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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6.
“선한 사마리아인”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살리시기 위함이셨다.
이 땅의 많은 족속들 중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족속들이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이 다른 어떤 족속들보다 나음이 있어서 부르신 것일까?
그들 역시 다른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일 뿐이다. 그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그렇게 하셨을 뿐이다. 주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 이스라엘 가운데 오신 것은 그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이스라엘, 그 중에서 다윗의 가문을 통해 오실 것이란 예언의 성취이셨다. 그 예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셨고, 주님이 그 땅에 나신 것도 그들을 사랑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판단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그들을 살리려고 오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통해 주님이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른 깨달음을 얻어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에 이르게 하려하심이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을 바른 구원에 이르게 하려하신 것이었다.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란 모세 오경에 정통한 자란 의미이다. 모세 오경에 정통하다는 것은 모세가 가르친 그 율법에 대해 매우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자란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전하여준 계명을 그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그 후손인 이 율법사도 여느 율법사와 마찬가지로 모세 오경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다고 보아진다. 그러하므로 주님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신 11: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신 11: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신 11: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신 11: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율법사가 그 글을 읽지 못할 것이라 여기시고 물으셨을까?
그는 백성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이니 그것을 읽지 못할 리는 결코 없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준행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그렇게 힘든 세월을 보내게 하셨을까? 만약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그 땅에서 얼마든지 잘 살게 버려두셨을 것이다. 한 때 애굽이 강성한 나라로 그 땅에서 잘 살았고, 앗수르가 강대한 나라로 그 땅에서 패권을 장악한 것처럼 그 백성 이스라엘도 그 같이 잘 살게 버려두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기에 그렇게 버려두실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런 고난을 그 백성들이 당할 때에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까? 결코 그런 적은 없었다. 외형상으로는 분명히 그들은 모세의 가르침대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호 6: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마 9:13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12:7 )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의 그런 행위들은 포로 생활이 끝나고 귀환한 후에도 여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그런 위선적 신앙생활의 모습을 꾸짖었다.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 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말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세월이 많이 흐른 이 순간에도 그들의 행위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패역한 족속들을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부정한 모든 것을 정결케 하실 것이란 것도 예언하여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렸다면 그들의 행위가 이 같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어찌할까! 우리의 행실이 그 어리석은 이스라엘과 하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말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주님의 율법사에 대한 물음은 바로 그런 깨달음이 네게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가 명한 그 율법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네가 행하고 있느냐는 물음이셨다.
율법사는 아무 이름도 없는 이 시골 청년 예수가 “모세오경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아는 지식으로 그를 많은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게 해주어야 하겠다.“고 작심하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질문에 당당하게 내가 가르쳐줄까하는 의도로 답을 했다.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의 답변은 신명기와 레위기에 있는 내용이니 내가 이 같이 잘 안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예수가 기가 죽어 민망해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네 대답이 옳다“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예수님 자신이 당시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하던 그 주님, 메시아라는 것을 스스로 선언하신 것이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주님은 그들이 구한 바로 그 주님이셨던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의 그 예언대로 주님은 홀연히 그 전에 임하신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을 안다하는 자들 중에 누가 그 청년 예수가 그들이 고대하던 그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던가!
그래서 주님은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홀연히‘ 임하셨는데, ’그 전에 임하심‘은 주님이야말로 그 땅의 죄인들의 죄를 단번에 온전하게 해결하실 참된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이다. 그 율법사는 그 땅의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자로써 그는 그들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장님이었던 것이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율법사는 당당히 주님 앞에 서서 질문했다.
그 자신이 용서 받을 길이 없는 죄인이고 앞에 계신 주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실 자라는 것을 바르게 볼 수 있었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었을까! 말라기 선지자의 그 말씀처럼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리석은 율법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야말로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자라고 그렇게 자랑하듯 주님 앞에 당당히 서서 주님과 변론해 보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리석고 부끄러운 모습의 율법사가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다.
(말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대답은 그 율법사가 진실로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외형상의 그 모습은 옳게 보이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외형상으로만 흉내 내어 지킨 것과 같이 이 율법사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과연 이 율법사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라도 율법에 대한 온전한 준수가 불가하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가능하니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그 주권적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사모해야 할 것에 대한 교훈을 담으신 것이다.
