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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 이치의 발견에 관하여(1)

by 영동장로교회 2024. 9. 29.

2024. 9. 2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 이치의 발견에 관하여(1)”

 

 

며칠 전까지도 맹위를 떨치던 여름이 슬그머니 꽁무니 빼고 사라졌다. 푸른 옷을 켜켜이 껴입고 서서 여름 내내 폭염의 눈치만 보던 앞산의 나무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나둘씩 노랗고 빨간 고운 색동옷으로 치장하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시작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는 한 잎, 두 잎 낙엽을 땅 위에 내려놓으며 겨울 추위를 대비하는 이불을 깔 것이다.

 

아무리 맹렬한 기세로 권세를 누리는 여름 장군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는 저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계절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리에 따라 끊임없이 순환한다. 그 과정에서 새순이 돋고, 낙엽이 진다. 이렇게 자연은 수많은 현상을 드러내며 또 반복한다.

 

낙엽이 지는 현상과 겨울에 눈이 내리는 현상은 분명히 다르게 보인다. 물은 높은 곳에서 흘러내려 때로는 폭포를 이루고, 때로는 긴 강줄기를 이룬다. 이 현상도 분명히 낙엽이 지는 그 현상과는 다르다.

 

추석날에 크고 둥근 달이 뜨는 것은 보는 이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한 해 동안 뜨거운 햇살 아래서 농사를 짓는다고 애를 쓴 이들에게 베푸는 위로일 것이다. 달이 뜨고 지는 그 현상도 낙엽이 지는 그 현상과는 또 다른 현상일 것이다.

 

보통한 사람의 눈에는 이 모든 현상은 각각 분명히 다르게 구별되는 현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 현상들을 깊이 탐구하여 들어가면 이 현상들은 모두 하나의 원리에 따라 작동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자연의 이치’라고 말한다.

 

물리학에서는 이 현상들 모두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한다. 그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낙엽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지구가 그 낙엽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겨울에 꽃송이 같은 눈이 떨어져 쌓이는 것도 지구가 그 눈송이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물이 흐르는 것도 그렇다. 높은 곳에 있는 물을 지구가 끌어당긴다. 그래서 높은 데 있는 물은 아래로 흐른다. 때로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게 되면 그 물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니 그것이 폭포다.

 

달이 뜨는 것은 지구가 달을 끌어당기고 그 달은 지구가 끌어당기는 동안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 그래서 어느 일정한 지점에 이르게 되면 보름달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그 공전이 계속되어 또 어느 지점에 이르면 초승달이 되게 된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나 보인 그 모든 현상의 그 이면에는 오직 하나의 원리,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이 존재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수많은 현상을 그 개체 하나하나로만 보고 그것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현상은 하나로 볼 수 있어 달관의 경지에 설 수 있게 된다. 도를 깨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 달관의 경지를 향해 나아감이다.

 

어린 나이에서는 많은 일들로 고뇌하고, 참으로 많은 염려를 안고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그래서 이치를 깨달으면서 이러한 고뇌와 염려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치란 사물이나 현상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나 법칙을 의미하는데, 주로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섭리와 같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 반면에 원리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법칙이나 규칙을 의미하는데, 특정 상황이나 맥락에서 적용되는 상대적이고 구체적인 규칙을 설명할 때 사용한다.

 

둘 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되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사물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치와 원리는 둘 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지만 분명히 이 둘은 약간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치란 전체적인 관점에서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설명하는 반면, 원리는 그 전체 속에서 특정 상황이나 맥락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규칙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이치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을 ‘전체집합’이라는 관점에서 살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원리는 전체 속에서의 어떤 특정 상황이나 맥락에 대해서 살피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을 ‘부분집합’이라는 관점에서 살피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치는 더 넓고 포괄적인 개념이고, 원리는 그 안에서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부분을 다루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낙엽이 지는 현상이나 보름달이 뜨는 현상에 대해서는 “그 원리가 무엇인가”하고 생각할 것이고, 이러한 자연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그 이치가 무엇인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학창 시절에 수학을 어렵게 생각한 것은 수학 시험에서 주어지는 그 문제 하나하나에 매달려 어떻게든 그것을 풀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수 많은 문제가 하나의 원리를 중심에 두고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수학이라는 과목을 그리도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물리 과목도 그러하다. 하나의 법칙을 그 중심에 두고 각기 다른 옷을 입혀놓은 것이 시험지에 주어진 문제들이었다. 그 법칙이 어떤 형태로 옷이 입혀졌는지를 보는 눈만 가졌더라면 물리 역시 참으로 쉬운 과목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현상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분명히 그 속에는 정해진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 원리가 무엇인지만 정확히 찾아낸다면 그것은 과히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치는 사물이나 현상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나 법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섭리와 같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렇게 존재하는 그 이치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진화를 주장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것은 그냥 우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연히 이런 ‘이치‘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을까?

 

이치란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심점이라 할 수 있다. 우연히 생긴다면 그 진행은 특이한 한 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점들을 생성할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특이점인 ’이치‘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상이 생기게 하는 그 이면에는 분명히 어떤 인격적 실유가 존재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우리는 그 인격적 실유를 ‘하나님’이라 칭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 하나님을 ‘창조자’라 부른다.

 

이 우주를 창조한 자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인격적 실유이시다. 인격적 실유는 반드시 의지를 소지하시니, 이 우주 창조에는 분명히 그 목적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 목적은 이 우주가 우주로서 존재하게 하는 그 이치 속에 분명히 담겨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 우주 속에 그 이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우주를 있게 한 자의 원하신 목적이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또 다른 입장에서 우주를 창조한 자, 즉 창조주가 없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은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이 우주를 지배하는 이치가 존재한다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뉴턴은 그 유명한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을 이 우주의 현상을 관찰하고 발견했다.

