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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에 관하여(1)

by 영동장로교회 2025. 2. 9.

2025. 2. 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에 관하여(1)”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말씀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쓰이기는 ‘말‘의 높임말이 ’말씀‘이 아닌가?

어른이 하시는 말을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어떻게 하나님이 된다는 것인가?

 

또 그 ’말‘이라는 것이 어찌해서 인격적인 존재가 되기에 ’그‘라고 표현되어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천지창조는 분명히 하나님이 하셨노라고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해서 이 ’말‘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가? 이것으로써 성경이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 ’말씀‘이라는 것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생명이란 호흡하는 그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씀‘이라는 것 안에 무슨 호흡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들은 내가 처음으로 요한복음을 대하였던 고등학교 그 시절에 품었던 그 의문들이다. 훗날에야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단서는 바로 창세기 1장에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일을 기록하고 있다. 6일간의 창조 사역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중요한 표현이 바로 ’가라사대‘이다. 이 ’가라사대‘라는 말은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이다.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창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 1: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창 1: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 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 1: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 1: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일을 ’말씀‘으로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그 일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라고 하는 말이 등장한다. 우리라는 말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둘 이상의 인격체가 합력하여 천지를 창조하는 사역을 했다는 것이 분명히 함의되어있다.

 

성경은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드러내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하사 인격적으로 대우하심임을 드러냄이다. 만약 태양이 아침의 그 여명 단계를 거치지 아니하고 불쑥 정오의 태양처럼 그렇게 등장한다면 눈이 멀게 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 태양의 떠오름을 그렇게 정하신 것도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여 대우하시려는 그 한 배려였다. 그처럼 만약에 성경의 기록도 한순간에 그 모든 의미를 담은 것으로 시작했다면 누가 그 성경을 읽어낼 수가 있었겠는가!

 

흔히들 성경을 베스트 셀러라고 한다. 누구라도 그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기록하셨다. 얼마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말씀을 우리의 눈높이에까지 끌어내리셔서 기록하신 것인가!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의도를 아이에게 전달할 때 그 아이의 수준에 맞춘 말로써 한다. 눈높이도 맞추려고 그 아이 앞에서 무릎을 꿇어주기도 한다. 그것이 아이를 향한 사랑이다. 그렇게 참된 부모라면 그 자식을 귀하게 여겨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의 우리를 지으심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드러내어 보이려 하심은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인격이 복수라는 것에 대한 그 진리도 그렇게 표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인격이 복수라는 것이 창세기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드디어 신약 마태복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모습으로 명료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의 삼위 되심은 과연 우리의 지혜로는 온전히 다 이해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삼위 되심을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서서히 묘사해 나가셨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과연 하나님의 삼위 되심은 우리의 지혜로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심히 어렵고, 우리의 경험을 벗어나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이 조직신학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가 난해한 부분이 삼위일체론 이라고들 한다.

 

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는 것일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 신은 오직 하나라는 말이다. 그들이 살고 있던 땅에서는 물론 그 근동에서는 모두 신이 여럿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할 때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을 섬겼다. ’바알‘은 주로 가나안 지역에서 숭배된 가나안의 풍요의 신이다.

 

’바알‘은 비, 번개, 농업의 신으로, 가나안 사람들은 이 ’바알‘을 통해 풍성한 수확과 번영을 기원했다. 이스라엘 백성도 때때로 ’바알‘ 숭배에 빠져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는 죄를 저지르게 되기도 했다. ’바알‘ 신상은 보통 소나 송아지 모양으로 형상화되었고, 때로는 인간 제물이 바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바알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 여겨지는 ’아세라‘라는 우상도 있었다. 이는 여신이었으며, 풍요, 출산, 사랑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세라‘의 숭배는 성적 의식과 관련이 있었으며, 종종 나무 기둥이나 돌기둥(아세라 기둥)으로 형상화되었고, 이 기둥들이 성전 근처에 세워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아세라‘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저버리곤 했다.

 

또 다른 우상으로는 ’몰렉‘이 있었다. ’몰렉‘은 암몬(Ammon)의 신으로, 불로 태우는 제사로 유명한 신이다. 이 신에게는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몰렉‘ 숭배에 빠지면 그들은 종종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죄를 범하였다. 성경에서는 ’‘몰렉’ 숭배가 특히 악행으로 간주되며, 이스라엘의 왕들이 ‘몰렉’ 숭배를 금지하려고 했다.

