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만드셨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1)”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질문한다. “하나님이 왜 사탄을 만드셨느냐? 만약 사탄이 없었더라면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죄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라고. 이는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원망일 것이다. 사탄을 만든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으니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신앙인들 중에서도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지금의 우리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신학자들도 고민했다. 이 고민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가 ‘신정론’이다.
신정론(Theodicy)에서는 신의 존재와 선하심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및 신학적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개념은 ‘하나님’과 ‘악’의 관계를 탐구하며, 하나님이 전능하고 전지하며 전선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왜 악이 존재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한 신정론의 주요 목적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악의 존재 설명: 세상에 왜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자유의지의 개념을 통해 인간의 선택이 악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2) 하나님의 성품 방어: 하나님이 선하신 존재라는 주장을 지키기 위해 악의 존재를 어떻게든 정당화하려고 한다.
3) 신앙과 고통의 관계 탐구: 신앙인들이 겪는 고통과 의심을 다루며, 신앙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려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정론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이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 라이프니츠,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어왔다.
죄의 기원을 다루는 것은 조직신학에서의 인죄론 파트인데, 인죄론은 원인(原人)과 죄인을 구별하며, 죄인 되게 한 그 죄의 기원을 다룬다. 죄의 기원을 따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착되는 질문이 “천사가 왜 타락했느냐?”이다. 천사의 타락은 자가 모순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천사는 본래 선하게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는데, 어찌해서 그렇게 선하게 창조된 천사에게서 죄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리는 자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생겨난 오류이다. 그렇다면 그 한 가지 사실이란 무엇이며, 왜 천사의 타락이 가능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심어주셨다. 그래서 천사들에게도 능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자유의지를 사용할 재량이 주어졌다.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질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여기서 ‘절제’라는 미덕이 발휘되어야만 했다.
성경에서는 이 절제의 미덕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입은 자에게서 드러나는 미덕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절제를 언급한 몇 가지 구절이 있다. 이 구절들은 절제가 중요한 미덕임을 강조하고 있다. 절제는 자제력과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서, 신앙생활과 일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잠 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절제의 미덕을 소유한 거듭남을 입은 자라는 것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심령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범죄하기 이전의 천사와 사람인 아담은 이 절제의 미덕을 실천해야만 했던 자들이다. ‘자유의지’란 절제된 상태에서는 지극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절제가 사라진 상태에서 자유의지가 무한대로 사용된다면 이는 결국 자유의지의 그 아름다운 선물이 더러운 것으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약이라는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약이라는 것을 사용할 때 이 절제라는 자기 통제가 따라야 그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고 자기 통제력을 잃고 과량복용하면 그 약은 독이 되어 생명을 앗아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색을 칠함에 있어서도 그와 유사한 경우를 발견한다. 빨간색과 노란색과 파란색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 특히 이들 세 가지의 색을 적절하게 조합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색상을 연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명화란 이들 세 가지의 색에 대한 절제된 사용으로서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의 색을 무한히 반복에서 사용하면 결국 검은색에 도달한다. 검게 변해버린 그 화면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성적 존재인 천사와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이 절제가 발휘된 자제력을 이용하여 스스로 적절한 자기 통제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삶을 살라 하심이었다.
