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아담의 유혹에서의 사탄과 욥의 유혹에서의 사탄의 비교분석에 관하여(1)”
성경에서 사탄이 시험하는 장면이 몇군데 등장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주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사탄으로부터 유혹받으신 사건이 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이전에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이 사건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 되신 메시야에 대한 시험이기에 오직 인간에 대해 시험한 그것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오직 인간을 대상으로 사탄이 유혹했던 두 사건, 즉 아담에게 다가와 한 시험과 욥에게 한 시험, 그 두 사건만을 살펴볼 것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사탄이 시험한 대표적인 두 사건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탄의 하와에 대한 유혹의 그 사건과 욥기에 등장하는 사탄의 욥에 대한 시험의 그 사건이다.
우리가 이 두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사건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구원사적인 입장에서의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사탄의 유혹에 대해 직접 대면한 하와와 그 하와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혹을 당한 아담의 신분은 범죄하기 전의 원인(原人)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죄를 전혀 범한 적이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은 아담으로 인한 후손 된 자이기에 죄인 된 신분으로 태어난 자이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그는 참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비록 이스라엘 족속은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으로 훌륭했다.
그럴지라도 그는 분명히 죄인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차이점은 죄를 짓지 아니한 원인과 죄 중에서 태어난 죄인이라는 신분상의 분명한 구별이 있음이다. 이 점을 인식해야 각 사건이 가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 장면을 우리가 유의하여 살피면 그 현장에서 관측되는 대상은 뱀과 하와와 아담이라는 점이다. 그 현장에서는 하나님은 분명히 드러나 계시지 않았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장 7절의 기록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더라면 분명히 물으셨을 것이다. 왜 치마를 입느냐고.
그러면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이었을까?
하나님이 계셨더라면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를 왜 먹느냐!”고 야단치시면서 말리셨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하와가 선악을 아는 그 나무의 열매를 따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담에게도 먹으라고 하지 않
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 땅에 죄가 들어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 순간에 하나님은 무얼하고 계셨던 것일까? 사무가 바쁘셨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하와와 뱀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놓치신 것일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러셨다면 그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되시지 못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하시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고로 하와가 뱀과 가까이하여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것을 미리 내다보고 아셨음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셨던 것일까?
분명히 욥이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그 일에서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 사탄에 의해 욥이 시험당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하셨고, 그 일을 처음부터 다 지켜보신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왜 하와가 뱀으로부터 유혹당하는 그 일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이 전혀 없는 것인가?
아담이 사탄의 유혹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그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간과하심이 작용하고 있음이었다. 간과하심은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알고 있으시지만, 그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지켜보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를 주심이 이 땅의 다른 짐승들과 우리를 구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름이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속성이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심어주심을 의미함이었고, 더불어 우리가 참된 자유인으로서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자율적으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주심이었다. 그러했으니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참으로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장 귀한 형상인 그 사랑을 심어주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만 주셨다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속성인 사랑을 심어주신 상태에서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기에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능히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자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으려고 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것들을 보시고 소감을 피력하실 때 분명히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신 것은, 그 지으신 것들이 사람의 다스림을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유지되는 일, 즉 다스림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도록 하라 하심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이 자연과 그 창조된 모든 것들을 통해 드러나게 하라 하신 것이니, 사람의 이 다스림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일을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이루어 낼 수 있도록 능력을 허락하셨다.
그리하심이 우리의 형상과 모양, 즉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람 속에 허락하셨으니, 이것이 사람에게는 ‘능력’이 되었다. 사랑의 이 능력이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이 둘의 조화로운 활동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사랑과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시지 않고, 단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아름다운 상태로 유지하는 그 일을 하도록 만드셨다면, 아마도 자연은 그런대로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쁘게 받으실만한 그 모습이 될 수 있었을까?
공장에서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찍어낸 조화를 선물로 받을 때를 상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이 온갖 정성을 들여 가꾼 생화를 선물로 받을 때의 그 기쁨과는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만일 조화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같은 생화를 선물로 받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들판에서 저절로 자란 꽃 한 송이 그 자체로도 좋은 선물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오직 선물을 줄 그 한 사람만 생각하고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가꾼 그 결실로 얻은 그 한 송이의 꽃을 선물로 받는다고 상상해보라.
