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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 관하여(1부)

by 영동장로교회 2025. 8. 10.

2025. 8. 1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 관하여(1부)”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이며, 과연 누구일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항상 상대적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리 드러난다. 내가 빠르게 이동하면 상대도 빠르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상대는 실제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을 뿐인데, 그를 내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느끼는 것이다.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는 전적으로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관점에서 사물을 이해함에서 오는 결과일 뿐인데, 나는 여전히 그가 정말로 빠르게 움직인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순에 대해서는 내가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해 아래에서 보는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 상대적인 현상을 감각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자주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이를 거부하거나 때로는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이처럼 관점의 차이는 단순한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죄성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시야 왜곡은 피조물의 한계와 죄의 영향이 결합된 비극이다.

 

결국, 이 상대적인 시각의 한계는 단순히 물리적·인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시야를 왜곡시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은 ‘죄성’에 있다. 우리가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 유한한 제한된 피조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죄의 영향 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유한한 존재이다.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유한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상대적인 이 틀에 갇히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고의 주체는 ‘나’이기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나’ 중심적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보통의 경우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문제를 인식할 수 없기에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적인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일도 드물다. 물리학의 상대성은 관점 차이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 영혼의 상대성은 죄성에 의해 왜곡된 결과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은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판단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상태를 가리키는 신학적 선언이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르렀나니"라고 하여, 아담으로 인해 죄가 인류 전체에 전가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전가의 근거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죄의 근원, 즉 ‘욕심’에 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욕심은 단순한 욕망이나 필요를 넘어선, 근원적인 자기중심적 욕구이다. 야고보는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라고 그의 글에 기록하여, 욕심이 죄를 낳는 내적 동력임을 밝힌다. 이 욕심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은 이 욕심의 영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따라서 죄인 된 자는 욕심의 지배를 받는다. 욕심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태어난 결과물로서, 자신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결국 ‘이기심’이라는 구체적 행동 양식으로 표출된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즉, 욕심이라는 근원에서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결과가 바로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타인의 이익을 무시하거나 침해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이며, 이는 성경이 경계하는 죄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인간의 죄성과 욕심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욕심의 존재는 인간이 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며, 동시에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근거가 된다. 구원은 바로 이 욕심과 이기심의 사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이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롬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기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한 상대적인 현상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욕심이 산출한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어둠의 굴레를 씌운 이 죄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써 해결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만약 이 문제를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애초부터 이 죄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인간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이 죄를 정한 것이 인간 편에서 행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편에서 행하신 일이기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열쇠는 하나님만이 쥐고 계신다.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따라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심하심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결심하심은 인간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었던 일이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하나님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존재가 되실 것이다. 상대적이어서 절대적이지 못하다면 그 하나님을 결코 절대자라 칭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결심은 인간의 의지에 결코 종속되지 아니한다. 오직 자기의 뜻에 따라 누구의 간섭도 없이 그것을 행하실 뿐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그러하시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감당하여야 할 바는 무엇일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기원을 밝히는 선언이자, 그 존재 목적과 방향을 규정하는 진리이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기록하며, 인간이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창조된 존재임을 밝힌다.

 

피조물이라는 말은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넘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절대적 주권 관계를 내포한다. 시편 24편 1절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는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선포한다. 이는 우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창조물인 인간 또한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종속된다. 여기서 종속이란 억압이나 강제로 끌려가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이다. 마치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이 스스로의 용도를 결정할 수 없듯, 인간의 삶과 목적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올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다.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고 판단되어야 함을 뜻한다.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기준은 자기 욕망이나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는 일상의 가장 사소한 행동조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렇다면 인간의 처지에서는 마땅히 모든 행할 바에 대하여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본분이며 생명과 존재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다.

 

잠언 3장 5–6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고 약속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지혜와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삶의 모든 방향과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합당한 삶의 방식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며, 동시에 인간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그 욕심에 따라 죄라는 허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므로 그의 행하는 바는 항상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욕심에 따른 그 일의 선택을 우선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벗어난 형태를 결과하게 된다.

 

참된 관계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이 모습을 ‘죄’라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자를 그래서 ‘죄인’이라고 한다. 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결코 바른 관계에로의 회귀를 이룰 수 없다. 이미 전신을 덮고 있는 죄가 항상 하나님과는 바르지 못한 관계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죄라는 모순을 걷어낼 수 있는 능력자는 사람 자신이 아니라 바로 죄를 정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편에서 이 죄를 제거해주셔야만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설 수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으로 돌이켜 들어갈 수 있도록 초청받은 자를 “선택된 자”라 한다. 반면에 초청받지 아니한 자를 “유기된 자‘라 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행하신 결정이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에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러하시기에 그는 선택도 하시고, 유기도 하실 수가 있으시다.

 

선택과 유기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의 결정이므로 이 결정에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 한 일이 결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기할 자를 정하신 것도, 그가 죄의 허물을 뒤집어쓴 후에 또다시 죄를 추가로 범했기 때문에 그리하신 것도 아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아담 안에서 이미 모든 인류가 죄인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고 그냥 그대로 그가 죄를 뒤집어쓴 그 상태대로 내어버려 두심일 뿐이다. 그래서 유기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구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삶의 패턴을 보인다. 이는 유기된 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