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하나님께서 장자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뜻은?”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그 계획을 성자 하나님을 통해 성취하실 것을 영원한 그때 정하셨다. 그런데 만약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그 일을 그리하지 않으시고 직접 하시기로 처음부터 정하셨다면 굳이 성자 하나님의 필요성은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지 않으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부 하나님은 신적 기원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이셔야 할 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성부 하나님이 전부 소지하신다. 그런고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없이 성부 하나님만으로도 하나님이실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그 일을 직접 감당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그리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실 수 있는 자결정의 주체이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실 주체가 되신다. 그는 스스로 계시는 전능하신 자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구속됨이 없이 자결정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속에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는 일은 하시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악한 일을 행하실 수가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한 그런 일이다. 하나님은 도덕적 속성을 지니시니 지극히 선하신 자이시다. 따라서 선은 베풀지라도 악은 행하실 수가 없으시다. 악은 선과 반대되는 속성을 지니기에 선을 베푸시는 자가 악을 행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잠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성질상 죄를 범한 자에 대해 공의의 심판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에 속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는 공의에 따른 심판을 정하심으로써 그 죄인을 미워해야 할 처지에 서셔야 한다.
이에 반하여 구원하시는 그 일은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를 자를 살려내는 그 일이 된다. 구원하는 이 일은 죄를 지은 자를 사랑하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하기에 성부 하나님이 구원하는 그 사역을 감당하시기로 정하셨다면 그 하나님은 미워해야 하는 처지와 사랑해야 하는 처지에 동시에 서셔야만 한다.
이는 전혀 다른 상반된 입장이 동시에 존재하는 일이므로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따라서 구원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또 다른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니 그 일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하나님의 출생이다.
따라서 이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발생한, 오직 우리를 살리시려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내향적 사역으로서의 결과물이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했다고 해서 성자 하나님이 피조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논리적으로 그리되셔야만 한다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삼위가 되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의 성육신으로 구체화 되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된 우리의 편에 서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성자 하나님이 하나님의 편에만 서 계셨다면 그는 결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는 구속주로서의 그 일을 하실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죄인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그 일은 하나님 앞에 그 죄값에 해당하는 희생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희생의 제물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받으시는 입장에 서셔야 하고, 죄인은 드려야 하는 입장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죄인인 우리의 편에 서셔야만 한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니, 이를 ‘성육신’이라 칭한다.
하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그 희생의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을 것이 필요조건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기에 우리 중의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의로운 자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성자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심으로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그 의로움을 지니신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시면 그는 하나님 앞에 흠이 없을 것이 요구되는 그 조건을 만족하는 희생의 제물이 되실 수가 있다.
인성을 취하신 성자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그 일이 된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얻는 그 큰 복을 얻게 해주려 하시는 일이 된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그 희생의 제물이 되는 자리에 서셨다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가 되는 자리에 서심, 즉 장자의 자리에 서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신 주 예수는 모든 믿는 자들의 장자가 되신다.
애초에 하나님은 아담을 모든 인류의 장자가 된 그 자리에 세우셨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고, 그 죄는 우리 모두에게 유전되었다. 아담이 죄를 범한 그것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 그 범죄였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우리의 시조로 세우신 것은 우리 사람이 천사와는 다르게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양육하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려 하심이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복을 누리게 해주려 하심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온전히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에 대한 선포와 같은 행위이셨다.
그러나 우리의 시조 아담은 장자로서의 그 직무를 감당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래서 아담을 통한 이 복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그 속성에 따른 결과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새로운 장자가 되시는 예수를 통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하시는 그 큰 복을 허락하시기로 영원한 그때 당신의 뜻대로 그리 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도 그의 장자됨을 상징한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의 부활은 죄로 인해 죽음에 놓인 우리를 구해내어 부활시키시는 그 복의 통로가 되어주심이다. 장자는 그 형제들의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보여주셨다.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장자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 것인가?
장자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전해지도록 하신 것은 그 방식만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게 하고, 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주실 복을 장자를 통해 그 형제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시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모든 자들에 대해 일대일로 대응하셔서 복을 주시는 그 방법을 선택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셨더라면 그 복을 받을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그 복에 대해서는 감사할지라도 그 이웃한 형제들에게는 아무런 감사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을 굳이 이웃에게 나누어주지 않을지라도 그 이웃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 줄 필요가 없기에 서로에 대한 깊은 감사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로에 대해 전혀 사랑함이 없는 그 집단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시는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신다. 장자가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것도 이러한 일을 이루려 하심 때문이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떨어지게 될 것을 정말 모르셨을까?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서도록 처음부터 간과하신 것은 그렇게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려는 그 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셨다.
