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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만드셨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2)

by 영동장로교회 2024. 11. 3.

2024. 11. 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만드셨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2)”

 

 

하나님이 사탄을 직접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자유 의지를 통해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논함에 있어서는 이 과정에서 논리적 및 법률적 측면에서 고려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자유 의지의 관점에서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천사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성적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자유 의지는 하나님이 이성적 존재들인 인간과 천사에게 부여한 중요한 특성으로서, 이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허락하심이다.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할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타락한 자리에 선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허용’과 ‘간과’이다. 만약 하나님이 사탄의 존재를 허용하셨다면 이는 천사가 사탄이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도 일정부분 그 책임을 지셔야만 하는 입장이 된다.

 

이 세상의 규례를 따르면 유력한 자가 범죄자의 범죄를 저지른 그 행동에 대해 허용한 경우, 그것을 허용한 자는 법적 및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공모 또는 방조에 대한 책임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방조한 경우, 허용한 자도 공모로 간주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2) 책임 있는 권한에 대한 것으로 유력한 자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범죄를 방조하거나 묵인했다면,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다.

 

3) 도덕적 책임이다. 법적 책임 외에도, 도덕적으로도 잘못된 행동을 방관하거나 허용한 경우 비난받을 수 있다.

 

4) 법적 처벌이 따른다. 각국의 법률에 따라, 허용한 자의 행동이 범죄에 기여했다면 법적으로는 처벌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세상의 법이란 하나님의 그 뜻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그의 로마서에서 세상의 법을 지켜 따르라고 명했다. 이 세상의 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의 법 이치란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그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심이란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책임을 지실 것이란 그 뜻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롬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롬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사탄의 존재를 허용하셨다면 그 사탄이 행한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실 일이 생긴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사탄의 행한 일의 결과가 무엇이던가!

하나님이 사탄을 허용하셨다면 그 사탄이 악을 조성한 일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하나님이 기여하신 꼴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악을 조성하신 자이신가?

 

악은 도무지 하나님의 속성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러하니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멸하셔야만 하는 공의의 속성을 지니신 자이심이 분명하지 않은가!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심’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존재하는 그 일을 간과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래서 정당한 표현이 된다. 이제 우리는 허용하심이 아닌 이 ‘간과’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탄이 존재하게 된 그 이유를 살필 것이다.

 

간과란 주의 깊게 살피며 간섭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적당히 보아넘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탄이 될 천사가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절제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사용하여 결국에는 이기적인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그 천사가 결국에는 최종적으로 스스로에 의해 욕심을 만드는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제지하여 말리지 않으셨다. 이는 선택하신 천사에 대해서는 ‘견인’하신 것과는 다르게 그를 ‘견인’하지 않으심이었고, 단지 그대로 버려두고 지켜보심, 즉 ‘간과’하신 일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간과하셨다"라는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특정 사건이나 사람의 잘못, 죄, 혹은 상황을 주목하지 않고 버려두셨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경우 '간과하다'라는 것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간과하신 경우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강조하는 문맥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7:30에서는 하나님이 무지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명령하신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특정 시점에 간과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다룰 때,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고려하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래서 사탄이 될 천사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타락한 천사의 자리로 나아간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지켜만 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랬으니, 천사가 스스로 교만하여 사탄의 자리에 섬으로써 지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탄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이 허락이나 허용과 관련해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처음에 그 질문은 “하나님이 왜 사탄을 만드셨느냐?”였다. 이 질문이 하나님께서 사탄을 만드셨다고 하는 전제에서 나온 질문이었다면, 그래서 그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 된다.

 

사탄은 분명히 악한 존재이다. 따라서 사탄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있게 만드신 장본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가 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은 도덕적이신 속성을 지니신 자이시기 때문에 그런 일은 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는 성스러우심과 지극히 선하시고 지극히 의로우신 성품이 존재한다. 지극히 성스러우시기에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그에게는 악이 있으실 수가 없고, 또 그는 지극히 의로우시기에 공의의 하나님이 되신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악을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이신데, 만약 그가 악을 지으셨다면 스스로 악을 짓기도 하시고 악을 벌하시기도 하는 그런 하나님이 되신다. 그러면 그는 지극히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되시고 말 것이다.

 

이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 속성에도 위배 되신다.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것은 결코 변개하실 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만드시고 또 부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그 하나님을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악을 만드실 수가 없는 자이시니, “사탄을 만드셨다”라는 그 명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만드셨냐?”라는 그 질문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하나님은 왜 사탄의 존재를 허용하셨는가?“하는 것으로 바꾸면 어떨까?

