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부활 주일에 생각하는
“고난의 십자가 위의 두 종류의 포도주”
주님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지니셨다. 그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의 몸을 취하신 신인(神人)이셨다.
그는 완전한 사람의 육체를 지니신 몸이셨기에 인성으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하셨다. 그러나 우리처럼 그 연약한 육체의 지배를 당하여 유혹을 따라가는 그 길을 택하지는 않으셨다. 스스로 그 연약을 이겨내시는 지극한 순종의 길을 택하셨다.
우리의 조상 아담은 그 연약한 육체에 따라 순종의 길을 택하는 대신 그 유혹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드디어 하나님과 맺은 그 행위언약을 저버리는 길에 들어섰다. 하나님이 금하신 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는 영영 순종의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 주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신을 입으셨지만 그 육신의 정욕에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그 원하시는 바를 바라보고 지극한 순종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 가는 길이 쉬웠을까! 혹자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능히 그 모든 것을 이겨내실 만한 그 전능함이 있었기에 능히 그러하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의 순종하는 그 일은 하나님의 그 전능하심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인성으로만 하신 사역이셨다. 그가 그 땅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은 전혀 인성을 입으신 자로서의 일이셨다.
(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히 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그 순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신 것도 전적으로 인성을 지니신 예수가 하신 일이셨다.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눅 4: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눅 4: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 4: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눅 4: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눅 4: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눅 4: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눅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눅 4: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눅 4: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눅 4: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눅 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우리와 같이 배고픔을 느끼고 능히 세상의 명예를 탐하는 그 육신이 감당하는 그 시련이셨다. 그는 그때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심으로써 첫째 아담이 이루지 못한 그 순종을 이루어 내신 것이다. 이는 인간 예수자신을 위한 그 일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할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그 일이었다. 만약 그가 그 순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단의 그 유혹대로 돌덩이를 떡으로 변하게 하여 먹었더라면, 그도 그 순간 사단의 그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지독한 배고픔을 이겨내심으로 그는 완전한 순종을 이루어가셨다. 주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그 모든 고난의 사역은 그의 능동적 순종이셨다. 자원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이루어 나가신 완전한 순종이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차라리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닌 죄인 된 우리 중에 누군가가 주님이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래도 주님 보다는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죄인 된 자이니 그 죄인 된 자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는 그 수모를 당해도 으레 죄인이니 죄인으로서 당하는 그 고난이라 생각하면서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런 죄가 전혀 없으시고 더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시던가!
인간 세상에서 왕의 아들된 자가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일 일터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이신데 어찌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아무런 원망도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 길을 가셨다. 오직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그 뜻을 실현시키시기 위해서 온전히 순종하신 그 고난의 길이셨다.
(마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마 27: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마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마 27: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마지막 그 길, 골고다의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일에서 성경은 그를 대신하여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그 언덕까지 갔다고 했다.
(마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마 27: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이 사실에서 주님이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 순간 그의 신성이 고난을 당하는 일이라면 전능하신 그 능력이 그 십자가조차 버거워서 지고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자, 예수였지만 그 순간에는 그의 인성이 온전히 우리를 대신하는 그 고난을 당하셨고, 완전한 그 인성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순종하고 계셨다. 그 순종은 누가 시켜서 한 타율의 순종이 아니라 자원하여 이루어진 순종, 즉 능동적 순종이셨다.
그 순간의 주님은 분명히 우리와 다름없는 연약한 육신을 지녔고, 그 연약한 육신으로 온전한 그 순종을 감당해 내셨던 것이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배고픔을 느끼시고, 목마름을 느끼시고, 죽음에 대한 그 고통을 온전히 느끼시는 참으로 연약한 육신을 지니신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도 우리와 같은 배고픔과 갈증과 두려움이 있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연약한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가신 주님이셨다. 오직 우리를 위해.......
(마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그런 순종만이 하나님과의 유화(宥和), 즉 하나님의 용서를 입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시도록 하는 그 중보(仲保)의 역할을 우리 주께서는 친히 자원적으로 감당하신 것이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주님은 수난 감당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 땅에 오실 때 그는 그 높은 자의 자리에서 낮고 천한 그 자리를 기뻐하셨다. 내가 만약 왕자라면 구유 위에 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행하시는 이가 이 땅의 권세자의 그 박해를 받아 원치 않는 곳으로 가는 그 일을 나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 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하늘보좌 그 높은 자리에 있었던 주님이 이 땅에서 낮고 천한 목수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라면 그 귀한 자리를 내어놓고 이 같이 천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그 자리에 서라면 할 수 있을까?
주님은 왜 그리하신 것인가?
오직 죄인된 나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처음으로 회복시키시려는 그 사랑의 열망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바르게 깨닫는 다면 난 이 순간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온당할까? 주님이 부활하신 이 날에 내가 답하여야 할 것이다.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우리와 같이 시험 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우리처럼 시험을 당하셨으나 오히려 그 시험을 통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순종을 이룸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셨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로 오셨고, 이 땅에서 진실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심으로 그 지위를 가지심이 실로 공정하고 공평하며 하나님을 진실로 기쁘시게 하실 자이심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제 주님이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
그 옛날 구약의 제사에서 백성들의 죄를 전가시킨 그 짐승은 피를 제사장에게 돌린 후에 그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사르게 했다. 이제 참된 희생의 제물이신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자신의 피를 드린 후에 그 육신이 영문 밖인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자기 피로써 자신의 백성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으신 것이다.