탕자가 되는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면 허랑방탕하다가 끝내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그것을 아버지는 모르고 그 아들의 뜻대로 해준 것이었을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들의 뜻을 따라준 것이었다. 그때의 그 아버지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그 아픔을 참아가며 그 아들이 그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훗날 다시 돌아와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섬기며 따르게 될 그 날을 기다렸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서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다시 돌아와 참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자리에 설 그날을 내다보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진실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 자리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개별적 존재로 만드신 천사와는 달리 종적 존재로 만드사 부모를 통해 태어나게 하시고, 그 부모로부터 얻어진 자들로 형제 관계로 살게 하신 것이다.
장자는 그 부모를 대신하여 그 모든 형제들의 복리를 챙기게 하신 것은 형제간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배우도록 배려하심이었다. 그래서 장자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두 몫을 허락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베풂에 대한 그 값이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행함에 대한 상급이 이와 같이 클 것이라는 일종의 암시였을 것이다.
(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축복권이 장자에게로 이전되게 하셨다. 그래서 장자는 아버지에게 축복받을 권리가 있고, 자신의 아들에게 언약의 축복을 할 권리가 주어졌다. 장자는 특별히 부모가 죽기 전에 하나님한테서 오는 축복을 특별히 받게 되어 있다. 이삭이 죽기 전에 야곱에게 축복한 것은 바로 이것의 예였다.
(창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와 같은 귀한 장자의 권리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여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그 지위를 박탈하여 그 자리를 옮겨버리신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행하지 않음에 대한 그 징계의 엄중함이 바로 장자로서의 그 지위를 강권적으로 박탈함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 정도로도 여기지 아니한 에서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창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창 25: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 25: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야곱의 가정에서 장자였으니 그 집을 바르게 다스리며 그 가정이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도록 하는 그 일을 했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동생들이 그로 인해 모두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얻도록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그 사명을 감당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서모 빌하와 간통함으로써 그 가정의 화목을 깨트리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가정에 화를 불러들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으셨다.
(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대상 5: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반면에 요셉은 비록 말째와도 다름없었으나 어찌하든지 그 아비를 도와 그 가정을 복되게 하려는 열망을 지녔다. 비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런 생각을 밤낮없이 하였으니 그것이 꿈으로 꾸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시기한 형들은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화를 변화시켜 복이 되게 하셨으니 결국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는 그 복된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의 열망대로 그 가정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내었다.
장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르우벤 대신에 비록 연약하고 어릴지라도 장자처럼 그 가정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 그 요셉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야곱의 이 가정에서의 장자의 자리를 르우벤에게서 요셉에게로 옮기셨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지파의 몫을 배분받음으로써 장자가 두 몫을 받는그 일이 요셉에게 이루어졌으니 그는 분명히 야곱의 참 장자가 되었다. 르우벤 대신 요셉이 야곱의 집안에 축복의 통로가 된 이 일은 그가 장차 오실 주님을 상징하는 자라는 의미가 되었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창 45: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창 45: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창 45: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창 45:13)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창 45: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창 45: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창 45: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창 45:17)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창 45:18)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수 16:4)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
아담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리의 시조로 세우셨으니 그는 분명히 모든 인류의 장자였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의 소중하고 귀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고, 장자로서의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장자의 그 자리의 소중함을 제대로 깨달아 알지 못하여 그 자리를 선악을 아는 그 나무 열매 하나보다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음이었다. 그래서 귀한 장자의 그 자리를 그것과 바꾸어 팔아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는 결국 장자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참된 장자이신 주님이 그 자리에 서셨다. 사도바울도 분명히 주님을 가리켜 모든 믿는 자 중에서 주님이 장자가 되셨다고 선언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장자를 통해 복을 허락하신 것은 장차 오실 주님이 믿는 자를 구원하여 살리실 그 일을 행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이 구원의 복을 얻을 그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런고로 장자라면 마땅히 그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여야 하는 그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 일을 행하는 데에 자신의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 일에 앞서 장자된 자라면 모름지기 장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책임이 주어져 있음을 먼저 인지해야만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장자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러나 정작 장자된 그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장자로서의 그 책무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오직 선택된 선민이라는 그 자만심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큰 비극이었다.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 7: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은 그들의 잘남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연약한 족속이지만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인한 은혜를 입었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만한 자의 자리에 서고 말았다.
이방 족속들을 얕잡아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장자로서의 그 직분에 대한 사명을 망각하였음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은혜를 이웃한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는 그 일을 감당했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 하신 것은 이 사명을 감당하라는 그 명령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것을 바라보고 심히 싫어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화를 내기까지 했다.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그 사명을 망각한 요나였다. 선지자가 이러했으니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이야 오죽했으랴!
(욘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결국 이스라엘 그들의 그 장자 된 지위는 상실되고 말았다. 이제는 에서의 장자 지위가 야곱에게로 옮겨간 것처럼, 그들의 그 장자 지위는 우리에게로 옮겨졌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장자의 지위를 새롭게 부여받은 우리로서의 주어진 그 사명과 책무에 대한 인식이 과연 지금 우리에게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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