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예수의 사랑 그리고 용서에 관하여“
두 사람이 함께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 원수 사이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 살다 보면, 특히 갈등이나 감정적 상처가 누적될 경우, 어느 순간 원수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통상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질수록 감정적으로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사소한 오해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 갈등이 커질 수 있다.
특히, 서로에 대한 기대나 불만이 충족되지 않거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크게 발생하면 갈등이 심화하게 된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원수 관계로 발전하는 그 이유로는 첫 번째가 감정적 거리감과 소통 부족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간에 충분한 감정 표현하지 않거나, 대화가 부족해지면 오해가 쌓이게 된다. 이 오해가 쌓여 결국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나 분노가 형성되게 된다.
처음에는 사소한 불만이었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관계가 단절되거나 원수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원수가 됨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함 때문이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죄인이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죄인으로서의 원수 관계에 들어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니 능히 아담에 대해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했다. 아담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을 썼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일에서 실패했고 결국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함 때문에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김으로써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리고 그로 인해 죄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원수가 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 증거는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그 장면에서 분명히 보여지고 있었다.
그가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묘사 장면에서 뱀과 하와와 아담만이 등장하고 있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할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음은 하나님을 아는 그 일에 열심하지 않았음에 대한 증거가 된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는 믿는 자에게 전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이 사건은 우리도 한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일에 게으르게 되면 아담과 같은 자리에 서고 만다는 것을 매우 의미 있게 경고하는 이야기로 해석해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 반복되면, 양측 모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처들이 배신이나 불만으로 변하고, 서로를 향한 감정이 깊은 분노로 바뀔 수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주 가치관이나 인생 목표에서 차이를 보이면, 갈등은 증폭될 것이다. 특히, 중요한 문제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대립할 때,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불신과 분노가 쌓여 점점 원수 관계로 발전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후, 복수심이나 자존심이 상처받으면 갈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특히, 한쪽이 상대방을 배신했다고 느끼거나, 자존심을 크게 다친 경우, 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대개 원수가 되는 사이란 처음에는 서로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진 사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실망이 계속되면, 그 감정이 커져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게 되는 관계로 발전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원수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사소한 갈등이나 불만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적인 상처나 오해가 쌓여 단절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상호 이해와 소통이 부족할 경우,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원수 관계로 발전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종종 일어날 수 있다.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깊은 이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니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오해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고 우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한 번쯤 신앙생활에서 멀어진 경험이 있었다면 능히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자신을 점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히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원수 된 사람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상황과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몇 가지 공통적인 감정이나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먼저는 분노와 복수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 분노나 복수심을 느낀다. 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의 감정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또 다른 반응은 냉정함과 무관심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와의 관계에서 감정을 절제하거나 아예 무시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거리두기를 시도하려 함이다. 이는 자기방어의 또 다른 기제(機制, mechanism)이다.
원수 관계가 깊어지면, 상대방과의 만남이나 상호작용을 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 특히 대면 상황을 피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것이 경계와 방어이다.
결국, 이러한 반응들은 각 개인의 성격, 가치관, 원수 관계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더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또 다른 사람은 상황을 더 이성적으로 처리하려 할 수 있다.
이러한 원수 관계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유명한 사례 중 하나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두 집안 간의 깊은 갈등과 원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명문 가문인 몬태규와 캐퓰렛 가문의 자녀들로 등장한다. 이 두 가문은 오래된 원수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큰 장애물에 부딪히게 된다. 둘은 서로를 알게 되자마자 깊은 사랑에 빠지지만, 가문 간의 갈등과 원수 관계는 그들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이 이야기는 원수 관계가 어떻게 개인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를 잃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데, 이는 원수 관계가 결국 양측 모두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이와 같은 원수 관계로만 있게 된다면 그 종말은 자명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실 것이니, 이 관계를 그대로 버려두고 지켜만 보시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셨다. 우리라면 원수 같은 그들을 역겹게만 생각하고 도무지 사랑을 베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들을 용서했다. 예수가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어디에 그 근원이 있었던 것일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매단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신 사건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그리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영적 깨달음을 주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이러한 행동의 근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예수님의 힘의 근원 중 하나였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신 존재라는 깊은 인식과 그에 따르는 신념을 가지셨다.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할 자 또한 이런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셨고, 자신의 고통과 희생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아셨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었다. 사명자들은 모두 예수의 이 모범을 따라야만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길이라는 믿음이 예수로 하여금 용서의 마음을 품게 한 것이다.