천사가 하나님의 이 뜻을 바르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충심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천사는 하나님 앞에 봉사하도록 지으심을 입은 자들이 아니었던가!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견인하는 은혜를 입지 못한 천사는 자기 통제에서 실패하여 자제력을 잃었고, 그래서 자유의지를 무한히 사용하여 결국 아름답지 못한 상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것이 하나님과 비겨보려는 그 자리에 이르려고 했던 ‘사탄’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사탄의 자리에 설 그 천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무절제하게 무한히 사용한 결과로 결국 욕심을 잉태하고 말았다. 약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사용하면 유익한 약으로써의 효능을 발휘하여 몸을 이롭게 하지만 무절제하게 무한히 사용하면 결국 독이 되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의 무절제한 무한 사용은 결국 욕심을 잉태케 했고, 그 욕심은 죄를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사망이라는 것이 도래하게 되었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사탄이 될 천사가 행한 자유의지의 무절제한 사용은 결과적으로 “천사의 이기적 채택”이라는 형체로 드러나게 되고 말았다. 이 이기적 채택은 결국 천사의 타락을 결과했다. 그때 그 순간에서의 지식과 능력을 위한 그 무죄한 욕망은 결국 교만의 죄를 잉태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이 될 줄을 모르시고 천사를 창조하신 것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한국 기독교의 거성이셨던 박형룡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이 장차 악하여지고 악을 행할 영들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은 그의 속성에 조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답하노니 이것은 사람들의 창조와 보전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부조응하지 않을 것이니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보전되되 악화 또는 행악하지 않는가? 불결, 도적, 전쟁이 인류 중에 허용되었으니 악이 천사들 중에도 허용됨도 특별히 하나님의 의도에 부조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을 위하여 사람의 행동을 제재하시며 그의 불의를 마침내 폭로하고 형벌하여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와 같이 악한 천사에 의한 악행이 선을 위하여 제재되기도 하며 그들의 비운은 우주에게 경고를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답은 ”하나님께서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이 될 줄을 모르시고 천사를 창조하셨느냐?”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단히 수박 겉핥기식의 궁색한 답변이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그리하신 데에는 분명한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악한 천사에 의한 악행이 선을 위하여 제재되기도 하며, 그들의 비운은 우주에게 경고를 줄 것“만을 그 목적으로 하여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크고 분명한 그 목적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서 더 나아가면 ”하나님이 왜 사탄을 만드셨고, 그리고 그 사탄은 왜 인류를 유혹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 영적 여정을 방해하는 일에 대해 허락하셨을까?”라는 질문으로 확대될 것이다.
이 질문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품을만한 의문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미국 미네소타주 베들레헴대학 총장인 존 파이퍼 목사님은 사탄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이유에 대해 “만약 하나님이 사탄을 제거하셔서 유일한 적이 우리 인간의 타락뿐이라면 구원의 승리로 인한 영광의 일부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일, 즉 사탄을 이기시고 승리하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함일 것이다. 사탄을 무찌르시고 그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두 가지 일을 하심으로써 더 큰 영광을 얻으실 것이란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은 완전하심을 그 속성으로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부족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더 무엇을 필요로 하실 이유가 없으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기 위해 더 무엇이 필요하다면 이는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되신다.
만약 그럴 필요가 하나님께 있었더라면 그때의 하나님은 하나님 되실 바 그 무엇이 부족한 존재가 되실 것이고, 그러면 그런 자는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더 무엇을 필요로 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사탄을 존재케 하시는 것은 “만약 하나님이 사탄을 제거하셔서 유일한 적이 우리 인간의 타락뿐이라면 구원의 승리로 인한 영광의 일부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그 말은 분명히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존재케 하신 데에는 분명히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그 참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 숙제가 된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하나님은 왜 사탄이 인류를 유혹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 영적 여정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실까?’라는 그 질문에도 답하셨다. 그 질문에 답하셨다는 것은 그 질문이 사리에 맞는 질문이라고 인정하시고 수용하신 때문이다.
이어서 존 파이퍼 목사님은 “사탄의 존재가 지속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맹목성과 사탄의 속임수를 모두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승리가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그분이 사탄을 더 일찍 멸하신다면 그분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남아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우월한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사탄의 속임수를 물리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우월한 능력과 아름다움은 더 큰 영광이 될 것이라 본다”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그런데 만약 존 파이퍼 목사님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우월한 능력과 아름다움을 이루셔서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이기적인 하나님이 되실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것을 원하시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려는 지극히 이타적인 사랑의 하나님 되심으로써 드러난 결과로서의 그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드러난 그 현상만으로 일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분명히 우리의 한계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드러난 그 현상에 매몰되지 말고, 보다 깊이 있게 그 내면을 살피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짚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사탄이 방해하도록 허락하실까?”라고 한 이 표현의 타당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또 목사님은 “사탄의 존재가 지속하도록 허용함으로써”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허락한다거나 허용한다는 것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일정부분 책임을 질 것에 대한 그 의지가 담긴 표현이 된다. 허락한다는 것은 청하는 일을 들어주는 승낙의 표현이고, 허용은 허락하여 용납해주는 일이다.
