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7 영동장로교회 최규만 목사
“심령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은 예수의 제자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로 알려져 있다.
이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는 것으로 그 서막을 열고 있다.
내가 처음 이 대목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난생처음 교회라는 곳에 갔는데, 그곳에서 성경이라는 책을 만났다. 그때 내가 본 그 성경책은 신약 부분만 묶여져 있던 성경책이었다. 그때는 신약 부분만 있는 그런 성경책이 많이 있었다. 하여튼 나는 성경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펴보았다.
대개 책을 집으면 첫 페이지부터 읽어보게 마련이니 나도 그 성경책의 첫 페이지를 펴서 보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분명히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남자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첫 페이지는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누가 누구를 낳고”의 반복이었다. 한나절을 이 한 페이지를 붙들고 있었다. 나의 책 읽는 습관은 정독이다.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깊이 생각하며 보는 이 습관은 어린 시절에 책을 넉넉히 살 수 없는 형편 탓에 책이 한 권 생기면 그것을 두고두고 읽었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그 첫 페이지가 이해될 때까지 보려고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 첫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그날은 성경책을 덮어 버렸다. 참으로 이상한 책이라는 느낌뿐이었다. 그 첫 페이지가 그렇게 깊고 많은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훗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는 것으로써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여 4장에 이르러서야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첫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난 뒤에 세례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 갈릴리로 오시고, 그곳에서 공생애 사역의 첫 순간을 여셨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마 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첫 순간을 산상수훈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단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첫 순간을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다“라고 짧게 기록하고 있다.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한편 누가는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갈릴리에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그리고 누가는 그 유명한 평지 설교를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에 하신 일로 기록하고 있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6: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눅 6: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눅 6: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눅 6: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눅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눅 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마태의 기록에서는 예수께서 네 명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만을 제자로 세우신 후에 산상 설교를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산상 설교를 하신 그때에는 마태 자신이 아직 제자로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 4: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마태가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때가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9장 9절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이 사건들을 시간과 관계없이 테마별로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따라 기록했을 것이니 산상 설교는 마태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일어난 일로 보여진다.
(마 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태는 원래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자였다. 그 당시 세리는 지금의 세관원과는 세상 사람들의 보는 이목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기에 일반 백성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또 헤롯이 그 땅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기에 헤롯왕에게도 세금을 내어야만 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 제국에 낸 세금은 다양했는데, 예를 들어, 재산세, 땅세, 수입세, 통행세, 농산물세 등이 있었다. 이 세금들은 로마의 세무관이나 협력자인 세리들에 의해 징수되었으며, 종종 부당하고 과도하게 부과되었다.
마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런 세금들을 징수하는 세리였으니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그런 악독한 짓을 한 자였다. 그런 그가 주님의 부르심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의 말씀을 들었다.
누가가 기록한 대로 평지 설교를 하시던 그 날에 마태는 그 현장에서 그 설교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시작된 그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아마 베드로는 그 마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우리 네 명을 제자로 부르신 후에 산 위에서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네. 그때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오늘은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만 말씀하시는구나“.
아마 베드로의 이 이야기를 듣던 마태는 자기의 심장에 예리한 비수가 꽂히는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많은 무리가 예수를 쫓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매일 똑같은 사람들이었을까?
예수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만난 그들에게 같은 의미의 말씀을 자주 하셨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평지에 모인 이 무리와 산 위에서 예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 시대에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가난한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기대려고 나아온 그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을 베푸셨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이 말씀은 그들에게 베푸신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이셨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가난한 것 자체가 복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면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
가난하였기에 기댈 곳, 의지할 데가 없어 기댈 곳, 의지할 자를 찾아 주님에게 왔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 얻는 자의 자리에 섬이었다.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복보다 큰 복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그 구원을 얻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런데 그 복이 다름 아닌 자신들이 가난한 그 처지에 있었기에 예수께 나아옴으로써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그때 평지 설교를 들으려고 나아온 많은 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만약 마태의 입장에서는 예수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만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은 그에게 그와 같은 충격을 주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세리였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부유했을 것이다.
굳이 자기에게는 그 가난한 자와 같은 그런 위로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아무런 느낌도, 깨달음도 없이 그냥 지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 베드로일지도 모르는 다른 네 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누군가 분명히 그에게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했고, 그는 그 대목에서 그토록 심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누구이던가! 그는 자신의 동족에게서 고혈을 짜내던 세리가 아니었던가!
마태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죄인이라고 할만한 자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는 늘 고민했을 것이다. ”이 죄를 어찌 제할 수 있을까!“하고 탄식하는 그의 심령은 그래서 참으로 가난했다. 어찌할 길이 없는 그 심정이 평화롭고 넉넉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태를 구원하실 자로 정하셨으니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간과하시고 유기될 자로 정하셨다면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훗날 복음을 위해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이 위대한 복음서를 기록하는 그 은혜까지 누릴 수가 있었겠는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그가 주님의 그 가르침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가 충만하였기에 능히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깨달음의 산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그의 복음서이다.