(누가복음 2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그들이 제비 뽑아 그의 옷을 나누었더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신 장면이다. 예수는 그들이 자신에게 행한 악행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시며, 그들이 무지하여 잘못된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무지하여 잘못된 일을 한 그들이 예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에서 느끼셨던 그 가난한 마음이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당하고 계신 그 고통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으니,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그들을 향한 그 연민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가 가지셨던 그 무한하시고 무조건적인 사랑에서부터 기인한 그 고통이었다. 진실로 그분의 사랑과 용서는 무조건적이고 무한했다.
(마태복음 5: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과 같이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실제로 당하실 그 일에 대한 당신의 처사를 미리 예언하여 보여주심이었다. 후일에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과 용서의 실천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는 진실로 그가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이를 실천하셨다. 그의 실천은 그냥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대함을 보여주시려 함이 아니었다. 오직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 “내가 이리했으니 너도 이렇게 하여라!“라고 하는 명령하심으로서의 본이었다. 이것은 명령이었으니 어찌 사명자가 이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도 그의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거부하고, 죄로 인해 멀어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이 깊고 크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히 사명자로서의 우리가 주님에게 빚짐이었다. 우리가 빚을 졌으니 어찌 그 빚을 아니 갚겠다고 할 것인가! 사명자는 주님에게 이 빚을 진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만 한다. 적어도 사명자는 양심이 있는 자들이다. 양심이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빚으로 인식한다.
둘째로는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단지 우리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특히 원수와 같이 나쁜 대우를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예수의 사랑은 유한하고 한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사랑이었다. 예수는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그 사랑을 베풀었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베푸신 용서로 나타났다.
(누가복음 2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그들이 제비 뽑아 그의 옷을 나누었더라.
셋째로는 예수의 사명이다. 예수는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해 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으셨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단지 개인적인 고통을 감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사명이었다.
예수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최고봉이었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셨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게이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며, 그 고난을 통해 이루어질 구속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랑의 희생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이 일을 위해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셨고, 성령의 능력은 예수께서 그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께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힘이 되셨고, 예수께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극도의 사랑을 실현하신 그 일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셨다.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사명에서 나온 것으로서,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이었다. 진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심으로써, 하나님의 그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셨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한계와 감정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계셨다. 주님이 그런 사랑을 베푸실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신성에 의존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그 인성으로 하셨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만약 예수께서 오직 신성에 의지해서 그 일을 하셨다면 우리에게 모범이 되시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같이 오직 그 인성만으로 그 일을 이루셨다.
그러니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은 참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했으니 과연 스데반 집사도 예수의 그 사랑을 따라 실행할 수 있었다.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돌로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예수의 그 사랑을 참으로 정확히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사도행전 7:60)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이 말을 마치고 잠들었더라."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본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본 바울은 훗날 그 스데반 집사처럼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끝내는 자기의 목숨을 단두대에 내어놓는 그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다. 이 위대한 사랑보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사도행전 7:58) "그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치니라. 그 때에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 바울은 결국 자신의 순교를 예고하며, 그가 예수의 사랑을 따른 결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밝힌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그 사랑을 전파하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을 주님께 드리게 된다.
(디모데후서 4:6-8) "내가 이미 부어 드릴 제물을 그릇처럼 부어 드렸고, 때가 되어 가야 할 길을 끝마쳤으니 이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나를 심판하실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명자로 부름받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그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하신 것처럼, 그렇게 멋진 지도자가 또 이 땅에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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