십자가의 형벌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장 끔찍한 형벌이다. 이 형벌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훗날에 다시는 사람에게 이 같은 형벌을 가해서는 안된다하고 폐지했을까! 우리의 죄에 대한 죄 값은 이 같이 엄청난 것이다. 과연 나는 이런 정도의 값을 치러야할 죄인이었다는 자각이 있는가? 그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은 나의 구원의 주, 메시야가 되실 수 있다.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 때에 가나 혼인잔치 사건이 등장한다. 연회장에 포도주가 동이 나고 예수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예수에게 알린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이미 잉태하는 그 때에 천사가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가?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눅 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그래서 그가 능히 포도주가 부족한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포도주가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주님은 그런 그녀에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들의 그 죄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할 그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실 그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요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주님이 새로 만드신 포도주, 그것은 장차 흘리실 주님의 그 보혈을 상징하는데, 연회장의 사람들이 그 어떤 포도주의 맛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맛이라고 칭찬한다.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주님의 그 보혈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으니 그 포도주와 비교될 수 있는 포도주가 어디 이 땅에 있을 수 있을까!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이미 심문과정에서 모진 채찍으로 몸이 상하셨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는 동안 몸은 그 기력이 다하였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 차라리 빨리 숨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할 만한 순간이다. 그 때 쓸개를 탄 포도주, 그것은 마취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니, 나라면 얼른 받아 마시고 그 순간의 고통을 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 왜 그리하셨을까?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이 모든 고난의 과정이 죄인들의 죄를 온전히 담당하시려는 메시야로서의 고난이셨다. 그런 수난을 당하시는 그 과정 중에 이런 포도주를 취한다는 것은 완전한 고난의 순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이 모르실리 없지 않는가? 그러기에 그 극심한 고통이 밀려오는 순간에도 그것을 인성으로 온전히 느끼시며 고통 속에 홀로 스스로 계셨다.
이 순간, 성부 하나님은 무얼하고 계셨을까?
이는 성자 하나님만이 감당할 일이라 하고 모른 체 하셨을까?
그 순간에 성부 하나님도 모진 가슴 부여잡고 함께 그 순간을 감당하셨다.
자신의 진정한 외아들, 그리스도가 당하시는 그 고통을 지켜보고 계시는 그 아버지의 가슴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아버지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자들은 결코 알 수 있는 이 신비한 비밀!
천사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이성적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개별적 존재로 지음을 입은 고로 그들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이런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우리가 천사보다 위대하게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 긴 고통이 이제 극에 달하고 주님의 구속사역을 위한 그 순종이 마무리 되는 순간이 왔다. 그때 주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다. 그가 드디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공로를 세우셨다. 우리가 이 공로를 수납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입을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이다. 곧 ‘칭의’를 위한 그 길이 드디어 열렸다.
처음 아담이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행위언약을 맺었다. 그 언약을 순종하여 지킴으로써 인류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 복은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주님의 이 완전하신 순종으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얻었다. 믿음으로 그의 공로를 수납하면 다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누리는 구원의 복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살리실 그 구원 사역에 여전히 온 힘을 쏟아 붙고 계신다. 그 구원사역의 간절함이 ‘목마르다’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었다. 죽어 가시면서도 우리를 구원코자 하시는 그 간절함의 목마름을 주님 외에 누가 알 수 있을까!
구원을 얻을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주님이 스스로 세우신 그 공로를 제일 먼저 우리를 대표해서 그것을 취하셨다. 그는 분명히 죄 없으신 자였으나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그가 이루신 그 공로를 받아 마시셨다.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 보혈을 상징하는 그 포도주를 그가 마신 것이다. 이것이 그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한 그 순간에 받으신 그 포도주였다.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님이 신포도주를 마신 것이 단지 문자 그대로의 성경 말씀을 응하려고 그리하셨다면 그는 진정한 메시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혹시는 성경말씀을 아는 자가 주님처럼 성경말씀대로 되게 하려고 따라서 그렇게 신포도주를 마시는 흉내를 능히 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흉내를 낸다고 그가 메시야가 될 수 있을까? 주님이 성경의 말씀에 응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대한 깊이 있는 의미를 담고 하신 그 행동이시고 그 행동들은 자신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증명을 하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시 2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주님이 마지막으로 그 신포도주를 취하신 것은 십자가의 그 공로 세우심으로 획득하신 그 주님의 의를 인간 예수가 둘째 아담으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처음 취하신 모범이었다. 이는 ‘칭의’를 위해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그 공로를 ‘칭의’를 위한 기구적 원인으로 취하신 바로 그 모범이셨다. 이제 우리가 믿음의 백성된 것은 주님의 그 보혈, 주님이 마신 그 신포도주를 우리가 함께 마신 그 이유 때문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신포도주를 함께 마신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고.
(히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히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이제 우리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주님의 그 치욕을 내 것으로 삼아 우리 스스로 영문 밖으로 걸어 나가자. 이는 장차 올 것으로 바라는 그 천국을 소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획득하신 그 보혈과 부활의 은혜를 누린 우리가 이제는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감사를 담아 계속할 우리의 의무이다.
모든 일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전진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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