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2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예수는 어떻게 인간적인 욕망을 극복하셨는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 적합하도록 그를 신체적인 면에서는 완전한 자로 지으셨다. 그리고 또한 그 일을 감당하기에 족한 지식도 그에게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는 능히 그 다스리는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지식으로 각종 나는 것과 기는 것들의 이름을 합당하게 지어주었다. 이는 피조물들 위에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그러한 일에서는 그는 완전한 자였다. 그리고 그는 능히 다스리는 그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자리에 아담을 세우실 때에는 그를 믿음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지는 아니하셨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은 아담이 스스로 감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를 믿음에서도 완전한 자로 세우셨다면 그 아담을 통해 하나님은 참된 기쁨을 얻지 못하실 것이었고, 그 결과로 아담은 복된 자가 되지 못하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믿음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게 하시고 그의 삶을 통해 스스로 믿음에 있어서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게 하셨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그 아담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다르게 믿음을 훈련시키는 도구인 그 선악과 열매를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아담의 지극한 이기심이 낳은 욕망의 결과였다. 첫 사람 아담은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첫 사람의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 아담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를 통해 기쁨을 얻기를 원하셨다. 그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믿음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족장이었으니 그 땅에서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오직 하나,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는 것 외에는.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셨다.
우상을 조각하던 그 아비에게서 난 아브라함, 그는 그 땅에서 진실로 소망이 없었던 자였다. 오래지 않아 끝나버릴 그 생명이 다하고 나면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참된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 영원한 죽음을 면할 길이 없는 가련한 처지에 있었던 자였다. 그 땅에서 족장으로 사는 것은 한 순간의 영화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침 이슬 같은 덧없는 영화였다. 그 이슬 같은 덧없는 족장의 자리조차도 물려줄 아들이 없었던 그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주마 약속하여 그를 불러내셨다. 그를 복된 자의 자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그 자리로 부르셨다.
(창 11: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창 11: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나 그 때 그 아브라함은 그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아들을 주마하신 그 약속에 끌려서 세상 욕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갔다. 어리석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참으로 크신 인내심으로 그를 이끄셨다. 여전히 세상적인 욕심을 쫓아갔고 드디어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는 이 일은 아브라함에게서의 선악과, 바로 그 열매였다. 자신의 욕심이 잉태해서 얻은 아들이니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서는 그 선악과 열매인 셈이며, 그것은 결국 화를 초래했다. 그렇게 어리석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끝까지 붙들고 가시면서 그로 하여금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로 나아가게 했다.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창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드디어 약속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다. 그 아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누가 온전히 이해하고 알아줄 수 있었을까? 자신의 목숨하고도 바꾸기 어려운 그 아들 이삭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셨다. 그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모리아산에서 내게 바치라고.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내어놓았던 것은 그에게서는 선악과의 열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일이었다. 아담은 그 선악과 열매를 자신의 소유로 삼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였고, 그 결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자가 되었다. 그 선악과는 아담의 소유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의 소유였었다. 먹지 말라 명하심으로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소유임이 선언되었으나 그 아담은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유로 삼은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완전히 자신의 소유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순간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로 빌려 받은 것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잠시 임시로 자신에게 속한 것이 되게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 때 아브라함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것을 내게로 돌리라고 명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그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돌려드리기로 결심하고 그 길을 나섰던 것이다. 성경은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행위였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악과 열매를 아담처럼 자신의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려고 먹어버리는 대신에 온전하게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그 일을 행하였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해드렸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성되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그는 아담이 이루지 못한 믿음의 조상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길을 나섰을 때, 그 때의 그의 믿음은 너무나도 어린 아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드디어 모리아산에서 장성한 믿음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다.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담 같이 되지 말고 아브라함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라하심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신 것은 믿음의 백성 삼으신 그 이스라엘이 그 조상 아브라함을 닮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하시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족속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셨다. 성부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성자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성자하나님은 순종하심으로 스스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스스로 모범이 되셔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온전히 가르치신 것이다.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는 완전한 신성을 지니심과 동시에 또한 완전한 인성을 지니셨다. 그래서 그 예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슬플 때에 눈물을 흘리셨고, 창에 찔리실 때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도 느끼셨다. 굶주리실 때에 배고픔을 또한 느끼셨다.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감각을 다 지니시고 우리와 같은 고통을 느끼시는 완전한 사람 예수시었다.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눅 4: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눅 4: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가 가지는 그 욕망을 주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을까? 아담이 받았던 그 유혹을 주님은 어떻게 이겨내셨을까?
공생애를 시작하는 그 순간에 주님은 광야에서 40일간 주리시는 금식을 하시며 그 유혹에 대한 결단을 하셨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보내신 자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셨다. 그 과정에서의 고통과 번민이 얼마나 컸을까!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인간이면서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그가 지니신 그 신성의 능력은 무한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일에 결코 자신이 지닌 신성을 이용하지 않았다. 만약 신성을 사용하여 그 시련을 제거했다면 그는 성부하나님 앞에서 신성의 전용에 관한 죄를 범하게 된다. 그의 신성의 능력은 오직 메시야로서의 사역에서만 사용되어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는 우리의 메시야가 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신성을 임의로 사용하셨다면 이는 또한 능력의 남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그는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가정한 이 모든 일들로부터 얻어질 결과로 그는 성부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할 것이니 이는 아담이 지은 바로 그 불순종의 죄를 범할 것이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인류의 역사는 또 다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화해 없는 삶이 반복되어지는, 우리의 구원이 영영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역사로 흐르게 되고 말 것이다.
