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다메섹의 부르심과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2부)”
― 광야에서 깨어난 한 영혼의 이야기
Ⅴ. 아라비아의 세 해 — 사랑으로 다시 배우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곧장 사도로 세우지 않으셨다. 그를 광야로 불러내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광야로 부르신 것처럼. 아라비아 광야의 뜨거운 바람과 침묵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쌓은 모든 신학과 확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모세가 전하여준 그 율법을 읽고 묵상하기를 거듭했다. 소가 여물을 삼키고 그것을 되새김질하듯이 그렇게 율법을 씹고 또 씹었다. 그곳에서 그는 말씀 없는 침묵의 설교를 들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머릿속에 채워진 율법의 문자를 풀어헤치시고 그의 마음을 녹이셔서 복음의 정수인 사랑으로 채우셨다.
이전까지는 문자로만 인식하던 그의 신앙이었다. 모세가 가르쳐준 문자 그대로 따라 실천하는 삶이 그를 지배해 왔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그 문자대로 안식일에는 죽어가는 이웃이 있어도 내버려 두는 일에도 개의치 않았다.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마 12: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마 12: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마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마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면 규례에 어긋난다고 비난하는 그 무리 중에 바울도 하나가 된 삶을 살았다. 그런 바울이 아라비아의 그 광야에서 율법의 문장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그 속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눈물이 보였다.
그의 손에 쥐고 있던 유대교적 ‘정의’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드디어 이해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을 강제로 바꾸지 않으신다는 것과 기다리신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또 하나의 진실인, 모세가 가르쳐준 그 율법이 다름 아닌 주님의 그 가르침이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깨달았다. 모세가 가르쳐준 그 많은 가르침 속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한마디를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그것을 그 많은 문자 중의 하나로만 여겼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랬으니 잠자고 있는 영혼의 상태에서는 그 말씀이 귀하게 다가올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이제 새롭게 거듭난 영혼의 눈으로 다시 모세의 율법을 살폈을 때, 그 모든 말씀의 중심에 이 말씀이 있었음이 비로소 보이게 된 것이었으리라. 그 3년은 고독이었지만, 그 고독 속에서 그는 비로소 주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배웠다.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런데 바울이 아비아의 광야로 간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참조: 그가 간 곳이 아라비아라고 했는데, 이 아라비아가 고대 로마 시대의 프로빈스 경계나 나바테아 왕국 영역 어디였을 것이다.
바울 시대의 “아라비아”라는 지명이 뜻하던 지역 범위는 고대 로마 시대와 1세기 유대/헬라인들의 지리 인식에서 “아라비아(Ἀραβία / Arabia)”는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한 지역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중동 광야 내지 사막 지대”라 부르는 훨씬 넓은 땅을 포함하고 있었다.
고대 “아라비아”는 북쪽으로는 시리아 사막과 접했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의 깊은 남부까지, 동서로는 홍해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대평원·광야 지대를 아우르기도 했다.
따라서 “아라비아 = 사우디아라비아 전체”라고 단순 동일시하는 것은 고대의 지리 감각을 오도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면 바울이 갔던 ‘아라비아’라는 곳의 유력 후보는 Nabatea / Arabia Petraea일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언급한 “아라비아”는 현대 사우디 남부나 극남부 지역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시리아 동남부와 인접한 북서 아라비아, 곧 나바테아 왕국 / Arabia Petraea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그 중심지는 흔히 옛날 도읍지인 Petra (오늘날의 요르단 남서부-요르단 남부) 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르심을 입고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면 다메섹으로 가던 그 중도에서 가장 근접한 지역이 이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은 당시 로마 제국과 이웃한 경계 지역이었고, 바울이 머물기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이었으며, 여러 학자들은 그가 이곳에서 “영적 재교육, 복음 성찰, 초기 사역 준비”를 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래서 바울의 아라비아 = 나바테아 / Arabia Petraea 지역이란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 혹시 “사우디아라비아 = 바울의 아라비아”로 생각한다면 당시 지리 인식을 반영하지 않은 현대식 오해가 될 것이다.
고대 “아라비아”라는 말은 훨씬 넓은 사막 지대 전체를 가리켰고, 로마 시대 사람들은 오늘의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요르단 남부, 시리아 사막, 팔레스타인 사막 등을 모두 ‘아라비아’에 포함시켰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고 아라비아 광야로 돌렸다. 지금까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해 왔던 믿음, 그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렸으니 그 엄청난 충격에 걸음인들 제대로 걸을 수 있었을까!
끊임없는 질문이 솟아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졌고 매 순간 성령께서는 그에게 생수와 같은 답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더라면 그 질문과 답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그는 믿음의 사생아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황홀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었을까! 그 기쁨이 바울을 아비야 광야에서 삼 년을 버티게 해준 만나였다. 그 광야는 로마 제국의 변방이니, 세속적 권세와 유대 중심 공동체로부터 간섭없이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기에는 더 없이 천국이었다.
아라비아 광야는 어쩌면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과 같이 바울 역시 그런 은혜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주님이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 광야로 가신 것처럼 그렇게 바울도 자신에게 주어질 그 위대한 사역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가 그 사실을 온전히 알았을까?
우리의 가는 길은 우리도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주어진 길을 보이는 만큼만 걷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남은 길을 예비하시고 당신의 뜻에 따라 그 길을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이다. 바울이 그곳에서 삼 년을 보낸 것은 하나님의 이 견인하시는 은혜에 따름이었다.