 

블레셋(Philistine) 사람들의 신으로는 ‘다곤’도 있었다. ‘다곤’은 곡물과 풍요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다곤’은 인간의 몸에 물고기 형태의 하체를 가진 신으로 묘사되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은 이 신을 주요 신으로 숭배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의 신전에서 하나님께서 ‘다곤’의 상을 넘어뜨리신 사건을 경험하는데, 이 사건은 성경에도 기록된 유명한 사건이다.

 

바벨론에서 숭배된 신으로는 ‘벨’이 있다, 토지의 신이자 풍요와 번영의 신으로 여겨졌다. 바벨론과 그 주변 민족들은 ‘벨’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이 신은 조금 더 고대 우상에 속했다. ‘벨’ 숭배는 후에 이스라엘의 포로 시절에 영향을 미쳤다.

 

‘리시프’라는 우상은 병과 전쟁의 신으로,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문화에서 숭배되었다. 주로 시리아, 페니키아, 가나안 지역에서 숭배되었고, 병이나 질병,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가 있었다.

 

그 밖의 우상들로는 황소(송아지) 우상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탈출한 후, 아론의 지시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한 사건이 유명하다. 이 금송아지는 애굽의 신들 중 하나인 ‘아피스’ 송아지와 관련이 있다.

 

여호와와 결합된 우상들도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방 신들과 결합된 숭배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아세라" 같은 숭배 형식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우상을 그 당시 사람들은 신으로 섬겼으나 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은 오직 여호와 한 분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정통 신학자라고 하는 자 중에 성부 한 분과 성자 한 분과 성령 한 분으로 신약에서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이는 삼위일체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폐단이다.

 

정통 신학자로서 정통 기독교 신학대학에서 강의하는 신학 교수조차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삼위일체를 바르게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 이를 우리는 삼위라고 부른다. 삼위라는 것은 세 개의 인격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안에 세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반드시 한 인격을 가진다. 간혹 이중인격이라는 것을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도 다루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싸이코(Psycho)‘에서는 주인공 노먼 베이츠이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상반된 인격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노먼은 그의 어머니 인격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어머니처럼 행동하면서 범죄를 저지른다.

 

또한, ’Jekyll & Hyde‘라는 문학 작품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로서, 주인공이 Jekyll 박사와 Hyde라는 두 개의 상반된 인격을 가진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소설은 이중인격과 관련된 심리적 갈등과 도덕적 문제를 탐구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중인격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그 속성으로 지니신 존재이시다. 그러하시기에 그는 그 사랑을 반드시 드러내신다. 난로 안에 불이 지펴져 있다면 그 난로 바깥으로는 필연적으로 열기가 방출되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온 방 안이 따뜻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본체에 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계시기에 그 사랑이 바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일이요, 우리를 지으심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의 창조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만약에 과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우연히 그냥 생겨났다면 얼마나 가련한 존재일까!

 

이전에 우리나라가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집이면서 어쩌면 아이들은 또 그렇게도 많았을까! 참된 부모들이었다면 그 아이들을 모두 사랑했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중에는 그렇지 못한 부모들도 있었다.

 

그래서 원치 아니했던 아이가 태어나면 모질게도 구박하기도 했다. 어쩌다 우연히 태어남 때문이었다. 그처럼 사람의 창조가 우연의 산물이었다면 대우받을 근거가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우연한 존재가 되게 하시지 않으셨다. 당신의 속성인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진정으로 아기를 원한 부모가 임신을 통해 아기를 얻게 되면 그 아기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 그들에게 이 세상의 그 무엇이 그 아기와 견줄만할까? 그 아기가 그들에게는 보물일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책에서 본 이야기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어떤 여인들이 모여서 자기가 가진 보물들에 대해 자랑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 돌아가면서 보물 자랑하는데 이윽고 한 가난한 여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보물을 이야기했다.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너에게 무슨 보물이 있겠느냐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녀가 밝힌 그녀의 보물은 바로 자신의 아기였다. 진실로 그녀야말로 참된 보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귀함을 받을 존재인가!

그러했으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죽을 운명 앞에 섰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길을 만들어 주고 마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것은 변개치 않으시는 속성을 지니신 분이시기도 하시다. 그래서 자신이 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행하셔야만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속성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니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약속을 아담과 하셨으니, 아담은 그 약속에 따라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그 순간에는 마땅히 죽어야만 할 자리에 선 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죽이셔야만 한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랑하셔서 만드신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은 행위언약을 어겼으니, 정녕 그를 죽이셔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신 하나님의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어떤 자를 죽여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면 어떻게 될까?