이 세상에서 그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꽃 한 송이를 우리에게서 선물로 받고 싶으신 것이다. 그런 정성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 된다. 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심과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심이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능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그런 능력자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 능력은 본능처럼 그렇게 저절로 발휘되지는 않았다. 만약 그 능력이 저절로 아무런 노력이 없이 발휘되게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선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재능이 탁월한 자와 평범하게 타고난 자가 모두 똑같이 어떤 탁월한 결과를 이루어냈다면, 우리는 누구를 더 칭찬하는가?
컴퓨터의 정보저장능력은 탁월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칭찬하지 않는다. 반면에 늦은 밤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치른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온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의지를 행사할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했으므로 아담과 하와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훈련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나갔어야만 했다.
선악을 아는 그 나무를 에덴동산 한가운데 두신 것이 바로 이 일을 위함이었다. 동산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삶 중심에 있음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은 그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런 공간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삶을 통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행할 일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일이었다.
매일같이 대면하는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지 않고 지켜내는 그 일은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그 일이었다. 그것이 순종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일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없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를 통해 진실하고 참된 순종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삶을 이루어내어야 할 책임하에 있었던 존재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왜 주셨겠는가!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기어이 지켜낸다면 그 일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하나님 앞에 순종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고 했다.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 된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아담과 하와는 그 선악과를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신앙에서의 절제이다.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무언가를 자신의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재량이 주어짐이다. 그 재량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의지의 자율’이다.
여기에 대해서 칸트는 인간의 자유란 단순히 외적인 제약이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유라는 것을 자기 자신의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즉, 인간은 외적인 조건이나 충동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에 따라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이를 따르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본 것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자유는 도덕적 행위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되었다. 그는 자유를 단순히 욕망이나 충동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이성적인 도덕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 것이다. 이러한 자율성은 인간이 도덕적 의무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근거가 되며, 자유는 도덕법칙에 대한 자발적인 준수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칸트에게 자유는 외적 제약을 넘어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도덕적 법칙을 따를 수 있는 능력, 즉 ‘의지의 자율’이라고 그의 저서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렇게 언급했다.
칸트의 이 생각은 아담이 생각했어야만 하는 그 자유에 대한 정확한 정의였다. 그랬더라면 아담은 능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자유의지의 사용에 있어서 절제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이 절제의 미덕을 발휘함을 통해 기쁘심을 얻으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절제(節制)란, 감정이나 욕망, 행동 등을 지나치지 않게 조절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불필요한 과욕을 피하고, 균형을 이루며,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자아를 통제하는 미덕인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절제는 단순히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 선 하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며, 더 나아가 하와가 그녀와 함께 이룬 그 공동체와의 조화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반영한 것이어야만 했다.
이러한 절제는 자기 통제의 미덕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이 자유의지의 사용에 있어서 이 절제의 미덕을 발휘했더라면 그는 능히 그 선악과에 대한 감정이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로써 어린 신앙 상태에서 성숙한 신앙 상태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바라고 기다리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절제의 그 미덕을 발휘했더라면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목적이 그 일을 기대하심이었다.
그런 일을 결과한 그때는 아담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담과 참된 사랑의 교제를 이루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과 함께 생명나무를 두신 것이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고 나서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삶을 살기를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바라셨다. 이 목적은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신 것이니 결코 변개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구원에 이르는 그 날에는 에덴동산에 심겨 있었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날에는 우리가 그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될 것이니,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그 일은 그렇게 해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신 그런 사랑을 나눔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미(美)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담이 이 절제의 미덕을 발휘했더라면 자신의 욕망이 추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지란 자신의 욕망하는 바를 무한대까지 추구해 나가는 그 일을 허용함이 아니다.
스스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금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의 사용이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를 통해 이 이치를 깨달았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심이 그런 의도에서였다.
그러했다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그 이치를 깨닫는 일에 힘을 썼어야만 했다. 자유의지의 무절제한 사용으로 인한 결과는 반드시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런데 그때의 당사자는 하나님이시다.
아담의 자유의지의 무절제한 사용은 결국 하나님께 피해를 입히고 만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그 뜻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하나님께 피해를 입힘이었고, 이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무절제한 사용에 따른 결과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 자유의지를 무절제하게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결과한다는 사실을 이 아담의 경우를 통해 바르게 깨달아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참되고 바른 신앙인이 되려면 자유의지에 대한 절제가 바람직하게 작동되어야만 한다. 이는 우리의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불가하다. 그래서 늘 깨어있는 신앙인의 자세를 유지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타인의 편안함과 행복을 고려해 자기의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적 미덕이 된다. 따라서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신앙의 절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절제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곧 타인에 대한 배려요 존중하는 마음의 표현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다.
