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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신앙고백에 관하여

by 영동장로교회 2024. 5. 5.

2024. 5. 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가나안 여인의 신앙고백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장자로 삼으셨다.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으신 것은 그 족속들에게 어떤 빚을 지셨거나 그들이 장자로로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기에 하나님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들을 장자로 삼으신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라 스스로 그리 정하셨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대로 그 땅의 족속들 중에서도 가장 적은 족속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큰 복을 누리는 그 장자 자리에 선 것이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굳이 장자 제도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그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깨달음에 이르러야만 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양육하는 그 일을 통해서만 이룰 수가 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그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도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가장 가깝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창조하셨다. 그 창조하심이란 낳으심일 수가 있기에 사람이 자녀를 낳고 기름으로써 하나님의 그 사랑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는 개별적 존재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부모를 통해 자녀가 생산되는 그 방식을 택하심으로써 종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뜻을 이루시려고 부모된 자에게 여러 명의 자식을 두게 하셨다. 그리고 그 자식들에게는 장자를 통해 그 아비의 복이 전달되게 하셨다. 그리하심으로써 장자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다.

 

성경에서 장자가 축복의 통로라는 개념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하신 그 말씀은 장자인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이 흘러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또한, 창세기 27장에서는 이삭이 자신의 장자인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축복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삭은 야곱에게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라고 축복했다. 이는 장자권이 단순한 상속의 의미를 넘어서 축복과 권위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창 27: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이 외에도 로마서 8장 17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믿음의 장자로서의 위치가 축복의 통로가 됨을 밝히고 있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러한 구절들은 장자가 단지 첫째로 태어난 자의 지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이어받고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열어놓으신 이 방법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변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이 방법을 폐하시고 다른 길을 여실 수는 없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결코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거두실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그 자리에 세우시려는 그 목적을 이루셔야만 했고, 그 복은 장자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그래서 그 옛날에 이스라엘을 장자 나라로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그 땅에 하나님의 그 사랑이 실현되도록 하는 그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입혀주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이스라엘은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당신의 장자가 그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당신의 뜻을 그 땅에 펼치지 못하는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하나님의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슬픈 그 심정을 알 길 없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통해 알리셨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으니 그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효험이 있을 리가 있었겠는가!

 

그 안타까운 심정이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이 땅에 오도록 만들었다.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예수 탄생이셨다. 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되, 굳이 이스라엘의 그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때 그 땅은 로마가 지배하는 로마의 식민지 땅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그 족속 로마가 그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상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장자가 하나님을 떠나있다면 그 장자를 통해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수 없다.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니, 세상이 원하는 가장 큰 복은 사단의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구원을 얻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세우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라 하심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그 일이 가장 우선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필연적으로 이스라엘 그 땅으로 오셔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그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그들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에서가 그의 장자 명분을 팥죽 한 그릇 정도로도 여기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장자의 자리를 야곱에게로 옮기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그 장자의 자리를 옮기신다.

 

그리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장자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그 일들 그렇게 작정하신 바는 철회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래서 끝내는 이스라엘을 회심시키시고 다시 장자의 자리에 세우실 것이다.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온전히 이루는 그 날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날이 될 것이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도 바울도 이스라엘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그 은혜로 모두 회심하여 구원을 얻어 장자의 지위를 회복하는 그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 날이 올 때까지는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을 나누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이루는 그 복은 장자 이스라엘이 회복됨으로써 이루어질 그 복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이 누릴 그 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장자의 자리에 세우는 그 일이 급선무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 이스라엘에 오신 것이었다.

(행 28: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행 28: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행 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주님의 그 복음을 거절했다. 복음을 거절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또 한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 하셨다.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 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 되었다. 주인의 아들이 먹지 않겠다고 하니 그것을 개에게 주어 그 개가 복을 얻는 꼴이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5장에서 소개된 가나안 여인의 그 이야기이다.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스라엘이 도무지 주님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주님께서 발걸음을 이방 땅으로 옮기셨다. 그래서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버나움을 벗어나 도착한 곳이 두로와 시돈 지방이었다.

