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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라

by 영동장로교회 2020. 8. 2.

2020. 8. 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나사로야 나오라”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하게 우리의 상식으로는 지체없이 달려감이 옳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셨다.  심지어 이틀이나 더 지체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요 11: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와 같이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실망하고 서운해 한다.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어찌 내 기도를 외면하시는가 하고.

 

이는 인간의 사고는 유한하나 하나님의 사유하심은 무한하심에서 오는 결과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심오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주님의 이적 베푸시는 그 능력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은 보지만 그 본질을 보는 것에서는 무능한 자들이었다.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그러하기에 주님을 가까이에서 진실하게 따르던 그 마르다조차도 주님을 그런 정도의 인물로만 파악했다. 그녀의 고백 속에서 그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그녀는 주님이 단지 그 자신의 오라비를 죽지 않게 하고 살리실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지니신 자라고 여겼다.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마르다에게 주님은 참된 메시야가 될 수 있었을까?

 

메시야는 오직 하나님만이 되실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범죄한 죄인인고로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없고 죄인된 자를 의인된 자라고 칭할 권세도 물론 있기 불가하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요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요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요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요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요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가 생각하는 정도의 주님이라면 그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정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셨다.  그러면서 그는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참 하나님이시다. 마르다는 이 신성에 대한 인식 없이 단지 인형을 취하신 주님의 그 외면적 모습만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다.

(요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사랑의 원천이시며 그 사랑에서 무한하신 속성을 지니신 주님이 이 상황을 그대로 버려두신다면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고 또한 메시야로서의 자격도 상실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참된 메시야가 되심을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드러내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주님이야말로 참된 메시야,  참된 하나님이신 줄로 바르게 깨달아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가 죽고 그리고 그의 살림이 도무지 불가능한 그 지경에 이르게 된 그 때에 오셔서 그를 살리셔야만 했다.  그 살리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되고 그래서 그 일을 행하신 주님은 참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틀을 더 유하시며 지체하시고 나사로의 시체가 썩을 시간을 허락하시며 기다리셨다. 이는 사람의 편에 서서 그 일을 행하심이었고, 이는 그 사랑하는 자들을 지극히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또한 선포하신 사역이셨다.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뜻대로 나사로의 죽음과 그 시신을 썩게 하는 그 일을 임의대로 하실 수 있음에도 인생이 경험한대로의 방식을 취하셔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어 나가심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우리를 향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셨다.

 

마르다를 포함해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을 모두 살려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로 인해 얻어질 바른 구원의 길에 서게 하시려고 그는 스스로 그 슬픔으로 인해 아픈 그 가슴을 누르시고 그 일을 행하셨다.

 

나사로가 죽는 그 일은 분명 인성을 지니신 주님의 입장에서는 슬픈 일이었다.  사랑하는 자가 떠나버리는 그것을 기뻐할 자가 어디 있으며 그 일을 슬퍼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그 순간의 그 슬픔조차 자신이 사랑하는 그들에게 바른 구원의 길을 알게 하시려는 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스스로 억누르고 참으셨다.  그러나 끝내는 울음을 보이심으로 그 슬픔을 참고 억누름이 인성을 지니신 주님에게 얼마나 참기 힘든 슬픔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성에서 느끼는 이 슬픔조차도 아프게 참아내시며 신성으로서 감당해야하는 그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그 일에 온전히 순종하신 주님이셨다.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완전히 썩어 냄새가 나는 그 시신을 살리는 그 일은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행하심으로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바르게 인식시키시고자 하셨다.  그리함으로써 참된 메시야이신 주님에 대해 바르게 깨닫고 믿어 참된 구원의 길에 설 수 있게 하셨다.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요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시려고 오신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고백,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얻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다면 그들의 구원은 보장받을 길이 없다.  주님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바로 잡으시려고 이 사건을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지극하신 사랑을 우리는 어찌 다 감당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