 

죽어야 할 사형을 선고받은 자에 대한 사형 집행을 집행하지 않고 살려준다면 법적으로는 법적 의무 위반에 해당이 된다. 사형 선고는 법의 판결에 의한 결과이다. 따라서 집행관은 법적 의무에 의해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만약 집행관이 이 법적 의무를 고의적으로 위반한다면, 직무 유기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처벌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경우도 아담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사랑하시니 그를 죽이실 수가 있었겠는가!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비책이 하나님 스스로 삼위 되어 주심이었다. 만약 하나님이 삼위로 되시지 않고 한 본체 안에서 그대로 일위의 인격을 소유하고 계셨다면 그는 심판하시는 일과 살리셔야 되는 그 일을 동시에 감당하셔야만 했다. 심판하시고 사형을 언도하신 이가 살려주는 그 일을 행하신다면 이는 자기모순이다.

 

성부 하나님은 모든 신적 사역의 원천이시다. 하나님 되실 바 그 근원이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 성부 하나님은 그 본질상 사랑을 근본 속성으로 지니고 계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실 대상이 반드시 있도록 하셔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속성으로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필연이다. 그래서 영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나눌 대상을 생각하셨고, 그것이 현실화된 것이 ’사람‘이라고 칭하는 그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지극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필연이 되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많은 자들은 자연의 우연한 발생에서 진화되어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고 하는가!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이 필연이 되어 사람을 창조하게 한 동인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이 타락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알지 못하고 창조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는 그 전제에서 위배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하나님이라 칭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영원에서 사랑할 대상으로서의 아담을 생각하셨을 때, 하나님은 이미 아담이 죄를 범할 것을 내다보셨다. 그리고 그런 아담일지라도 내치지 아니하시고 껴안고 사랑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죽음의 선고를 받아 마땅한 그 죄인 된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끌어안으시려는 하나님이시니, 어찌 사랑의 하나님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모순이 있으니 그것은 벌할 자를 동시에 의롭다고 하고 살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 되셔야만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정하신 법을 어긴 자는 반드시 벌하셔야만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속성에 따른 결과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의로우신 자이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의 그 속성과 융합하지 못한다. 그래서 죄인 된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한탄하며 고백하고,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허락되지 아니했다.

(출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출 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 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 모세를 하나님은 사랑하셨으니,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시려고 당신의 손으로 모세를 덮어 대면하여보는 것을 막아주셨던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오직 한 위로서만 계신다면, 죄인 된 자를 살게 하시는 일을 하실 수가 없다. 죽여야 할 자를 동시에 살리시겠다면 이것은 확실히 자기모순일 것이다. 자기모순이기에 죽여야 할 자를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모순 없는 하나님은 되실지라도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비록 죽어야 할 죄를 지어 죽을 처지에 있는 죄인일지라도 사랑으로 껴안으시고 살리셔야만 한다. 이 일에서 모순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영원에서 스스로 삼위 되어주셨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삼위 되어주셨던 것이다.

 

논리상으로 처음부터 계셔서 모든 신적 사역의 원천이 되셨던 그때의 하나님을 우리는 칭하기를 성부 하나님이신 인격이라고 하고, 이를 ’성부의 위‘라고 이름한다. 하나님 스스로 성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모든 것이 있게 하는 원천이셨으니, 그런 입장에서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 성부 하나님이 죽을 자로 정하고, 동시에 살 자로서 의롭다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을 자로 정하는 일을 감당할 인격으로서의 성부 하나님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그 성부 하나님이 모순 없이 죽을 자를 살 자로 세우시며, 의롭다고 하는 그 일을 담당할 인격으로 성자 하나님을 발생시키셨으니 이를 우리는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다”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 표현이 그래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다. 또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발생하셨다”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성자 하나님의 인격이 존재하게 되면, 성부는 죄인 된 자를 죄인이라 판결하시고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실 수 있고, 성자 하나님은 그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논리상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이로써 죄인이라 선고하여 죽음에 이를 자로 세움과 동시에 당신의 사랑으로 죄를 덮어주고 다시 살 자의 자리에 세울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이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스스로 삼위 되어주시는 그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일까!

 

(다음 주에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