 

예수께서는 더욱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안전한 처소로 피하신 것이다. 이 행동으로 인해 주님이 비겁하게 도망가신 것이 아니냐고 오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때때로 이처럼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신 것은 또 다른 구원사적인 면에서의 중요한 의도를 드러내신 일이셨다. 이방인으로 하여금 구원얻는 일을 이루도록 하여 장자 이스라엘을 시기 나게 만들려 하심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스라엘이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만드시려는 의도이셨다.

 

그 의도가 구체화된 예는 예수께서 그곳으로 가셔서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을 만나 구원하신 그 일이다.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14장 34절에는 게네사렛 땅에 이르셨다고 했다. 게네사렛 땅은 갈릴리호수 북서쪽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또 북서쪽으로 나아가면 도착하는 곳이 바로 두로와 시돈 지방이다.

 

예수께서 활발하게 시행하신 갈릴리 전도사역은 이제 끝나고 은거 및 베레아 사역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20:34까지 계속된다. 베레아 지역은 갈릴리호수에서 남쪽으로 요단강을 따라 내려오면 사해에 가깝게 이를 무렵 요단강 오른편 나타나는 그 지역이다.

이 사건의 기록과 평행되는 기록이 막 7:24에 나타나고 있다.

(막 7: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그렇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셨고, 그래서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는데, 그곳에서 한 이방 여인과 대면하시게 되었다.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이 여인에 대해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되기 전의 고대명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 가나안 사람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는 복음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에 비해 그들의 옛 원수의 자손이 오히려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인 메시야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민 13: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삿 1: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삿 1: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삿 1: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삿 1: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한편 2세기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 '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그 여인이 '주'라는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소망에 대한 지식을 전해 들었고, 이 말들이 다윗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와 관련되어 있음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로써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인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만한 자격은 있었는가?

 

그는 분명히 이방인으로서 그것도 여인이었다. 이방인이라면 분명히 죄인의 상태에 놓여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런 자가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엄연히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녀가 만약에 자신이 구원얻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라는 뜻이지 않은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 그녀가 그렇게 호칭했다는 것은 “나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 의도가 담겨져 있음이다.

 

과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이 말은 ”당신이 메시야이시니 나를 구원하라”라는 일종의 주제넘은 명령이었다. 마치 빚쟁이가 찾아와 당연히 요구할 바를 요구함처럼 보인다. 어찌 죄인된 자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깨달음에 이른 자였다면 이런 말을 감히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은 남들 앞에 자랑하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비유에서 세리도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지만, 이 세리의 그 고백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그 인식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세리의 그 고백과는 다르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없이 ‘나’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내세웠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딸이 귀신 들린 그 일 때문에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다. 도무지 자신의 죄인임에 대한 자각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자신의 죄인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원전에서 살피면 더욱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15장 22절의 헬라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καὶ ἰδοὺ γυνὴ Χαναναία ἀπὸ τῶν ὁρίων ἐκείνων ἐξελθοῦσα ἔκραζεν λέγουσα, λέησόν με, κύριε, υἱὸς Δαυίδ· ἡ θυγάτηρ μου κακῶς δαιμονίζεται."

 

그리고 세리가 말한 누가복음 18장 13절의 헬라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ὁ δὲ τελώνης μακρόθεν ἑστὼς οὐκ ἤθελεν οὐδὲ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ἐπᾶραι εἰς τὸν οὐρανόν, ἀλλ’ ἔτυπτεν τὸ στῆθος αὐτοῦ λέγων, Θεός, ἱλάσθητί μοι τῷ ἁμαρτωλῷ.”