 

이 질문은 사탄의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이고, 위에서 본 존 파이퍼 목사님이 답하신 것은 사탄의 존재 자체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그 일을 왜 허용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기에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질문들이 된다.

 

전자는 사탄의 존재 자체의 허용을 묻는 것이고, 후자는 존재한 사탄이 유혹을 하는 그 일에 대한 허용을 묻는 것이다. 이는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과 존재함으로써 일어나는 그 작용에 관한 질문으로 구별됨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경우를 나누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은 사탄의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경우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만드셨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만드셨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라고 했으므로 이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수정된 질문이 “하나님께서 사탄을 허용하셨느냐?”라고 수정된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이 질문은 타당한가?

 

이 경우에는 ”‘허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허용이라는 것은 허락하고 용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되도록 하는 일을 허용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결과하는지를 살펴볼 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탄이 존재하도록 하는 그 일을 허용했다면 이성적 존재가 죄를 짓는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미치는 그 범주 안에 들어오는 일이 되게 된다. 허용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물에 대해 일정부분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가 드러남이 된다.

 

‘허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을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전능자이니 죄를 허용해도 절대주권을 집행한 것이니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런 억지가 될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은 그런 존재이신가?

 

하나님은 인격적이심을 그 속성으로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고로 절대자이시지만 그 절대권을 마음대로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죄의 책임을 감당하셔야 하는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이 절대자이시니 그 죄에 대한 책임도 무시하고 죄를 허용하실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전능하시다는 개념이 만약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의 그 선택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이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악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모순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성적 존재들에게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천사나 사람은 주어진 그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독재자로 간주할 수 있는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계신다.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의 자리에 서게 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간과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심에 따라 타락할 천사의 자유의지에 대한 ’무절제한 사용‘의 결과로써 결국 죄가 들어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죄가 들어오도록 하는 그 일에 대해 ‘간과’하셨을까?

 

사람은 누구라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입장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모른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그 복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진정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영원에서 작정하셨다. 이 일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죄라는 것을 직접 경험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죄를 경험함이 필수적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타락하는 자리에 서는 그 일과 그로 인해서 이성적 존재에게 죄가 생겨나는 그 일에 대해 간과하실 것을 영원에서 작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일까?

 

사람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인적인 경험의 차이 때문이다. 각 사람은 고유한 경험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나 반응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는 공감의 한계 때문이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능력이지만, 이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완벽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큰 상실을 경험한 사람의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완벽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세 번째는 인지적 거리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인지적으로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따라서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사회적 학습 때문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사회적 학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지만, 이는 직접 경험을 통해 얻는 배움과는 전혀 다르다. 직접 경험을 통해 얻는 교훈은 더 깊고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사람들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그 심정을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 되는 그 자리에 서는 것을 간과하시기로 정하심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사탄의 유혹으로 아담은 스스로 죄인 되는 그 길을 선택하여 들어섰다.

 

그가 지은 그 죄는 분명히 악한 것이어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그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 순간을 지켜보시는 것이 당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시기보다 더 힘드셨던 일이라는 것을 과연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사탄이 만든 그 악조차도 우리를 위하여 활용하셨으니, 그 악한 것이 변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었다.

우리를 하나님 자신보다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악이 변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절대자에게서만 가능한 그 일이었다. 악이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신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돌아올 때 그 돌아옴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신 일, 즉 하나님 앞에 선이 되게 하셨다.

 

세상의 정당한 형법의 경우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그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우격다짐으로 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무조건 하나님의 주권적 절대권만을 주장한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의 그 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만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결국 하나님을 무자비한 하나님으로 만들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경험하게 하려고 작정하셨기에 천사 중에 타락하여 사탄이 되는 그 일을 간과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에 아담을 시조로 둔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그 유일한 길을 열어주시고, 또 기쁘신 마음으로 그렇게 될 날을 미리 내다보심이셨다. 이것이 사실이고 참이라는 것을 하나님이신 주 예수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주심에서 드러났다.

 

죄악한 길을 향해 떠나는 그 탕자 아들을 바라보는 그때의 아버지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차라리 내가 내신 저 짐을 질 수 있으면 좋겠다 하고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우셨을 아버지이셨다.

그 반면에 떠나는 탕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이제부터는 아무런 구속받음이 없는 찬란한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 나의 영광을 보라고!“라고 외치며 발걸음도 가볍게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램은 물거품이 되었고, 돼지가 먹는 그 쥐엄 열매조차도 부족하여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된 그때서야 아버지 집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났다. 드디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아버지에 대한 참된 사랑을 깨닫고 발길을 돌리게 된 탕자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지만,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이 재회의 순간에 먼저 본 사람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동구 밖에서 매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이 아버지였으니 누구의 사랑이 더 깊었겠는가!


