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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by 영동장로교회 2019. 5. 5.

https://drive.google.com/file/d/1LR1BhTHC9f-owgOP8oJygicKD3BvWqso/view?usp=sharing

2019. 5. 5.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이 믿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기다린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길 수 있을까?

욥이 고백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다.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니 우리가 지닌 것 중에 실로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있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오랫동안 인내한 그것도 결국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의로 여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로 주신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인정해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자신은 그의 종이 되는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하는 스스로 주인 된 자였다. 그는 그 땅의 족장이었다. 족장은 주인 중의 주인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 섰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시인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스스로 종이라 한 것이다.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18: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어쩌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이후의 삶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종으로 거듭나는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완전한 종이었음을 고백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것이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일도 있을 수 없다는 그런 고백이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온전한 순종이었다. 순종이란 종된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니던가!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그 아들 이삭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에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히 종으로서 할 도리라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종이라는 고백을 완성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신 것이다.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종은 그 주인의 생각대로 믿고 행하면 되는 자이다. 그것이 왜 그러냐고 따질 권한이 그에게 없다. 오직 그 주인의 의지를 믿으면 되는 것이다. 종이 주인의 뜻에 따라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의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할 바를 한 것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종은 그 주인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이루어질까, 문제는 없을까 하는 등의 염려를 자신이 할 이유가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기업의 약속에 대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라 하신대로 묵묵히 나아갔다. 가장 모범적인 종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저런 이유를 달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였을 것이다.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이 땅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족속으로 선택함을 입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며 충성을 다할 대표적인 종이라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할 처지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구해 내어주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다하는 대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의 자리에 섰다. 자신들이 스스로 주인처럼 행세한 것이다. 그들이 광야를 떠돌아야 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닥친 고난들은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그들이 한 지도자를 새로 세우자 한 것은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 되고자 한 것이었다.

(1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14: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우리도 왕이 있어야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진실한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그 자리를 버리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자 한 가장 교만한 자들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으로서의 삶은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을 자리에 서는 일이지만 스스로 주인되어 높아지고자 한 그 결정은 결국 망하는 자의 자리에 앉은 것이 되고 말았다. 왕이 다스리게 된 그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와 베벨론에 의해 망하고 마는 결과를 역사에 남겼다.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종이 그 상전에 속한 집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공로가 되는 것이 있는가? 그가 주어진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가 마땅히 할 것을 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맡겼다고 했다. 그 주인이 언제 올지는 알지 못했다. 그 종들은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대로 최선을 다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것이 그들에게 공로가 될 수는 없다. 오직 종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였다. 주인이 왜 빨리 돌아오지 않느냐고 불평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들에게 주어진 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결국 주인은 돌아왔다. 그리고 묵묵히 최선을 다한 그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다. 받은 다섯 달란트로 열심히 노력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은 백 퍼센트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더 많은 것으로 맡기겠고 또 주인의 즐거움에도 참여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자의 변명 속에는 참된 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자기가 주인인양 주인의 뜻을 자가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었다.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질책하고 그를 버렸다. 오늘 우리도 이런 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고 있다면 분명 하나님의 버리움을 당하고 말 것이다.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모리아 산에 서 있는 그 순간의 아브라함은 다섯 달란트를 맡은 그런 종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 순간의 모습이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그 종이 칭찬 받는 그 때의 모습이었다.

 

묵묵히 하나님이 명하신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가는 것이 부름 받은 자의 삶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그가 평생에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질 것이란 희망이 생긴 그 때의 그 기쁨을 누가 알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그가 그 순간에 지니고 있던 그 기득권을 한 순간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을까? 그는 그 땅의 족장이었으니 부와 권세를 지니고 있었고 편안한 여생을 즐기며 보낼 수 있는 그런 자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평생에 부러움인 아들을 얻는 다는 것에 대한 약속,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는 그 약속을 믿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자신의 아내의 경수가 끊어지는 날이 오도록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그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라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를 통해 아들을 얻게 하실 그 약속은 이제 물 건너갔구나. 이제 달리 방도를 강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그렇게 노력하며 기다렸는데 왜 하나님은 아직도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지 않으시는가? 그 약속을 믿은 내가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잊으신 것일까?

그래서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거나 그 일을 포기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내가 이 일을 포기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해버린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언제 돌아오는지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약속을 기다리다 지친 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언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스스로 이정도의 시간이면 약속하신 그 기다림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직 그의 욕심으로 인해 생긴 결과일 뿐이었다.

 

이제는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은 그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기한의 약속을 주셨다.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그 때 오셔서 내년 이 맘 때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인간의 경험으로는 경수가 끊어지면 임신이 불가능한데, 그제서야 임신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니 이것을 믿을 수 있었을까?

(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8: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우리라면 이 말씀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잘못 이해하여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보려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의의 발동이다. 이는 지극히 교만한 일이다. 하나님 보다는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된다. 사라의 몸종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으려고 한 일은 아브라함의 가장 심각한 교만의 행위였다. 그 순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어야만 했다. 아브라함의 그런 행동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맡은 일에 충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참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