 

우리 성경에서는 가나안 여인이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고, 세리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함으로써 모두 동일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영어 성경도 둘 다 "Have mercy on me“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태복음 15장 22절 (영어, NIV):

And behold, a Canaanite woman from that region came out and was crying, ‘Have mercy on me, O Lord, Son of David; my daughter is severely oppressed by a demon.’“

누가복음 18장 13절 (영어, NIV):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그러나 원어 성경에서의 표현은 다르다. 비록 그 뜻은 같을지라도 그 문자적 표현은 분명히 다르다.

"ἱλάσθητί μοι"와 "ἐλέησόν με"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헬라어 표현이다. 그러나 두 표현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세리가 고백한 "ἱλάσθητί μοι"는 “나를 위해 화해를 이루소서” 또는 "나를 위해 속죄하소서"라는 의미로, 하나님께 죄의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더 깊은 간청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인 자신과의 사이에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구였다.

 

반면에 가나안 여인이 "ἐλέησόν με"라고 말한 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동정을 구하는 일반적인 요청이다. 이 표현은 자신의 죄인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이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ἱλάσθητί μοι"는 특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반면, "ἐλέησόν με"는 하나님의 자비를 넓은 의미로 청하는 기도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여인의 그 말 속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수없이 간청하였음에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 여인을 무시하셔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이었을까?

이방 여인이었으니 당연히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기신 것이었을까?

 

만약에 예수께서 그런 이유로 그 여인의 간청을 무시하셨다면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의 그 가르침은 위선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참으로 진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아무 답도 하지 않으신 것은 순전히 기다림이셨다. 그러면 무엇을 기다리신 것이었을까?

 

예수께서는 이미 그 여인을 향한 그 사랑을 갖고 계셨다. 따라서 그 여인이 예수와 대면하여 가지게 된 그 시간 동안에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죄인임에 대한 그 고백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려주신 것이었다.

 

과연 그 여인이 내뱉은 말의 표현은 점차 변화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고 하더니 두 번째의 표현은 “주여 저를 도우소서”였다. ‘주 다윗의 자손’에서 ‘주’로 부른 것은 이제야 예수에 대해 자신을 종의 자리에 세웠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자신을 가장 겸손한 자리에 세웠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낮아지고 겸손한 자리에 서서 이제는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이는 “당신의 뜻에 맡기겠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이 의롭다고 한다면 굳이 도움을 달라하지 않을 것이고, 또 의로운 그때는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받을 권리로써 도우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당당히 요구한 그 예는 그 당시 로마 군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은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면 당연히 그 지역 주민에게 도우라고 명령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그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가장 겸손한 자리에 설 수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면 결코 완전한 겸손에 이르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는 결코 구원의 주님을 만날 수 없다. 그 여인이 그토록 간청했지만, 예수께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심이 그것이다.

 

그녀의 그 겸손은 드디어 자신을 개의 자리로까지 끌어내렸다. 자신을 개라고 고백하는 이 자리는 죄인이라는 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을 때 설 수 있는 그 자리이다. 죄인이라는 완전한 그 깨달음에 도달하면 자신을 향한 그 어떤 모멸도 달갑게 받을 수 있다. 죄인이 그렇게 취급당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이 고백이 바로 주님이 기다리셨던 그 답이었다.

그녀의 그 고백에 주님이 기뻐 반기셨으니, 그것이 “여자여”라는 그 표현이었다. ‘여자여’라는 표현은 하대하는 그 표현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중을 담은 그 표현이다.

 

“어떻게 이방인인 네가 이렇게 죄인됨에 대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느냐!”라고 대견해하시면서 부르신 그 호칭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모친에게도 이 표현, ‘여자여’라는 표현을 쓰셨다.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 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녀를 사랑하셨고, 그가 구원에 이르기를 예수께서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셨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그 인식에까지 도달한 것은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구원에 이를 자로 정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그 깨달음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럴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녀의 공로로 삼아주신 것이다. 과연 그러하기에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그 하나님이 되신다.

 

주님께서는 그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참되게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