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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고백에 관하여(2)

by 영동장로교회 2025. 3. 9.

2025. 3. 9.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갈라디아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신앙고백에 관하여(2)”

 

 

사도 바울은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유대교의 열심 분자였다.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는 돌을 던지는 자들이 벗어준 그 옷들을 맡아주며 스데반 집사가 죽어가는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후일에는 예수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을 잡아 오기 위해 군사들을 데리고 다메섹으로 떠나기도 했던 그런 정도로 유대교의 유력한 자였다.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런데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회심한 후에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대해서 정통한 자라 자부했으나 회심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그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의 사도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기는 그 복을 누리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자의 자리에 섰을 때, 지난날 자신이 그토록 충성했던 유대교 안에서의 자신의 그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감회를 느꼈을까! 또한, 한때 자신이 속해있었던 유대교에서의 지도자들이 그 교리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떤 소회(所懷)를 가졌을까?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행 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행 22: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행 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그 회한(悔恨)을 담은 글이 바로 이 구절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율법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쓴 글이 이 글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고 썼다.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그가 말한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우리가 학창 시절에 수학에 대해서 공부했다. 수학에는 중요한 공식들이 등장한다. 이 공식들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수학 공부일 것이다. 그래서 그 공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습문제들을 풀었다. 그때 하나의 연습문제만을 잘 풀었다고 해서 그 공식을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났을 때 그가 마침 그 다리만 만져보았다고 한다면 그 다리만은 온전히 경험하였으니 다른 동물의 다리를 만져보고 그것이 코끼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코끼리의 넓적한 귀는 만져보지 못했다면 코끼리가 귀를 갖다 대면 그놈이 코끼리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수학 문제를 풂으로써 공식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 경험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다 공감할 것이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인격적이시니, 당신의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일에 우격다짐으로 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믿음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그때에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셨다.

(신 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 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사 28: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 28: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광야에 나온 그들의 믿음은 연약했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믿음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살았던 그 시절에는 그들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전한 선지자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주로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믿음, 즉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부터 전해진 믿음의 지식만을 의지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모세 이전에 애굽에서 지내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직접적으로 전하여주며 가르친 선지자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믿음은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믿음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 방법이 바로 모세의 율법이었다. 모세가 믿음에서 어리고 연약한 그들에게 심도 있는 믿음을 가르쳐 알게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듯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극히 초보적인 가르침으로 드러낸 그 가르침이 율법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그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하며,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여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몽학선생은 당시 어린이를 교육하고 훈육하는 역할을 했으며,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율법이 구속의 완성자인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율법을 행함으로는 결코 우리가 의에 이를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노라고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시는 그 자리로 안내하는 역할을 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사도 바울도 주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대교의 그 원칙대로, 기록된 율법의 그 외형적 준수를 위한 일에만 열심했던 것이다. 우리가 한 공식과 관련된 수학 문제 여러 가지를 풀어봄으로써 그 공식을 이해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여러 가지를 지켜 행함으로써 그 율법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자리로 나아가기보다는 자기의 능력에 의존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려고만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아담의 그 원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롬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처음부터 죄 안에 가두어져 있기에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그 진리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결과이다.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야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노라”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부분이 완전하다고 해서 전체가 완전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분은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그 율법은 그래서 복음의 부분이었다. 그 부분조차도 이스라엘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한가지 뜻, 그것을 바르게 깨닫기를 원하셨다. 분명히 모세는 그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주며 가르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방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 방법으로 가르친 대표적인 율법이 십계명이었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십계명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이며,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가르침대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터득하도록 하려 하신 것이었을까?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 20: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3)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4)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 20:15) 도적질하지말지니라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천국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가장 귀한 속성이 무엇이던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 무한하신 사랑의 속성 때문에 우리를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삶을 꿈꾸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에서 이미 작정하신 바였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전능하신 자는 자신의 의지한 바를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결정하시는 자결정의 절대자이시니, 절대자의 그 의지는 반드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자결정하는 존재가 되게 하셔서 진실한 그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그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다.

(사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사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래서 우리를 자결정하는 존재, 즉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지으셨다. 이 결정에는 매우 심각한 위험요인이 함께 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자리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신 30: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 3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이 사실까지도 이미 영원에서 미리 아셨다. 그래서 그 방책도 준비하셨다. 그것이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가 지을 그 죄에 대한 죗값, 즉 대속물이 되게 하실 것을 정하셨다. 그래서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는 ‘내향적 사역’을 영원에서 이루셨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영원에서 그 본체 안에서 삼위로 구별되시는 ‘내향적 사역’의 그 일을 행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그 사랑의 최고 결정체였다. 스스로 삼위 되어주신 하나님의 이 사랑보다도 귀하고 위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걸작품이 이 사랑보다 위대하다 할 수 있겠는가!

 

(다음 주에 마지막 3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