따라서 그가 기록한 이 기록물은 아무런 깨달음이 없이 단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그 영감대로 기계적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에 따라 자신이 깊이 깨달은 그 깨달음을 부족함이 없이 기록한 것이 이 마태복음이다.
그러므로 그가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은 평지 설교를 기록으로 남기는 대신에 자신이 들은 그 산상 설교를 기록으로 남기려 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도 분명히 이와 비슷한 말씀을 전해 들었지만 그가 기록한 기록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누가의 입장에서는 예수께서 자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자주 하신 그 말씀대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기록한 것이리라.
누가는 의사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보다는 존경을 받고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원성을 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니 크게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신 그 말씀을 “가난한 자”라는 그 범주에 묶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태는 누구이던가! 참으로 악랄한 삶을 산 세리였으니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함을 입었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얼마나 후회했을까! “왜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사는 삶을 살았을까!”하고 자신을 원망했을 것이다.
자신을 탓하는 이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하심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이다. 우리가 그냥 아담의 그 원죄를 유전 받은 죄인으로 살던 때에는 이런 회심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는 사단의 지배를 당하고 있기에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일에 몰두하는 삶을 살기 바쁘다. 그런 자에게는 양심이란 있을 수가 없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그러나 그런 죄인 중에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함을 입은 자라면 성령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거듭남을 입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중생의 역사가 일어난다.
영혼이 새롭게 태어났으니 능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되고, 지난날의 자기의 삶을 돌아보아 참회하는 일이 능히 가능해진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아온 자기의 삶에 대한 진실한 참회와 함께 자신이 도무지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임에 대한 고백, 그것을 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참회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는 한없은 갈망, “나를 이 죄에서 건져 내어줄 자가 진정 없는 것인가”하는 그 갈망으로 입술이 마르게 될 것이다. 이 순간의 심령이 가난한 심령이다. 거듭난 자의 자리에 선 마태가 이런 갈증으로 입술이 타들어 갔을 것이니 그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을까!
이 참된 회개에 따르는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칭의’이다. 이는 의롭다고 인정해주심이니, 우리는 비로소 의로우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이 칭의를 받음으로 인한 일이다.
주는 의로우신 자이시니 우리가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의로우신 주 예수와 교통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지 못한다면 우리가 주를 믿는 일은 모두 허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갈 수 있으리요!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주셨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태가 기록한 이 말씀을 산상 설교라 칭하고, 누가가 기록한 이 말씀은 평지 설교라고 칭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장소가 서로 달랐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마태와 누가가 장소에 따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각자 기록하였으니 어쩌면 예수께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같은 의미로 다르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서로 조금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음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기록하였고,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말씀을 접했을 때 받아들이는 그들의 심정이 같지 않았음에 대한 차이였을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는 아니었다. 그는 의사였고, 사도 바울과 같이 사역을 하였기에 들은 대로의 객관적인 이야기만을 냉철하게 이성적인 입장에서 기록으로 남긴 자였다. 반면에 마태는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통해 깊이 깨달은 바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누가와는 다르게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본다.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눅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지만 마태 자신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주님의 제자로 따라다니던 그때에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말씀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에 도달해있었더라면 예수께서 붙잡히던 그때 순간에 감히 자신의 선생을 혼자 버려두고 도망을 칠 수 있었을까?
그랬던 그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성령의 체험을 입고, 비로소 그 순간에서야 제대로 깨달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가 느낀 감정은 어떠했을까! 도무지 구원받을 길이 없던 죄인인 그에게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던 자신의 선생, 예수께서 베푸셨던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는 그 후에 예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한 순교의 그 길을 갔는지도 모른다.
복음의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태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고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도무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절절한 깨달음이 없이는 복음은 단지 유행으로 입고 벗는 옷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한순간 뜨겁게 헌신하다가 주님을 떠나가는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태처럼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었음을 드러낸 것이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참회한 그 고백이었다. 그러했기에 그 또한 주님의 사도로서 기쁘게 순교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으리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마태가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 ‘회개’라는 단어이다.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하라”는 말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라”는 그 말은 바로 마태 자신의 외침이었다. 그는 이 단어를 그의 복음서 서두에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큰 죄인이었음에 대해 고백하고 있었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음을 간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것을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마 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새해가 시작된 이 순간에 우리 모두는 마태처럼 자신이 죄인임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자라는 것을 주님 앞에 드러내어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참되게 심령이 가난한 자로 서고, 주님의 약속하신 바대로 참된 복을 누리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고 원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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