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축제가 아닌 고백으로서의 성탄(1부)”
ㅡ 아담에게서부터 그리스도까지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진다.
알 수 없는 설레임에 모두의 가슴은 들뜨고 누군가는 기쁨의 웃음 안은 채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눈이라도 내리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환호한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날을 이토록 손꼽아 기다리고, 그날이 오면 이유 없이 기뻐하는 것일까?
그것은 먼 태고 때부터 기다려온 바로 그 날이, 이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깨닫기 이전에, 이미 이 기대감은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DNA처럼, 설명할 수는 없으나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말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아득히 먼 옛날, 우리의 시조 아담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으로 창조됨을 입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리고 결국은 한 창조를 이루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람인 아담의 창조였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하나님께서 이 아담의 창조하심이 지극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은 그 육일간의 창조에서 유감없이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이 한 사람 아담을 위해 수고로이 엿새 동안 그 모든 창조하시는 일을 손수 행하셨다.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니 그가 원하셨다면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지 않으셨다. 손수 그 모든 것을 지으시되 수고로이 하심으로써 시간이 요구되게 하셨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 그 어미가 몇 날 며칠 동안 수고하여 아기의 배냇저고리와 손 싸개와 발싸개를 지음과 같이 그렇게 하셨다. 어미가 태어날 아기를 위해 그리함은 아기를 향한 그 위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본뜬 일이다. 어미에게 존재한 그런 사랑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이었다. 하나님께서 손수 아담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지으신 후에 드디어 마지막으로 아담을 지으셨다.
전능자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굳이 아담을 지으실 때, 수고로이 행하셨다. 그냥 아담이 있으라 해도 되셨을 터이다. 그런데 그리하시지 아니하시고, 흙을 손수 취하시고 시간이 요구되는 그 작업을 진행하셨다. 그리하신 것은 그 아담을 지극히 귀한 존재로 여기시고 그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려 하심 때문이셨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담을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셨다. 아담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셨다면 그렇게 공을 들여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지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어서 빗는다는 것은 도공이 지극히 정성을 들여 가치 있는 도자기를 만드는 그 행위를 일컬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담을 지으심으로써 그를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이 되는 그 자리에 세우셨다.
그래서 그는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이 땅에서 왕이란 가장 존귀한 자리에 선 자가 아니던가! 귀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설 수가 없다. 미천한 종이 주인을 다스렸던가?
하나님의 이 처사, 우리를 위해 아담을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세우자 하신 이 일은 그를 가장 존귀한 자의 자리에 세우심이셨다. 그러했으니 이 일은 결국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하나님의 아담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도 같은 선언이 되었다.
참된 사랑이란 서로가 상대를 향해 진실하게 사랑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과 영원한 사랑을 나누는 그 삶을 꿈꾸셨다. 이 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절한 이 열망은 결국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아담의 배반이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는 그 장면에서는 하나님이 아니 계셨다. 사탄과 하와와 아담만이 그 장면에서 똑똑히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모르셨을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면서 또한 전지자이시다. 그가 모르실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사탄과 모의하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면 왜 아담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셨을까? 이는 하나님의 방관이시니, 아담을 지으신 자로서 아담이 죄진 그 일에 하나님도 책임이 있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니 그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신다.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이 주관하심에서 벗어나서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하도록 버려두심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랑을 이루는 그 일을 위한 조치이셨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담이 범죄 한 것은 최소한 하나님의 책임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사람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의지에 종속된다. 아담이 자의적으로 행한 그 일은 결국 하나님의 크신 그 뜻 안에 종속된다. 아담은 죄를 범하는 그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 일이었다.
그 일을 행한 당사자가 아담이니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전적으로 아담에게 지워진다. 다만 하나님은 아담이 행한 잘못된 그 일이 하나님 안에서 변하여 선한 결과로 연결되도록 의지하신다.
요나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지자의 자리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서의 그 사명을 저버리는 일을 선택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떠나기로 자기의 뜻을 세웠다.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이 일은 요나가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일로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행한 이 일을 통해 더욱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계기로 삼아주셨다. 요나는 훗날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는 선지자의 자리에 섰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아담의 이 잘못된 선택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즉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어떠한 것임과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 자리에 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사실은 훗날 예수께서 탕자의 비유를 가르쳐주심으로 드러났다. 둘째 아들이 잘못된 선택으로 탕자의 자리에서는 그 일이 없었더라면 그가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반면에 첫째 아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모범적인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었고, 그래서 진정으로 효자라 칭하는 자리에는 서지 못했다.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담이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었고,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추궁하실 때, 그때는 그가 분명히 변명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 순간까지는 그는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그 자리에 서지 못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가 추방당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둘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의 부끄러움은 벗었음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죄를 지었음으로 인한 그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 부끄러움은 자신의 노력으로 가리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그는 분명히 깨달아 알았다. 이 땅의 그 누구라도 자기의 노력으로는 그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하셨다고 성경이 말함에서 드러난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으니, 그제야 자신의 수치가 가려질 수 있었음을 경험했다. 이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자신의 향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됨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임도 깨달았다. 사실 아담은 자신이 한 행위에 따른 그 책임으로 인해 그 땅에서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으시던 그 날에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명백한 계약조건이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아담이었으니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처사에 감사했을 것이다.
그가 에덴동산에 그대로 머문다면 생명 나무의 열매도 따 먹을 것임은 분명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금지사항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아담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많은 날 동안 그 땅에서 죄를 지을 것인데, 그 죄가 얼마나 많아질까! 그 삶이 복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어쫓으시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그 길목을 지키게 하심이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죄를 가려줄 수 있는 가죽옷도 지어 입혀주셨으니, 그제야 아담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 감사와 기쁨, 그리고 자신의 지난날의 죄악 된 행위에 대해 반성을 담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 제사를 통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이 고백은 그의 사는 날 동안 계속되었다. 그의 날 수가 구백삼십 년이었다. 구는 삼의 세 배수이다. 삼이란 하나님의 숫자이니, 아담에게서의 이 삼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라는 그 고백일 것이다.
(창 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구는 이 고백의 세 번 반복이니,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진실하고 진실하나이다”라는 그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십 년은 반복해서 고백함인데, 이 고백이 완전하다는 의미로 십이라는 숫자가 달려있음이다.
이렇게 아담은 그의 평생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을 참으로 완전하고 온전하게 이루어내는 그 삶을 살았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셨다. 그것이 그의 구백삼십 세에서의 죽음이었다.
그가 그 땅을 살아가던 날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 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다. 그 가르침에 따라 그는 자기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했다.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그 아비의 마음은 그러했을지라도 아들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의 몫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항상 일대일의 관계를 보이신다. 그 아비의 믿음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들에게 같은 은혜를 주지 않으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것을 보고 아들이 “할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웃을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하나같이 하나님 아버지가 되심은 바로 이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
*성탄절 특별 설교글을 위해 지난주에 이은 2부 이야기는 다음 다음 주로 연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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