그런 면에서 아담은 참으로 미숙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배려가 없었고, 자기에게 주어진 그 자유의지에 대한 절제를 이루지 못하여 하나님을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순간의 아담은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런 결과가 도래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면 아담을 만드실 때 처음부터 신앙적으로 성숙한 자로 만드셨을 텐데 그처럼 신앙적으로 미숙한 상태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르셨던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하시니 아담이 그리할 것을 아셨음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를 신체적으로는 그렇게 성숙한 자로 만드시고, 모든 창조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지식과 지혜를 넉넉히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신앙적인 측면에서만 미숙한 상태로 만드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유의지를 선용해서 점진적으로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을 이루기를 희망하심 때문이었다.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그 목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만약 아기가 자라면서 그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부모가 되어 아이를 낳고 키우려 할 것인가?
부모가 된 자라면 그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를 잘 안다. 내가 아는 조카뻘 되는 사람을 얼마 전에 만났다. 얼굴이 핼쑥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요즘 간난쟁이를 키우느라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 일이 부모가 되어가는 일이라고 했다. 아기를 키우는 그 일을 감당해야 비로소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고 했다. 그만큼 힘든 일이 육아다.
그런데도 그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마다 그 아기를 키우면서 얻는 그 행복감이 있기 때문
이다. 그래서 그 일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그 일을 허락하심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우리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러니 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물이 될 수 있었다.
아무튼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를 통해 이 절제의 미덕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더라면 그의 신앙은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의도하신 바였을 것이다.
그런 신앙의 수준에 이르렀다면 아담은 하나님과 진정하고 참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궁극적으로 원하신 최고의 목표이시다.
아담의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실에 대한 참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게 하시려는 그 의지의 드러남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참된 뜻을 바르게 깨달아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사족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신앙의 중심으로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저것에 곁눈질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그 옛날 주님께서 나무라셨던 그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절제하는 신앙인이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그 자리에 분명히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에 선 자란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과 선과 미의 경지에 이른 자를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선과 미는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 선 신앙인을 어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닫고 또 이 사실, 즉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지극히 아름다운 자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하는 자”가 아름답다고 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그런 일이 곧 하나님의 그 뜻을 알고 그것을 전하는 일인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니, 그런고로 그가 말한 진실로 아름다운 자가 곧 복음의 용사가 된 우리가 아니겠는가!
(사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아담은 결과적으로 이 절제하는 일에서 실패했다. 그런고로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성숙한 신앙인의 그 자리에 설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뜻에 따른 선택이었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 자신이 책임질 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자유의지를 무절제하게 사용함으로써 결국 죄에 이르게 되는 것을 “왜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하는 것이다. 분명히 아담이 죄를 범하는 그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니 계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다. 그러면 그 일이 하나님께서 직무를 감당하지 않으심이 되는 일이 아닐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심으로써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의무 하에 선 자가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담이 감당해야 할 본분이 되었다. 반면에 하나님은 아담이 그것을 어길 시에는 언약에 따른 그 책임을 물으실 자의 자리에 서셨다. 그 일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에 해당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범하는 그것을 막아야 할 직무를 지심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담이 죄를 범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그 일은 하나님의 직무가 되지 아니했다. 그 순간에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유의지를 선용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려는 결행을 해야 할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즉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그 땅을 살아가는 목적이 된다는 것을 아담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경지에 도달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아담이 감당할 몫이었으나 그는 그 몫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다. 아담이 죄를 범하는 그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간과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을 따라 만들자고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그 속성을 닮은 자로서의 아담을 만들기로 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 속성 중에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속성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 속성을 따라 만드신 그 아담을 하나님이 사랑하셨음은 분명하다. 만약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죄를 범하는 것을 간과하셨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랑하시면서 그가 죄를 범하는 것을 간과하신 것은 과연 무슨 의도에서였을까?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그 순간에는 분명히 간섭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욥의 경우는 사탄의 시험에 대해 간섭하셨으면서 왜 아담의 경우는 간섭하지 않으셨을까?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 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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