그리고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신 말씀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택함을 입은 자들로써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할 의무에 관한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전하게 순종한 자들에게 예비하신 선물로서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영생을 허락하실 자들이라는 증거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자에 대해 영생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아무리 위대한 종교지도자라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스스로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에 의지하여 영생을 얻는다고 말할 뿐이다. 오직 하나님이신 주님만이 스스로 영생을 약속할 수 있다.
따라서 ‘살리라’고 한 이 말씀은 지금 이 말씀을 하시고 있는 예수가 구원자이신 ‘메시아’라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율법사는 이 순간 이 청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린 구원자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마리아인이 자신들의 이웃이요 사랑하여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된 이웃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리석은 이 율법사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것이 무산되자 다시 다른 질문을 내어놓는다. 아마 이 율법사는 이웃사랑이라는 이 이야기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이웃’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같은 동족이거나 종교적 동질감을 지닌 자들로 한정해서 생각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은 이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서는 사랑을 베풀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랑의 손을 내밀지 못하고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는 냉담한 것이 이 율법사와 같다. 잘못되었거나 다른 신앙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들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연민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잘못된 신앙이 저주받을 대상이고 그런 저주받을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들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그들이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거리상으로 36km정도이고 가파르며 양쪽으로 바위가 많아 예전부터 강도들이 많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익히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주님이 예화로 채용하기에 적합하셨을 것이다.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무시한 채 그 외형만 따른 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 담겨져 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미 죽은 자를 만져 스스로 더럽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죽음이란 인간의 본원적인 죄로 인한 것이기에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은 영적인 오염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는 지극히 경계해야할 영적 금기사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화에서 언급된 제사장의 행위는 그런 영적인 의미보다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외형적인 준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영적인 의미를 지키려는 것이기보다는 그 중심에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결여로 인한 무시행위였다.
죽은 것처럼 보인 그 사람을 살펴보고 후속 조치를 취해주어야 하는 일이 그 제사장에게는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귀찮은 일 후에 그에게 돌아올 이익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한 그 제사장은 그 현장을 외면하고 떠난 것이다.
가장 큰 사랑을 베풀어야 할 자리에 있는 그가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던 결과로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이는 신앙인의 타성이다. 우리 역시 믿음의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모습을 문득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신앙적 타성을 벗어버리고 주님 안에서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하지 않을까?
(레 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레 21:2)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레 21:3)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 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레위인도 제사장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레위인은 제사장보다 지위는 낮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깨달아 실천해야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명령을 가장 성실히 준행해야할 그들이 그 계명을 저버린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레위인은 위선의 가면을 쓴 자였다. 오랫동안 그런 자리에 있었으니 어느 순간에 그는 참된 레위인의 자리에서 떠나버린 것이었다. 우리도 능히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늘 깨어있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순간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면 어떨까?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그 사마리아인을 주님이 선한 행위를 한 자로 등장시킨 것은 왜일까? 사마리아인들이 그와 같이 모두 선해서일까?
사마리아인들은 북쪽 이스라엘의 후예들이다. 북쪽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 갈라진 나라이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라가 둘로 갈라진 후에 북쪽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명의 왕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잔인한 족속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들의 혼혈 정책으로 태어난 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다. 혈통의 순수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저주를 받을 족속들인 셈이다. 그래서 이방인들보다도 천대했던 자들이다.
그런 사마리아인을 제사장이나 레위인들 보다 거룩한 자로 등장시킨 것은 신앙적인 우월감을 가진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성질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그 우월감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할 자의 자리에 서게 했다. 주님은 그런 그들조차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막은 헬라어로 ‘판도케이온’인데 ‘모든’을 뜻하는 ‘파스’와 ‘영접하다’는 뜻인 ‘데코마이’의 합성어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을 영접하는 곳인 교회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그 강도만난 자, 어쩌면 그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들을 살릴 수 있는 곳은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시니, 교회에 온다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인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 영생을 얻게 된 곳이다.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으로 충만한 자의 인도를 얻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곳이다.
우리는 그 사마리아인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런 사람이 될 때 우리를 통해 많은 자들이 교회로 인도함을 받고 또한 우리와 같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주님의 물으심에 끝내 “사마리아인이니이다”라고 답하지 않는 율법사, 그는 끝내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속내를 내보이고 있다. 이런 그가 처음 질문한 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될까?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그 유대인들을 살리시려고 주님이 그 땅에 오셨지만 정작 그들의 눈은 어둡고 귀가 멀어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 오늘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교회로 간다. 그러나 정작 이 율법사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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