(눅 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탕자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어 밝힘이었다. 탕자가 그 죄악한 생활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그 참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 답은 그의 형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참 효자였다. 탕자 아들과는 비교되지 않게 성실하게 재산을 일구어갔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말했다. 내가 일군 이 재물로 어찌해서 아버지는 내 허락 없이 탕자인 내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냐고 따졌다. 이 순간에는 과연 누가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일까?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래서 아담이 죄를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간과하셨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지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든 적게 해주시려고 애를 쓰심에서 천사가 타락하는 것을 간과하셨던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실 일꾼이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던가! 어찌 그 부모가 자식보다 그 종을 더 소중히 여기리오!

 

우리로 하여금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도록 만드시려고, 그 아픈 가슴을 달래시며 타락한 천사가 아담을 유혹하는 그 일을 지켜보셨던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때 아담이 져야 할 그 죄짐을 타락한 천사인 사탄에게 일부를 전가하셨다.

 

우리의 죄책을 경감시켜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무진 애를 쓰셨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무조건적인 사랑이셨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이 절절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기나 하는 것일까!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이르도록 한 일에서는 분명히 사탄의 책임이 따른다. 세상의 규례에서도 유혹하여 죄를 저지르도록 한 경우, 유혹한 자의 형사적 책임은 여러 요인에 따라 달리 주어지지만, 책임을 지는 것은 분명하다. 책임이 부과되는 것은 여러 가지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만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1) 공모 여부에 따른 것으로 유혹한 자가 범죄의 실행을 공모하거나 계획한 경우, 공동정범으로 형사 책임을 질 수 있다.

2) 유인행위의 정도에 따른 것으로 유혹의 방식이나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따라 형사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3) 피해자의 의사결정 능력에 따른 것으로 유혹이 피해자의 의사결정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했을 경우, 유혹한 자의 책임이 더 무겁게 평가될 수 있다.

4) 법률의 규정에 따른 것으로 각 나라의 형법에서 유혹에 대한 규정이 다를 수 있지만 분명히 구체적인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5) 정신적 영향에 따른 것으로 유혹이 피해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한 경우, 이는 유혹한 자의 책임을 증가시킬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사탄의 책임은 중대하다 할 것이다.

특히 하와가 하나님의 그 말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는 아니한 채 사탄의 유혹으로 죄를 범했다면, 하와가 스스로 선택하여 죄를 범한 경우보다는 그 죄책이 가벼워질 수 있다.

 

실제로 하와는 뱀이 물어보았을 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는 그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다르게 답했다. 그렇게 하와는 말씀에서는 여전히 초보 상태였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직접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가르치셨으나, 하와는 그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 아담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랬으니 말씀의 깨달음에는 완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말씀의 깨달음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하와에게 사탄이 말씀으로 유혹하였으니, 이는 말씀에 대해 ‘책임무능력자’로 볼 수 있는 하와를 유혹한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하와는 말씀을 잘못 해석한 상태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으니 ‘금지착오’의 그 조건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한 일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와 스스로 죄를 범한 경우에 비해서 죄를 경감해 주실 수 있는 그 구실을 찾으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 하와를 유혹한 사탄에게는 유혹한 그 죄를 엄하게 물으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는 분명히 죄책의 분담이었으니,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 아담과 하와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경감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 일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바르게 키우려고 훈육하는 매를 들 때 어찌해서든지 덜 아프게 때리면서 훈육하고 싶은 그 마음은 어쩌면 하나님이 이 성품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신 것이었으리라!

 

아담이 스스로 혼자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굳이 사탄을 통해 유혹받게 함으로써 죄에 이르도록 그렇게 간과하신 하나님의 이 처사는 아담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비밀이었다. 선택되지 못한 자면 그 누구라서 이 비밀을 능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탕한 길로 접어든 것은 분명히 악이었다. 그러나 그 죄를 경험함으로써 아버지의 존재와 그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그 탕자가 얻었기에 다시 만난 부자 사이에는 참으로 진실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때 그 사랑을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이루시려고 우리가 죄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아픈 가슴 부여잡고 참아내시며 기다리신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천사가 변하여 사탄이 되는 그 일에서도 간과하시며 참아내셨던 것이다.

 

많은 자들이 신학의 최대 난제가 ”왜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하락하셨는가?“라는 이 질문이라고 한다.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그 이유는 분명히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에는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오직 하나님의 그 위대하시고, 무조건적이시며, 무한하신 그 사랑을 이해한다면 이 문제는 결코 난제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