허락하거나 허용하는 그 일은 그 행동이나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허락은 특정 행동을 승인하는 것이고, 허용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일정부분 책임감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무엇을 허락해준다면, 그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따르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셨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죄가 들어오도록 한 그 일에 공범이 되실 수밖에 없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은 이 땅에 죄가 들어오도록 하는 그 일에 공범이 되실 수가 있을까?
하나님은 그 속성상 죄를 허용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는 도덕적으로 지극히 선하시며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허용하실 수가 없다. 그러하심이 그의 창조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작업을 하신 후에 그 소감을 밝히시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심에서 그 만드신 것들이 모두 아름답고 선하였음이 드러났다.
분명히 ‘밤’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기록에서 우리는 천지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그 증거는 발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이것들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이것들 위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이 드러나고 있다. 어쩌면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탄을 제압하시는 그 일이 상징적으로 암시된 묘사이니,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신 것이었으리라.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것을 히브리 원전에서 직접 읽으면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그렇게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그 땅을 감싸 안으셨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성경 구절에서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어둠으로 덮인 땅이란 것은 죄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암시함이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한다는 것은 그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보호하심에 대한 그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이 빛을 만드심으로써 그 어둠은 물러나고, 그 어둠이 지배했던 그 영역이 낮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빛이 다스리는 ‘낮’이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 영역이 됨이니 이는 믿음의 백성들이 거하는 그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밤은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가 아니던가!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사탄을 만드실 리가 없다. 그런 하나님이시니 사탄을 허용하실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탄은 존재하는 것일까?
사탄의 존재에 관해서 성경은 매우 제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선한 천사들은 택한 천사들이라고 칭호되었다. 이 칭호는 순종 혹 불순종이 천사들에게 ‘선’ 혹은 ‘악’을 영구히 결정할 시련기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암시이다.
(딤전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딤전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선한 천사들은 자기들의 그 지위를 보존함에 필요하여 보충해 주는 그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져 선한 천사로서의 자기들의 지위에 고정됨을 가능하게 하는 ‘견인’의 특별은혜를 받은 것이 현저하다.
(하나님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구원을 이루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신다는 교리인데, 이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로,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앙을 끝까지 유지하며, 결국에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견인은 구원의 보장과 지속성을 의미한다.
천사의 경우에도 선한 천사로 선택된 자는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그 은혜로 끝까지 타락한 천사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
반면에 피택되지 못한 천사들은 견인의 특별은혜를 받지 못한 고로 시련 중에 자유의지의 무절제한 사용으로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악에 고정되었을 것이다. 천사 중에 있은 이 같은 선택을 우리는 ‘타락전선택’이라 칭한다.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무리요, 종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개별적으로 범죄하였고 어떤 종족적 원수(元首) 안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는 아담을 원수로 한다)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를 위한 구원은 따로 준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라고 하신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심에 있어서 능히 모든 사람의 공통성질을 취하셨고 그리하심으로써 자신을 인류에게 연결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능히 취할 수 있는 천사들의 공통성질은 취하지 않으셨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되실지라도 타락한 천사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는 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앞서 이미 언급한 대로 모든 천사는 다 선하게 창조되었다.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그러나 그 천사들 중에서 자기들의 본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창조 때의 신분에서 타락하였다는 것은 분명히 함의된 바이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 타락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한다.
(벧후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책이지 사탄을 구원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수적인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기록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탄이 존재하는 그 이유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 목적을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이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천사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사들도 함께 창조하셨을 것이고, 그들 중에 일부가 타락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혼돈과 무질서와 흑암과 같은 대격변의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과 같은 기록에 대한 그 주요 원인으로 추상할 수 있다.
천사의 타락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대한 사용에 있어서 ‘무절제한 사용’으로 인한 결과였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사탄이 존재하는 그 일에 대해서는 “허용하심일까?” 혹은 “간과하심일까?”를 살피는 데까지 왔다.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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