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기 시작한 후에 가지는 질문 중의 하나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믿음의 생활 속에로 걸어간 자는 아무도 없다. 어느 순간엔가 내가 내 발로 걸어서 스스로 교회의 문을 들어섰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내 스스로 걸어간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고, 그 어느 순간에 성령이 나를 이끄신 것이다. 교회로 발을 들여놓고 싶은 욕망, 그것은 그 순간에 성령이 내게 역사하신 순간이다. 이런 경우 외에는 전부 누군가의 권유로 내가 동의하고 교회로 간 것일 것이다. 이 경우들은 더더욱 내가 스스로 믿음을 선택해서 교회로 간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순간에 성령의 인도함을 내가 받은 것이다. 믿음의 생활을 처음 시작한 초보 신앙인일 경우에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 일들이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쌓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쯤에서는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그 깊으신 사랑에 온전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의 삶이 될까 하는 물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기를 원하실까?
어떤 이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이런 모양으로 또는 저런 모양으로 많은 요구를 한다고 느껴 적당한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 매일 성경 모임이든지, 예배 모임이든지 또는 친교 모임 등등으로 개인의 자유를 너무 구속한다고 느끼며, 이런 것들을 일종의 간섭받는 일로 여긴다. 그래서 비교적 작은 교회 보다는 규모가 커서 누가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교회를 택해서 적당히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여 교회의 모든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자가 있다. 이런 자들 중에는 자신의 개인적 삶조차도 내버려두고 교회 제일우선주의의 삶을 산다. 그래서 주부일 경우 가정을 돌보는 것보다 교회를 우선하기에 아이들의 뒷바라지는 접어두고 교회 일에 매달린다. 심한 경우는 아이들이 등교하는 일, 다녀와서는 식사를 챙겨주는 일조차도 교회 일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래서 가정불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과연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그런 정도의 믿음 생활을 주님은 인정하실까?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이다. 세상의 조직과 사람의 인연에 관계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의 생활에서 제일 되는 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그에게 있어서 제일 되는 일이어야만 한다. 주님의 가르침에서 이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는 이 마음은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는 그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믿는 자의 태도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와 같아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일까?
주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이 답을 우리에게 주셨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기 필요한 능력과 재능을 주실 때 우리의 필요에 합당하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람도 없이 꼭 우리에게 맞도록 그렇게 주셨다. 따라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는 그 일에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달란트 한도 내에서의 다함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의 그 ‘다함’과 같은 정도의 ‘다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무한대의 ‘다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또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달란트의 그 다함 정도로 적당히 ‘다함’을 하는 그런 다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각자의 달란트대로의 ‘다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각기 그 받은 달란트대로 노력을 하여 결과를 이루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주인은 그것에 대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한 글자의 다름도 없이 똑 같게 칭찬을 했다.
이는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김이 그의 최선의 노력이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도 그의 최선이었다는 표현이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려는 것은 그의 최선이 아니라 과욕이 될 수 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태도에 대한 기준 설정에 중요한 표준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분별하고 과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그런 생활을 할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이가 그 한 달란트를 땅에 숨겨둔 것은 믿음의 백성된 자가 그 믿음의 생활을 적당히 한 그것을 보여주는 예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종에 대해서는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질책했다. 그리고 쫓겨남을 입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말한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두 달란트 받은 이가 두 달란트를 남긴 것을 주인이 칭찬한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수준을 원하시는가를 알게 해준다. 두 달란트 받은 이에게 두 달란트를 요구하심이니 이는 그에게 적당히 믿음 생활을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힘써 최선을 다해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기준을 결코 낮추시지 않는다. 우리와 적당히 타협해서 적당한 수준으로 해도 좋다고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요구하심이다.
