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이것이냐 저것이냐”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 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고민하다가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 선택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삶이다. 누구나 이 삶이 성공적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선택의 순간에는 항상 고민이 따른다. 혹 이 선택이 잘못되어 실패하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과 그에 따른 그 결과에 대해서 염려한다.
왜 이런 걱정이나 근심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
성경은 우리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닫고 수용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로 선택함을 입은 자들뿐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에서 제외된 자는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머문다. 그런 자는 그의 영혼이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이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삶 자체를 인식하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죄로 인해 영혼이 여전히 죽어 있는 상태에 있는 자는 오직 세상일만을 생각한다.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의 임금인 사단의 그 뜻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사단은 그런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살도록 조정한다.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과 같이 사단에 속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그 선택을 할 뿐이다.
세상에 속한 자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가인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된 가인은 장차 자신의 나아갈 바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하여 말하기를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했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선택의 순간이 오면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며 판단하게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걱정과 염려가 생물학적 본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미래에 일어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피하거나 준비하려는 그 반응이 걱정과 염려이다.
이들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반응으로서 염려와 걱정을 한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그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걱정과 염려였다. 하나님을 떠난 자인 가인의 경우가 그래서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걱정과 염려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이 된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감당하여야 하기에 선택의 순간에는 언제나 자신에게만 유익한 그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적인 욕망이 되었다. 아담이 낳은 가인이 그 땅에서 거하면서 성을 쌓았다. 그가 선택한 일인 성을 쌓는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한 그 일이었다.
(창 4: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이끈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함락했다.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함락한 이스라엘은 그 전투에 함께 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깊은 감사로 충만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임금 사단은 이러한 때를 참으로 교묘히 이용한다. 아간의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의 모든 물건은 여호와 앞에 드리고 누구도 그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 했다.
(수 6: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수 6: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수 6: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자 아간이 그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대었다. 하나님을 떠났으니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그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단은 아담을 유혹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간을 유혹했다.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가 아담의 눈에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게 보이도록 했던 것처럼 그 물건도 아간의 눈에는 아름답고 탐스럽게 보이게 했다.
(수 7:20)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여차 여차히 행하였나이다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자는 사단의 종으로서 사단이 유혹하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 뿐이다. 종으로서의 그 삶이 행복할 리가 있겠는가!
아간의 그 선택은 이스라엘에게 끔찍한 불행을 몰고 왔다. 이스라엘이 아이 사람을 치러 갔다가 삼천 명의 군사 중에 삼십육 인이 전사하는 일을 당한 것이다.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한 명도 상함이 없이 정복했는데, 어찌 아이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한 것인가!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수 7:4) 백성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수 7:5)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이스라엘 중에서 아간 한 사람의 잘못된 그 선택이란 믿음의 사람이 한순간에 범한 잘못된 그 선택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늘 깨어 있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잘못된 선택은 믿음의 사람을 곤궁에 처하게 할 수 있다.
다윗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한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고난의 역사는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삼하 11:2)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3)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삼하 11: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1:5)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 15:13)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삼하 15: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삼하 15:15)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
(삼하 15:16)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삼하 16: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삼하 16: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높은 자리에 세우실 때, 늘 깨어서 경성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도록 한 대제사장은 바로 그런 경우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대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의 자리에 섰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 귀한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사단의 가장 큰 앞잡이로서의 그 자리를 선택하고 말았다. 세상에서 이런 자보다도 더 불행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가룟유다의 그 선택도 이 대제사장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는다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큰 복이었는가!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난 수를 세어보면 얼마나 될까? 그중에서 오직 열두 명만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셨으니, 사람으로서 주님의 사도가 될 확률을 계산하면 아무나 그 자리에 설 수 있는가! 그런 자리에 섰음에도 주님을 은 삼십에 파는 그 선택을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말 대신에 무어라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까?
(눅 22: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눅 22: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눅 22: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눅 22: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눅 22: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눅 22: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눅 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 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이런 어리석은 선택과는 반대로 참으로 귀한 선택을 한 예도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에서 구원하실 자로 선택하신 선택애를 받은 믿음의 백성들에게서 보이는 예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중생하는 재창조의 은혜를 입은 고로 그 영혼이 다시 살아 하나님을 아는 그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단에게 속해 그의 종노릇하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신분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그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기뻐하실까?
누구나 그 사랑하는 자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나님이야말로 그 사랑하는 자가 정녕 행복해지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그 선택하신 자가 사단에 속하여 걱정과 염려로 불행한 처지에 버려져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그들을 부르셨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 부르심이 바로 주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이었다. 이 일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신 그 말씀이셨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부르심에 응답한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신 그 장소에 나아왔다. 그때 오천 명의 장정과 수 많은 부녀자들도 함께 초청을 받았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시는 그 일에 동참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셨지만 아무도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오직 그 어린아이 한 명만 그 귀한 일에 동참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전부인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내어놓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것이다. 이 한 아이의 헌신이 장정 오천 명과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굶주림에서 구하는 놀라운 이적을 만들어내었다.
(요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 아이의 헌신의 선택은 성경이 폐하여지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미담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찌 이 어린아이와 같은 선택을 아무도 하지 못했는지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로 남는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들을 향한 믿음의 경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만일 오병이어의 이적이 베풀어지는 그 현장에 있었다면 그 어린아이와 같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선뜻 내어놓을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사람된 자리에 선 자라면 이전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단에 속했을 때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자신의 욕심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용기이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를 치를 적에 만약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면 그가 그 결전의 장소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자신의 안위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그런 자를 징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그 일을 먼저 선택했다. 그러하였기에 세상적으로는 전혀 골리앗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다윗의 힘이 되어주셨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팔을 붙들어 주셨으니 그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꽂혔던 것이다.
그 순간 다윗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생각도 자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만이 그에게 있었으니 그때의 다윗의 그 믿음은 그래서 순수한 믿음이었다. 순수한 믿음만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도 지적하셨으니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아니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 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 니라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 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사르밧 과부의 그 선택도 참으로 용기 있는 믿음의 진정한 예였다.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던 여인이었다. 성경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과부이다. 그 당시 여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약한 존재였다.
그런 약한 자 중에서 또 약한 존재는 돌봐줄 사람인 남편이 죽고 없는 상태, 즉 과부가 된 여자이다. 그런 약하고 불쌍한 존재인 과부가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어진 상태라면 최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상태에서 아이까지 딸렸으니 그 처지의 딱함이 무엇과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런 처지에 있는 여인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그 가루 한 줌을 엘리야가 내어놓으라고 했을 때, 얼마나 망설였을까! 엘리야도 저 먹겠다고 그 가루 한 줌을 내어놓으라고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상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왕상 17:11)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 17: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그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가루 한 줌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다.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내어놓은 그 가루 한 줌은 진실로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이 되었다. 그 순수한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이적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그 가루 통의 가루가 다함이 없는 역사를 이루어내었다.
믿음의 사람으로 선택된 우리에게는 오병이어의 그 어린아이와 같은, 또 사르밧 과부와 같은 그런 순수한 믿음이 과연 있는가?
'주일설교-링크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나안 여인의 신앙고백에 관하여 (0) | 2024.05.05 |
---|---|
하나님께서 장자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뜻은? (2) | 2024.04.28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0) | 2024.04.14 |
은혜받은 자의 책무에 관하여 (2) | 2024.04.07 |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이유와 목적에 관하여 (0) | 2024.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