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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고백에 관하여(1)

by 영동장로교회 2025. 3. 2.

2025. 3. 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갈라디아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고백에 관하여(1)”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은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쓴 편지인 ‘갈라디아서’에서 한 말이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 말은 무슨 뜻이며,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말은 그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앙 고백을 나타낸 중요한 구절로, 그가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 구절이 담긴 갈라디아서 서신을 바울이 쓴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서 서신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쓴 편지로, 유대주의자들(일명 ‘할례당’)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구원에 있어 율법과 할례를 강요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씌어 졌다.

 

바울은 이들 유대주의자들의 교리를 강력히 반박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다시 강조하려 했다. 그의 이 생각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와 에베소 교회에 보낸 에베소서에서도 강렬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특히 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이 서신에서는 사도 바울 자신의 신앙 고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옛 자아와 죄의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인데 즉,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아를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로운 삶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이다.

 

그가 이 서신을 쓴 목적이 특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삶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깊이 연합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고백함이다.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하여,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그 당시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에 교훈하고자 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던 시점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명확히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증언하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고 하고자 목적했다.

 

그는 이 서신중에서 특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이자 삶의 주인이시며,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하려 했던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이 가르침은 진리이니,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은 왜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그 욕망이 강했을까?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입된 유대주의자들(할례당)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유대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들이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도, 할례와 율법 준수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은 일부 갈라디아 교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믿음과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지만, 이를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부족했다. 일부는 믿음과 율법을 병행해야 한다고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구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은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데 혼란이 있었다. 이 시기의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과 율법을 혼동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서신을 작성했으니,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였다.

 

사도 바울은 이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함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을 강하게 강조하고자 했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확립하려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은혜와 구원의 길이 결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음을 명확히 설명하고자 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의도는 갈라디아서의 복음적 특징을 명확히 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욕망을 가진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정으로 올바른 구원의 길을 알기를 원했다.

 

그는 그들이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함을 얻는다"라고 명확하게 강조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왜 그렇게 구원을 얻으려고 애를 썼을까?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구원에 대한 욕망을 가졌던 이유는, 영적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그들은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들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종교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대부분 이방인들)은 영적 갈망과 죄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갈망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율법의 요구와 죄의식이 그들에게 큰 부담이었을 가능성은 크다. 구약의 율법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가르쳤지만, 이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구속을 원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개념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갈라디아의 초대 교인들도 그 믿음을 바탕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혼의 구속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욕망을 가졌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써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며, 구원의 조건이 예수 믿음뿐만 아니라 율법의 행위와 할례가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많은 경우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이방 종교나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유대교와 관련된 전통을 받아들여 신앙을 가졌다. 유대주의자들이 제시한 율법과 할례가 구원에 필요한 조건으로 강조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삶과 관련한 구원은 단지 영적인 구속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와 보장을 찾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삶의 안정감과 희망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한 삶의 상황에서 구원과 내세에 대한 확신을 원했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욕망이 강했을 수가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이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죄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이들은 믿음뿐만 아니라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이 생겼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구원을 얻는 방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과 믿음을 혼동했던 점에서 사도 바울이 교훈을 주기 위해 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온전히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전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그들의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립시켜주려고 의도한 글이 이 갈라디아서였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구원을 열망했듯이 우리 역시 구원을 소망한다. 그렇다면 왜 구원이 그토록 소망이 되는 대상이 된 것일까?

 

구원받아야만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 중 하나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단지 인간의 필요나 희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의미한다.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로 인간의 죄와 타락에 따른 필요성에서의 구원이다.

죄로 인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에서이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전락 되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래서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인간이 모두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둘째로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입장에서의 구원의 필요성이다.

죄는 단순히 도덕적 실수나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영원한 죽음이 있으며, 이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하며, 죄가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는 영원한 분리와 죽음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의 필요성이다.

구원은 단지 죄의 결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목표로 하며, 구원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구원은 단지 죄의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는 구속을 통한 자유의 획득을 위해 구원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구속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죄의 결과에서 구속받고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구속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주었다. 구원은 죄에서의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구속을 제공하셨다.

 

다섯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위한 구원의 필요성이다.

구원은 단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이는 구원의 목적이 단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여섯째는 영원한 삶의 보장에서의 구원의 필요성이다.

구원은 또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 후에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이는 지금의 삶의 고난과 시련을 넘어서는 희망을 제공하며,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상은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것으로서, 구원은 죄로 인한 영적 죽음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원이 필요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그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진 선물이며,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게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추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구원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보통 통상적으로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위에 언급한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이며 궁극적 필요성은 따로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구원의 필요성과 직결된다. 하나님은 그 속성을 사랑으로 하시기에 사랑할 대상으로서의 우리를 창조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노리개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할 대상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면 우리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불필요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실 것을 영원에서 작정하시고 천지창조의 여섯째 날에 그 작정하심대로 우리를 만드셨다. 그 표현이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것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하나님의 그 인격을 닮은 자로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만드심을 의미한다.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자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이 결정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배반할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님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시니, 그렇게 지음을 입은 인간이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을 품을 것을 왜 모르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니 우리가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는 그것을 지극히 원하셨다. 하지만 결국 만드신 그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할 자리에 설 것을 아셨기에 이미 영원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발생하셔서 그 죄인된 사람의 그 죄를 대신할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을 정하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매 그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셨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구속의 값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피 값으로 산 자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진 자들임에는 분명하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를 살리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떠나 인간 이하의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소중함과 그 사랑을 탕자는 깨달았다. 탕자가 다시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때는 집을 나가기 전과는 다르게 그 아버지와 진실한 부자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아버지는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그 아들이 방탕한 길로 들어서는 그 일을 막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때의 그 아버지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설 것을 이미 아신 하나님의 그 심정은 더 어떠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될 자리에 설 것을 아시면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그 비밀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를 통해 알게 하셨다. 그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는 성자 하나님이 시니 그제야 하나님의 그 놀라운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그 이유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그 자리에 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한 그 일차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그 복을 얻으려고 구원을 얻으려 함에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 있음이 아니었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는 가장 주된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 자리에 서려고 함이었다. 이 일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이 되나니, 그래서 우리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도 말하여질 수 있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 자리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주어지는 그것은 당연히 따라올 복이다. 이때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구원 얻을 이유가 되는 앞서 여섯 가지의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얻음으로써 주어지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러하니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 일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이 율법은 짐이 아니라 복이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로써 이 세상에서 이보다 귀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때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부족했다. 이스라엘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그 지혜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자가 부족한 것은 그때의 이스라엘이나 매 마찬가지다.

 

만약 교회를 다니는 자에게 왜 교회를 나가느냐고 묻는다면 한결같이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을 얻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랑하느냐를 깨닫는 그 일이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그것을 배우고 깨닫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깨닫는 것이 선결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맨 처음부터 가르쳤고, 주님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다. 그것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위와 마찬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 옛날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그 일을 연습했어야만 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이었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아 낮아지는 자리에 서려고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로운 자라 칭하는 자리에 올라서려고만 했다. 자신들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를 쌓고, 그 대가로 구원을 요구하는 자들이 되어갔다.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의를 더 높이는 그 일은 결국 바벨탑을 쌓는 그 일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