예수는 보내신 자의 그 명을 받았고 자신의 직무에 진실로 충실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극한 모범을 보이셨다.
이 막중한 사명을 예수는 스스로 자원하여 감당하셨다.
그의 공생애 사역의 첫 순간에 그가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당한 것은 온전히 우리를 살리기 위한 우리 대신의 고난이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대신 지시고 자신의 그 연약한 육신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그것을 견디어 이겨내셨다. 인간의 내적인 욕망을 온전히 이겨내는 처절한 전투의 순간들이었다.
우리가 육신으로서의 배고픔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할 그 고난을 대신하셨고, 우리의 세상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망도 그가 대신하여 이겨내셨다. 그 과정이야 얼마나 힘들고 힘들었을까! 그 순간 그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당한 시련이었다.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셨으니 능히 이겨내신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 없는 단지 연약한 한 인간의 자격으로 그 일을 감당하셨을 뿐이다. 그리고 끝내 그것을 이겨내셨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인 욕망의 그 시험을 이겨내신 주님의 그 승리를 이제 내 것으로 하여 더 큰 영광을 이룰 수 있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대신하신 그 시험에 우리가 다시 빠져드는 것은 결코 주님이 바라시는 바가 될 수 없다. 적어도 주를 믿는 자라면 주님의 그 고통당하신 시험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탄이 그 시험에서 주님을 유혹하여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능히 이 돌덩이를 변하게 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여 그것을 먹어 배고픔을 면하게 하라고. 신성의 능력을 사용할 것에 대한 유혹이었다. 한 순간 주님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면 능히 돌덩이가 변하여 떡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이 순간의 이 유혹은 하와가 뱀으로부터 받은 그 유혹이 아니던가!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은 비장한 각오로 이 유혹을 이겨내셨다. 오직 우리를 살려내시고자 하는 그 열망으로 그 시험을 이겨내신 것이다. 주님도 분명 우리와 같이 주리시면 배고픔을 느끼시는 사람이시니 그 때의 그 배고픔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끝까지 참아내시며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셨다. 아담과 하와, 그 첫 사람들은 말씀을 변개시켜가면서 그 유혹을 쫓았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된 자리에 섰고 그 결과로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죽음의 계곡으로 내몰린 우리를 주님께서 그 극심한 고난을 이겨내시면서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구출하셨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 날의 40일간 광야에서의 그 시험은 죽음의 늪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기 위한 그 일을 하실 공생애 사역을 위한 준비 사역이셨다. 인간이기에 그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무수히도 자신을 괴롭힐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체질로 만드는 훈련의 날이었다. 그 40일간의 시험을 완전히 이겨내심으로 아담과 같은 우를 범할 일을 사전에 차단하신 것이다. 자신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그가 행하실 놀라운 이적을 얼마나 많이 행하실 것을 미리 아셨을 것이다. 그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목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때 그 명예를 탐하거나 권세와 물질에 대한 욕심도 그는 능히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신 예수도 사람이셨으므로. 그러한 일들에 대한 안전장치로 만든 것이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기도였을 것이다. 훗날 주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셨을 때, 결단코 명예를 탐하거나 유대인의 왕이 되어 권세를 탐하는 일을 전연 행하지 않으셨다. 인간 예수의 승리였다. 이 때 주님은 결코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만약에 그리하셨다면 그는 신성의 능력을 유용한 자가 되고 성부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의 먹을 것을 탐하고 권세를 탐하고 명예를 탐한다면 주님의 그 40일간의 고난은 헛것이 되고 만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 위에서의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셨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까!
(막 15: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막 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막 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이는 온전히 우리가 감당하여야만 했던 고통이다. 그것을 주님이 대신 당하여 주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마음속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을 것이다.
"내가 너의 죄짐을 다 담당하였으니 너는 더 이상 이 짐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내가 네게 부탁하는 이 일만 행하여라. 그래서 너는 가장 복된 자의 자리에 서도록 하여라"
죄를 짓는 자는 불행한 자요 최대 불행한 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자이다. 행복한 자는 죄에서 자유한 자요 최대 행복 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용서 받은 자이다. 주님의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져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 받았다. 우리는 최대의 행복 자의 자리에 섰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이 위대한 주님의 삶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다. 그렇게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시고 그것을 상줄 이유로 삼아 우리에게 상급을 베푸신다 하니 우리는 그저 황송할 뿐이다.
(계 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누구나 예수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예수를 닮는 그 일을 위해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인간으로서의 주님도 그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렇게 완전하실 수 있었다. 그의 신성의 능력은 그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 때까지는 감추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드러났다면 유용이 되고 남용이 되며 불순종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온전히 인성에서 완전한 순종과 믿음의 모범을 이루셨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어린 나이에 순종을 깨달았다. 모리아산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였고 그의 삶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오직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 이삭의 완전한 순종은 주님을 예표하고 있었다.
오늘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심에 따른 내 의를 주장하는 그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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