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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저주에 관하여(2)

by 영동장로교회 2024. 10. 20.

2024. 10. 2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노아의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저주에 관하여(2)”

 

 

하나님께서 날을 구분하실 때 빛이 있는 낮과 어둠이 있는 밤으로 구분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날에 만드신 것들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그 감상을 밝히셨다. 그런데 낮과 밤으로 구분하신 이 일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말씀이 없다.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만약에 밤이 없이 낮만 있었다고 했다면 어쩌면 그렇게 하신 결과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단이 지배하는 것을 상징하는 밤이 함께 있는 그 경우에는 만드신 그것에 대해 좋았더라는 소감을 기록하지 않으셨다. 사단이 함께 하는 그 일이 어찌 기쁘신 일이 되었겠는가!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실제로 빛은 사람의 정신 건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빛을 제거한 공간에 사람을 가두면 결국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 영국은 날씨가 늘 우중충하기에 우울증 환자가 많다고 들었다.

 

빛이 우리의 눈에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뇌에서 우울하게 하는 호르몬이 너무 과도하게 분비되어 우울증을 앓게 된다. 실연을 당한 사람에게 바깥으로 나가 햇빛을 많이 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빛에 그런 기능을 두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심이었을까?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문학적 표현에서는 흔히 빛은 희망을 주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희망이란 무엇일까?

 

죄로 인한 그 절망감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희망 없는 삶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세주 예수를 통한 그 길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완벽히 분리된 그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죄인 된 우리는 하나님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런 우리가 중보자가 되신 주님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되는 자격을 얻었고, 지금 그 자리에 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한 그 암시가 이미 빛 속에 담겨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심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그 일을 하실 것에 대한 암시를 이미 담아놓으심이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으로 낮과 밤을 나누었다는 것은 사단에 속한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보혈로 값을 치르시고 사실 것, 즉 구속에 대한 그 암시였다. 그래서 낮은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그 공간이고, 우리가 그 공간에 머무른다는 것은 주님의 품 안에 거하게 될 그것을 의미함이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래서 노아가 낮에 포도주에 취해 장막에서 잠을 잤다는 것은 주님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음이 되었다.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렇게 구원의 은혜에 취해 잠자고 있는 노아를 그의 아들 함이 부끄럽게 여긴 것은 죄인 된 우리가 얻게 된 그 구원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김이 되는 일이었다. 이는 십자가의 그 도를 부끄럽게 여김이다. 그런고로 함의 그 행동은 스스로 구원에 이르기를 거부한 자와 같은 행동에 해당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나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것은 이 함의 행동과는 전혀 반대되는 그 행동이 되었다. 함의 그 행동은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진심으로 부정하며, 부끄럽게 여김이 되는 일이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특히 그가 그의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보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흉을 본 것은 주님의 그 구원 사역을 흉보는 일이요, 구원하심의 은혜가 대대에 미칠 그 일을 부정함이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애초에 노아의 허리에 있었던 자들이었는데, 그 아비의 하체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났고 구원의 복을 얻게 된 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흉을 보다니...!

 

아브라함의 후손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은 구원하심의 은혜가 믿음의 족속들의 계보를 통해 이어지는 그 큰 복을 받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태어날 수 있었던 그 통로가 되었던 노아의 하체를 함이 부끄럽게 여긴 것은 후손이 구원의 복을 받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고 부끄럽게 여김이 되었다.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후손이 복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그 후손이 구원받기를 거절함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원치 않는 자에게는 그의 원하는 바 대로를 이루어주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사랑의 본체가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영원히 그리하실 바는 못 되신다.

