨은 당연하다. 말씀 묵상은 의무적 행위라기보다,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영적 본능과 같은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찾듯이, 성도는 말씀을 찾게 된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성화는 성도의 삶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훈련과정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 따라서 성화는 본질적으로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도가 말씀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그 뜻을 찾는 것은 성화의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필연적 방향성에 대한 표지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바로 성도의 모습이다. 의에 갈급함은 곧 말씀에 대한 갈급함으로 구현화(具現化)된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지막으로 성도의 삶은 영화(榮化), 곧 최종적 구원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 속에서 말씀은 끊임없는 위로와 인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말씀은 고난 중에도 성도를 살리고, 결국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인도한다.

(시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영화의 단계에서는 더 이상 믿음이 아닌, 눈으로 보는 영광이 이루어지겠지만, 이 땅에서 말씀을 갈급해하며 묵상한 삶은 영화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체험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는 삶은 단순한 경건의 습관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향한 여정의 필연적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이 말씀에 갈급해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또한 조직신학적으로 타당한 진술이며 참이다. 예정은 말씀 사랑의 뿌리가 되고, 성도의 견인은 말씀 묵상을 가능하게 하며, 성화는 말씀을 통해 진전되고, 영화는 말씀 사랑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갈급함은 단순한 신앙적 선택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열매이자 구원의 확증이라 할 것이다. 선택된 성도는 본질적으로 말씀을 떠나 살 수 없으며, 주야로 묵상하고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삶을 통해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때로는 말씀 사모함이 희미해질 수 있으나, 성령께서 반드시 다시 말씀으로 이끄신다.

 

선택된 자의 말씀에 대한 사모 열정은 은혜의 열매이자 구원의 확정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열정에 따라 이 질문자는 호크마 주석을 뒤져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찾아보았다고 했다. 과연 호크마 주석에서는 무어라고 했을까?

 

이 구절에 대한 호크마 주석의 내용은 이렇다.

“성 경: [막10:29]

󰃨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 3복음서에 모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결국 예수.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 것에 대해서도 누가는 “아내”를 첨가하고 “전토”를 생략하나 뜻에는 차이가 없다. 마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를 삽입시킨다.

 

성 경: [막10:30]

󰃨 금세에 있어...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 본서의 특색은 “핍박을 겸하여 받고”에 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 없이 받은 축복은 마귀의 선물인 것이다(욥42:12-16).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라고 보장하신다.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치 못하면 주의 깊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로 질문자의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형제, 자매,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영어성경, ...now in this time) 백배나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는 되어있지만 언뜻 믿음을 위해 인간관계나 재물을 버린 자는 반드시 이 현세에서도 관계나 재물을 백배 (혹은 여러 배)를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이해되어집니다.

 

그럼 앞 절들에 언급된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예수님을 쫒을 수 있고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신 말씀과 뉘앙스가 달라집니다. 많은 설교에서 이 구절을 잘 믿으면 현세에서 재물을 백배나 받는다는 기복신앙을 옹호하는 구절로 사용됩니다.”라는 말처럼 호크마 주석서의 설명을 살펴보면 자세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아 보인다.

 

먼저 질문자가 살핀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막 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는 이 글만 살피면, 분명히 질문자가 말한 대로 이 구절만 잘 믿으면 현세에서 재물을 백배나 받는 기복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 금세에서 백배나 되는 재물의 복을 돌려받는다”고 했으니 분명히 기복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설교에서 이 구절을 잘 믿으면 현세에서 재물을 백배나 받는다는 기복신앙을 옹호하는 구절로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간혹 목회자 중에는 이 구절을 이용해서 교회를 위해 재산을 모두 헌금하라고 강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교회를 위해 모두 바치면 후에 바친 그것의 백배나 되는 물질의 복을 다시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이야기가 시작된 배경을 먼저 살피면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예수께 나아오는 것으로 이 사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청년이 예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라고 질문한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으로 이 사건의 기록을 시작한 것은 이 사건이 세상적인 관심사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일이다. 이 사건은 육에 속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적으로 영에 속한 이야기라는 것인데, 이 사실은 29절과 30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암시하고 있음이다.

 

(내용이 길어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