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링크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산상수훈-팔복(1)

by 영동장로교회 2020. 3. 29.

2020. 3. 29.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팔 복(1)”

- 복이 있나니

 

주님이 갈릴리 호숫가의 산에서 말씀하신 이것을 가리켜 흔히 산상수훈이라 하고, 여덟 가지의 복 즉 팔복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주님은 왜 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여덟 가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을까?

 

성경의 기록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비밀을 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단지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진 그대로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고 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주님의 이 팔복에 대한 말씀도 단지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해서만 기록한 것이란 그런 정도로만 생각해버린다면 우리의 그 구원에 대한 주님의 깊으신 의도를 바르게 이해한다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 팔복을 살펴보면 그 시작이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에 대한 변화에서부터 시작하고 있고 종국에는 그 변화가 나의 외면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대한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이전의 나는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가? 주님의 도우심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나의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이 땅을 살아가려고 한 자가 아니었던가? 나의 이웃에 대해 그들도 나와 같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들어설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 주여 저를 버리지 마시고 나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게 하여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그 가난한 마음의 진실한 드러냄이다. 나는 오직 죄인이오니 나의 능력으로는 전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오직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그 고백, 그것이 가난한 마음이다. 그 마음이라야만 주님의 그 사랑이 담겨질 수 있다. 주께서 네 원수들조차 사랑하라하신 것은 바로 이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신 명령이셨다.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온전히 죄인이어서 나의 마음을 완전히 비어 내어 놓을 때 비로소 주님은 그곳에 좌정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 같이 온전히 빈 마음, 즉 완전히 가난한 마음이 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은혜로 오직 중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 그것이 가난한 마음이다. 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변화로부터 나의 구원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그 일은 나의 내면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다. 주님의 제자들은 깊은 그 내면적 변화뿐만 아니라 이 외면적 변화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주께서 택하신 자들을 향한 그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꺼이 박해를 당하는 그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하신 대로 로마에서 그들의 양들을 지키기 위해 사역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하였다 한다. 그는 진실로 주님의 그 말씀 따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복 있는 자가 되었다. 분명 그는 천국을 자신의 소유로 인정받은 자가 되었으리라. 천국을 자신의 소유로 삼은 자를 어찌 복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이 말씀하신 이 팔복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어난 변화, 중생함으로써 일어나는 그 첫 번째의 변화된 나의 모습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복은 주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주님의 의를 실천하는 나의 모습, 성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과정들이 지나가면 드디어 우리는 영화된 단계, 즉 나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영화 구원의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는 천국을 나의 소유로 인정받는, 실로 복된 자의 자리에 서는 그 순간이다.

 

따라서 이 팔복이란 주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의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의 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롭게 된 나의 새롭게 시작된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이 팔복을 여덟 가지로 드러내어 말씀해 주시고 있다.

 

통상 성경에서는 팔이란 숫자는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그 숫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으니 그 다음 날이란 완전한 새로움이 시작되는 그 날인 것이다.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그 후손들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다. 이는 이전에 죄의 몸이었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이 주어졌고, 그 날에 그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는 징표였다.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17: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7: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 위대한 사역을 이루시고 무덤에 머무시다가 부활하신 그 날이 바로 안식일 다음날, 즉 여덟 번째에 해당하는 그 날이었다. 그 날에 우리는 드디어 구원받은 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매 주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일 날 우리는 주님께 예배함으로써 한 주를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28: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주님이 부활하신 날은 우리의 삶이 온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바로 그 날이다. 주님이 산상수훈을 강론하실 때 이 여덟 가지를 말씀하심으로 이는 온전히 거듭남을 입은 자의 그 삶이 마땅히 어떠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이셨던 것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일, 그것은 바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함이니, 이 땅에서 가장 복된 자라는 것은 바로 이 구원의 은혜를 얻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얻은 자들은 주님의 이 가르침대로의 그런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 같은 삶을 사는 것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내가 구원을 위한 어떤 의를 이루어 가는, 즉 나의 공로를 이루어감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그 은혜에 보답하는, 단지 나의 그 의무를 이행하는 그 삶인 것뿐이다.

 

오늘도 주님은 내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그러면 나는 과연 내 이웃을 위해 진실로 가난한 마음이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