 

그래서 성경은 죄에 대한 책임은 삼사 대까지만 묻겠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에 은혜받을 자에게는 그 복을 자손 천대에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성경 이 구절의 표현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것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음이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보고 흉을 본 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이 후손에게 이어지는 그것을 거부함이었다.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될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 이것만큼 큰 죄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큼은 영원한 죄에 해당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막 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 행위가 그렇게 큰 죄에 해당한다는 그것을 암시하는 일이 바로 노아가 저주를 함에게 직접 내리는 대신에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린 것에서 알 수가 있다.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구원하심의 이 위대한 복에 대한 부정이 얼마나 큰 죄에 해당하는지를 함의 후손들에게 내리신 그 처분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함의 이 행위에 대해 서는 엄한 책임을 분명히 물으셔야만 했다. 그래서 그 책임을 엄하게 물으셨다. 그리하셨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벌이 영원하게는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함의 후손들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비참하고 고된 삶을 살아내었다. 어쩌면 이것은 함에게 최고, 최대의 벌이 되었을 것이다. 함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자기 아들 가나안이 자기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 것이 자기가 직접 벌을 받는 것보다 백배 천배의 고통을 가져다주지 아니했겠는가!

 

상상해보시라. 만약 내가 죄를 지었는데, 그 벌이 내게 내려지지 않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 대신해서 그 벌을 받는다면 어느 누가 그 고통을 참아낼 자신이 있겠는가! 그래서 노아가 가나안에게 내린 그 벌은 함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한 벌이 되었다. 그만큼 구원을 부정하는 벌은 컸다.

 

자기의 죄로 인해 아들이 대신 그 벌을 받은 경우로는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의 예가 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를 범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칼이 네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네가 낳은 자식이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삼하 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삼하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삼하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삼하 12: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삼하 12:14)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그 예언대로 밧세바가 아이를 낳았지만 칠 일 만에 죽고 말았다.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1주일을 다윗이 금식했다. 늙은 신하들이 다윗이 어떻게 될까 염려할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께 매달렸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 아들이 대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또 다른 벌이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울부짖었다.

 

자기의 간음한 그 죄를 아들 압살롬이 죽음으로 대신 졌으니 다윗으로서는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한 형벌이 되었다. 함이 자신이 지은 죄를 자기 아들 가나안이 대신 져야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윗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가장 혹독한 형벌이 되었을 것이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노아의 가나안에게 내린 그 저주로 함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달픈 삶의 소유자로서 아프리카의 그 땅에서 살아갔고, 끝내는 이 세상 여러 곳에서 그 지독한 노예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리했을지라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철회되지는 않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그 사랑을 거두신 적은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아픈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아갔을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이라 인정하신 노아의 자손이었던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것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렇게 그들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하나님의 그 심정은 또 어떠하셨을까!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면서 그 긴 세월을 함께 걸어가셨을까!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의 그 고난의 아픈 세월은 결코 헛된 것이 되게 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들이 그 아픈 고난의 세월을 감당하게 하시는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해서 그들과 함께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하셨으니 드디어 그들의 영혼 속에는 그 어떤 족속들보다 깊고 진한 하나님을 향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원천이 형성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통해 그들 자신 속에 아름다운 영성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셨고, 또 그 일을 도우셨다.

 

숯과 같은 탄소 덩어리가 무시무시하게 뜨겁고, 엄청난 압력으로 눌림을 당하는 그 깊은 땅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게 해서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가진 다이아몬드가 되도록 변하게 하셨다. 흑인들의 영성도 바로 그렇게 얻어진 다이아몬드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모진 고통이 다이아몬드처럼 그렇게 투명하고, 아름다운 영성을 지닌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원천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아름다운 영성을 지닌 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음악 속에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고유의 향기가 심어지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들 고유의 영가이다. 이를 우리는 ‘흑인영가’라 칭한다. 한번 들어보시라!

그 누가 이들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은혜로운 소리를 낼 수 있겠는지...!

 

하나님께서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삶의 순간들 속에서도 그들을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아끼며 사랑하셔서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도 강력한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신 31:5)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붙이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신 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이제 그들은 저주받은 족속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누구보다도 가장 앞서서 드러내는 축복 받은 자의 자리로 복귀하고 있다. 이 복이 탐이 나지 아니하는가?

누구라도 샘이 나게 하셔서 믿음의 경쟁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선한 믿음의 경쟁을 통해 하나님의 주시는 그 복을 모두가 완벽하고, 완전하게 받아 누리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과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 간절한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깨달아 알고, 또 이해하기나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