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은혜받은 자의 책무에 관하여”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태어나서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남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들보다 나은 자신이 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 화장을 하는 것도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행동의 한 예이다.
남들보다 돋보이려는 이것은 ‘평균 이상 효과’라고 하는 심리적 편향의 한 종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긍정적인 특징과 능력은 과대평가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을 지칭한다.
이러한 인지적 편향은 우월성에 대한 착각이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조사에서 운전자 가운데 90%가 자신의 운전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평가했고, 기업 임원 중 90%가 자신의 성과가 평균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일들은 남들보다 잘나 보이기를 원하는 그 욕망에 따른 결과들이다.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그 자만심을 품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고 한 것은 그의 그 자만심의 결과였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자만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품었다. 이에 따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그 결과로 죄를 범한 자의 자리에 서고 말았다.
아담의 허리에 있었던 그의 후손들은 그 죄를 유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난 자라면 모두가 죄인이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만심과 아집은 더욱 견고해져만 갔다. 이는 그 배후에 사단이 자리하고 있음 때문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사단이 아담의 곁으로 다가와 아담을 유혹했지만, 아담의 후손인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단이 주인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이를 성경에서는 “너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따라서 사람으로서는 아담이 그 욕심을 따라 드러낸 그 자만심에 지배당하는 그것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기 자랑하려고 달려든다.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바리새인이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그 예화는 이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었다.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이와 같은 자기 자랑의 덫에 너무나도 쉽게 걸려든다. 이미 그는 아담의 그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기에 아담처럼 하나님과 비겨보려는 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자신은 거룩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을 구원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하는 자와 같다고 하셨다.
그 바리새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했다. 그 당시의 세리란 로마의 앞잡이로서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의 고혈을 짜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그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자가 지은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예수께서 비유에서 언급한 바리새인은 이런 세리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자기의 능력으로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과연 이 땅에서 의로운 자가 있을 수 있는가!
애초부터 우리는 모두 죄 중에서 태어난 존재일 뿐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구나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그것이 공로가 되어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더더욱 없다. 금식하는 그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빚진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로서 행한 일이 될 뿐이다.
또한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래서 자신의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그 고백을 담아 드린 표현이 십일조를 드림이니, 십일조를 드림은 결코 자신의 의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자는 이를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바른 신앙을 가진 자의 눈에도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하게 보일진대, 주님께서야 어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으실 수 있으랴!
우리의 본질에 대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의 우리의 모습은 죄를 범한 아담의 본성을 닮아 오직 우리 육체의 욕심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고, 그래서 죄를 짓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그 공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이었으니 어디 자랑할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는 허망한 꿈을 꾸었으니 늘 자기 자랑이 넘쳤던 것이었다.
그런 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에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우리를 중생하시는 그 은혜였다.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중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역사였다.
우리를 살리는 일, 이 중생을 위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는 그 일을 하셨으니, 이를 사도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다”라고 표현하셨다.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런고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가 자랑할 만큼 의로운 신앙생활을 했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입음이었다. 믿음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는 이 사실에 대해 분명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 믿음 생활은 헛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그 믿음은 헛것이요, 그들의 신앙생활도 헛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교만이 만들어낸 자기 자랑으로서의 의를 꾸짖으신 것이었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애정을 가지셨음이 분명하다. 그랬으니 그들을 나무라신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애초부터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들의 그 잘못을 바로잡아주시려는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이 시대에도 많은 믿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구원 얻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음 생활 속에서 행한 어떤 선이나 공로에 의해서 구원받을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따라 부지런히 공적을 쌓으려고 선을 행하거나 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구원 얻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다만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그 책무에 해당하는 일일 뿐이다.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얻음은 우리의 신앙적 어떤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 그것을 얻음이다. 따라서 이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위나 공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구원 얻음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라도 자신의 그 행위를 자랑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게 그리하신 것은 우리로 교만한 자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일은 교만으로 이어지고 그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될 것이니, 이는 무서운 죄를 지음을 결과하고 만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9)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 얻음에 우리의 공로를 요구하실 리가 없으시다. 만약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심이다. 우리가 결국 교만의 자리에 서게 되어 패망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선택함을 입은 자는 그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여야 할 것이니, 그가 감당하여야 할 일은 자기 자랑을 버리고 오직 겸손을 배우는 그 일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하신 그 일도 우리를 교만한 자의 자리에 세우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부터 생겨난 배려였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잠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하나님께서 품으신 이와 같은 마음을 바르게 알고 깨닫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의를 주장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택받은 믿음이 백성이라면 하루라도 젊은 날에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도 젊은 날에 하나님의 그 마음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했고, 그래서 노년에 그 후회가 진하게 남았을 것이다. 그 후회가 담긴 글이 전도서에 기록으로 남아서 뒤에 오는 세대에게 교훈이 되게 하였다. 부디 청년의 때에 너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그는 그렇게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솔로몬의 그 깨달음과 같이 사도바울도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가 깨달은 답은 인생이 창조된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표현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라고 했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 여러분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어떤 선한 일을 하도록 주께서 구원의 은혜를 입히셨고, 그래서 중생함을 통해 재창조되게 하셨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께서 요구하신 그 선한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숙고하여야 하는 그 숙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숙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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