바울은 자기를 사도라 주장했다. 사도라 칭함을 받은 자는 주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임받은 자로서 교회의 기초를 세운 자를 말한다. 베드로를 위시한 열두 명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삼 년 동안 함께하며 직접 복음의 가르침을 배웠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시한 주님의 제자들을 사도라 한다.(다만 가롯 유다는 훗날 이 숫자에서 제외되었다. 성경에는 이들 외에 바나바와 같이 사도라 칭함을 받은 이도 있지만, 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래서 열두제자는 특별히 기초적 사도라고 할 것이다. 정경이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사도는 없다.)
(행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그런데 바울은 주님의 직접적인 제자도 아닌데, 자신을 가리켜 사도라고 주장한다.
왜 그는 굳이 “나는 사도다”라고 주장했을까? 회심하기 전, 유대교에 열심을 지녔을 때는 권세도 누렸고 세상의 부도 지녔던 그였는데, 지금에 와서 세상적인 어떤 욕심을 탐함 때문이었을까?
그가 사도라고 주장한 것은 그의 거룩한 욕심의 발로였다. 그 욕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충직한 종으로서의 몸부림이었다. 그가 아라비아 광야에서 해묵은 율법을 벗어버리고 그 율법이 주님의 복음에 대한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죽음에서 부활로 새롭게 거듭났다.
그래서 사도라고 주장한 것은 그 순간 그가 누렸던 그 기쁨을 택하심을 입은 자들과 함께 나누려 함이었다. 그것이 그의 욕심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깨달은 그 복음이 사람인 자신, 즉 바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사람에게서 난 복음이라면 그것은 참 복음이 될 수 있겠는가! 참 복음이 아닌데, 그것이 어떻게 믿음의 백성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복음을 변호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만일 베드로에게서 배웠다고 한다면 그는 사도라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 중의 누구에게서라도 배웠다면 그 복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복음을 전했기에 그들은 분명히 사도였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께 직접 복음을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러하기에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직후에 바로 베드로와 같은 주님의 제자들을 곧바로 만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외로이 걸어갔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그는 깊은 묵상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그 성령은 주님이 보내신 성령이니, 곧 주님의 음성이다. 그러니 그가 삼 년 동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음이 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사도됨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물이 될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그의 사도됨을 주장한 것은 복음의 근원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다. 광야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율법이 다름 아닌 주님의 그 가르침에 대한 또 다른 한 표현이었음을 온전히 알았으니, 그가 깨달은 복음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그 복음과 한 점이라도 다름이 없는 그 복음이지 않은가!
그 깨달음을 얻는데 삼 년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직접 배운 그 삼 년과 묘하게 겹치고 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또한 그가 사도됨에 대한 한 증거로 작용할 수 있었다.
(갈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가 깨달은 이 복음의 가치가 그에게서는 얼마나 컸을까! 유대교의 율법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기에 율법이 아닌 예수를 믿는 이교도들을 섬멸하려고 그 먼 다메섹으로까지 쫓아갔던 바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율법의 진정한 본체가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그 복음이 그에게는 얼마나 소중했을까!
그 소중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교 활동을 공적으로 확정해주는 그 일이 무엇보다도 더 시급했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그 일은 사도에게만 주어지는 권위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도임을 그렇게도 강조하여 증거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처음에는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다. 어찌 그러지 아니할 수 있었겠는가!
(행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행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그러나 주님이 직접 바울을 이방 선교의 사도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권위는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된 일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진정한 사도의 반열에 설 수가 있었다.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어쩌면 거짓 교사들이 바울은 주님이 직접 부르셔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그의 권위를 흔들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그 주장대로 따른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것은 권위를 잃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는 이 말씀은 이방인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갈라디아서의 유대주의자들, 고린도후서의 거짓 사도들, 그들은 이렇게 공격했다. “바울은 12사도 중의 하나도 아니고, 예수님도 직접 못 본 사람이다!”라고. 이는 바울의 권위를 무너뜨려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수호해야만 했다.
“내 사도권이 무너지면, 여러분의 자유도 무너진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그토록 보호하려고 애를 쓴 것은 교회 목양과 교리 판단 권위를 위해서였다. 사도권은 단지 “칭호”가 아니라, 교리를 정립하고, 교회를 세우며, 오류를 치리할 수 있는 공적 권세(ἐξουσία)였다.
바울이 말했다. “우리의 권세는 너희를 세우려고 준 것이요 허물려고 준 것이 아니니라”라고. 이는 함부로 쓸 권세가 아니라 교회를 살리고 세우려는 권세였다.
(고후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곧 성령의 계시이며, 이는 초대교회 신학에서 ‘성자의 영’, 즉 “Spirit of Christ”로 불렸다. 즉, 베드로는 지상에서 주님의 입에서 나온 복음을 배웠고, 바울은 하늘의 주님(성자의 영)으로부터 나온 복음을 배웠다. 따라서 둘 다 ‘주님께 직접 배움’을 받은 사도였다. 이 사실은 교부들도, 칼빈도, 현대 신학자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이 아비아 광야에서 삼 년을 보낸 것을 초대교회에서는 결코 우연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교부들도 이를 “주님의 3년 공생애에 상응하는 바울의 사도적 교육 기간”으로 보았다. 즉, 성령께 3년을 배웠다는 사실은 지상에서 3년을 주님께 배운 제자들과의 ‘사도적 대칭성’을 만들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바울이 사도로 자처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바울이 사도됨을 의심치 않는다. 바울을 사도 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거듭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이 증명된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이 은혜가 족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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