 

케플러와 같은 과학자도 이 우주를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법칙을 발견했다. 분명히 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 법칙은 진화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그 순간부터 이미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우주는 분명히 어떤 절대적인 인격적 실유에 의해 창조되었음에는 토를 달 수가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노니 그 실유를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엄중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다.

 

성경은 오직 믿음에 대한 고백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하기에 성경의 시작을 믿음의 고백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연 속에 어떤 이치를 숨겨놓으셨고, 그 이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우리가 보는 바대로 자연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현상이 존재한다. 그 많은 현상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아담을 지으신 이야기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그 일과 주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양육하신 이 모든 일들이 분명히 다른 일들이다. 그러나 그 현상들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오직 하나이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은 바로 그 음성이다. 그 음성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음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음성을 발하셨다. 그것을 통상적으로 ‘일반계시“라 칭한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는 태양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담아두셨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이 그것이다. 뉴턴은 물리학자이기에 자연을 통해 물리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원리를 찾으려고 했다.

 

결국 그는 사과 농장을 하는 외가의 사과나무 아래에서 깊은 사유를 하는 과정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을 찾아낸다. 어쩌면 간절히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뉴턴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심인지도 모른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외갓집이 사과 농장을 하고 있으니 그 많은 일군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이라도 못본 일군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그 음성, ’만유인력‘을 듣지 못했다. 끊임없이 갈구한 뉴턴만이 그 음성을 들었다.

 

그가 그 농장에 평생을 머물면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관찰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페스트가 유행했기에 그 전염병을 피해 간 곳이 시골의 외갓집 그 과수원 농장이었다. 얼마나 간절히 사모했으면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순간에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가 그 음성을 들었을까! 우리는 그 뉴턴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 음성 듣기를 사모하며 구한 적이 있었는가!

 

뉴턴도 자신이 저술한 가장 유명한 과학적 저서인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후, 우주에 존재하는 법칙들이 신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통해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보통 물리학을 고전물리와 현대물리로 구분한다. 뉴턴은 고전물리를 완성한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이다. 그런 그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했으니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런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리라!

 

그런데 적어도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는 그 위대한 발견으로 얻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해 나는 그 어디에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표현한 기록을 보지 못했다. 그저 그 법칙은 두 물체 간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하는데, 그 힘의 세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 간 거리의 제곱에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이 공식을 언급한 그 표현 속에는 어디를 봐도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져 있지 않다. 어떤 책을 봐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속에 당신의 음성을 숨겨두셨음은 분명하다. 이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오직 한 마디, 이 속에 ’하나님 이치‘가 담겨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두 물체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아무리 질량이 큰 물체일지라도 홀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비록 엄청난 세기의 중력장을 만들지라도 만유인력이라는 힘을 드러낼 수는 없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질량이 크다 할 수 있는 블랙홀일지라도 그 근처에 질량을 가진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만유인력을 느낄 수 없다.

 

질량이 무한대가 되는 그것은 곧 하나님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질량이 무한대일지라도 그가 홀로 있다면 만유인력을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홀로 계신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알 방법이 없다.

 

태양의 주위로 지구가 돈다는 것은 그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그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원운동을 하는 물체는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물체는 이내 바깥쪽으로 튕겨 나가게 되어있다.

 

보름날 저녁에 쥐불놀이하면 이를 쉽게 체험할 수 있다.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면 그 불은 원운동을 한다. 내가 끈으로 그 불이 든 깡통을 끌어당겨 돌리기 때문에 그 불이 원운동을 한다. 보름밤 하늘에 그린 예쁜 불의 춤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원리가 작동한 것이다. 그러다가 잡고 있는 끈을 놓으면 그 불은 밤하늘에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버리게 된다.

 

우리 지구가 태양 주위로 공전하는 것도 그렇다. 태양이 우리 지구를 끌어당겨 주지 않으면 우리 지구는 먼 우주 속으로 날아가 우주의 고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아주 먼 그 옛날 태양계가 만들어졌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태양은 한순간도 변함없이 우리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다. 뉴턴은 이 힘을 만유인력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그 힘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나님은 그 본질을 사랑으로 하신 자이시다. 만약 그가 홀로 계신다면 어찌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당신의 사랑의 하나님 되심을 이 천지에 드러내셨으니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유인력이 있게 하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뉴턴이 만든 만유인력의 이 공식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공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태양이 처음 생겨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 지구를 끌어당기는 그 일을 멈추지 않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지금까지 사랑으로 돌보심에 대한 그것이 참임을 이 자연을 통해 증명해 보이셨다.

 

그래서 우주를 코스모스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κόσμος’에서 유래했는데, 혼돈과 무질서의 추함을 의미하는 ‘카오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우주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강조하는 표현이 되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자연을 통해 드러내신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태양계의 이 비밀을 드러내어 보이심으로써 당신의 우리를 향하신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신 것이다.

 

만약 태양의 질량이 너무나도 작았더라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이 그렇게 클 수 있었을까?

 

아마도 지구는 벌써 까마득히 어두운 그 우주 속에 삼켜졌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도 어둠의 대표 격인 그 사단의 손아귀에 깊숙이 잡혀 들어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매임이 된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태양계를 벗어날 정도로 멀어졌다면 지구가 태양 주위로 그렇게 아름다운 궤도를 그릴 수 있었을까?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교훈했다. 지구가 태양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으니 그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겨 이렇게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이처럼 끌어안아 주시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