신앙은 그 요소로 ‘지식’과 ‘찬동’과‘ 신뢰’를 가진다. 이 중의 한 가지 요소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그 신앙은 자신을 구원하는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한다. ‘지식’이라 하면 세상적인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그 지식을 의미한다. 호세아 선지자의 글에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고 하였다. 이 망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을 당하는 그 일이니, 곧 구원의 그 소망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호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따라서 마땅히 믿음의 백성된 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하는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의 첫 번째 일이다. 이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어떤 일을 우선하는 것은 자칫 신앙이 방종으로 흐르게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혹시 이단으로 빠지거나 시험을 당하는 일은 이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함에서 오는 결과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면 이 지식하는 일도 어느 정도 해야 할까?
이 기준도 주님이 주신 달란트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다섯 달란트를 감당할만한 수준에 있는 자는 그 수준까지의 지식을 추구해야할 의무가 주어지고, 두 달란트가 주어진 자는 두 달란트 수준까지의 지식을 추구해야 되며, 한 달란트의 수준에 있는 자는 그 한 달란트의 수준에 이를 것이 요구 된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가 한 달란트의 수준 정도의 지식 추구에 그친다면 그는 대단히 게으른 종이라 질책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그 구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이 ‘지식함’은 하나님을 아는 깨달음을 결과할 것이다. 알게 되면 아는 대로의 행함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이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행함을 이루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의 부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의 풍요함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인도하게 된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주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에 대한 바른 지식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밝히셨다. 그의 가르침은 참된 사랑의 실천에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사랑을 베품이 바로 ‘온전함’이었다. 이 온전함은 곧 하나님을 닮음이었다. 하나님은 그 믿는 자에게 이 같이 ‘온전’하라고 요구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곧 주님을 온전하게 닮아가는 그 일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분명해졌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그 일이 바로 주님을 닮아가는 그 일이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이 등교했는지, 귀가 했는지 보다 교회 일을 우선하는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그 일인지, 적당히 사람들과 관계하지 않으면서 주일 예배만 드리는 그 일이 또한 주님을 닮아가는 그 일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바리새인들은 이 지식함에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모세가 가르친 그 율법을 바르게 지식하지 못했다. 온전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주님이 병자를 고치신 일 등등에 대해 고발하려는 짓을 감행했다.
(마 12: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마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마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병자를 고치려는 것은 지극한 사랑의 행위였다. 모세가 분명히 율법을 가르칠 때 문자적 율법 이면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따라오는 바로 그 행위이며, 사람에 관한 율법도 그 이면에는 그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지식함에서 바르지 못하였고 지극한 오해를 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식함에 대한 게으름이었다. 이런 게으름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레 19:11)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레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레 19: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레 19: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신 1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신 11:2)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신 11:3)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신 11:4)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신 11:5)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신 11:6)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주님을 닮아가는 이 일이 하늘의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 일 외에는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길은 없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이 선언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많은 착각을 한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면서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었노라고. 그래서 주님은 이미 이런 자들을 향해 경고하셨다. 그런 자들이 심판의 날에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자들을 주님은 외면하시겠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신앙에는 ‘지식’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절제를 가능하게 하며 바른 믿음의 생활로 인도하게 할 것이다. 바른 신앙의 태도를 갖는 것은 또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된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달란트 한도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의 절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대한의 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그 일이 내게 결코 무거운 짐이 되는 일이 아니다. 부지런히 행하면 이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모세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르치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 율법을 배우며 지켜내는 일, 이것은 신앙의 지식하는 그 일이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 일이 결단코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일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하신다. 모세는 그것을 그 땅의 복으로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복은 구원의 복,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에서의 복된 삶으로 주어지는 그 구원의 복을 이름이다. 믿음이 어린 그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이러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신 30: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30: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신 30: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신 30: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신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모세가 그 어린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던 이스라엘에게 용기를 주며 가르쳤듯이 주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계신다. 지극히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우리를 ‘지혜로운 자’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계신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지혜로운 자”라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주님의 뜻대로 이 같은 지혜가 믿음의 백성들 모두에게 충만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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