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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by 영동장로교회 2024. 1. 21.

2024. 1. 2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는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그 첫 순간의 기록을 팔 복으로 하고 있다. 왜 마태는 가장 먼저 팔 복을 기록함으로써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알렸을까?

그리고 왜 예수께서는 복을 일곱이나 열이 아닌 여덟 가지로 말씀하셨을까?

 

통상적으로 성경에서는 칠을 완전수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칠일간의 일로 표현하심으로써 그 창조하신 일에 대해 완전하심을 나타내셨다. 이 외에도 칠이 완전하심임을 암시한다는 것은 출애굽기에서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도록 명하신 일과 레위기에서의 제사장이 성소 휘장 앞에 피를 일곱 번 뿌리게 하신 일 등과 같은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 12: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출 12:16)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제칠일에도 성회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인의 식물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

(레 4: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레 25: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레 25: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민 23: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 하매

(민 23: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리니라

(민 23:3)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갈지라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고하리이다 하고 사태난 산에 이른즉

(민 23:4)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고하되 내가 일곱 단을 베풀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나이다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그 칠에 하나가 더해진 것이 팔이니 이는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수이다. 따라서 팔 복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때에 주어질 그 복을 말함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원죄에 짓눌려 사는 그 사람을 가리킴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함을 입어 새로운 심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가난한 심령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복된 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따라서 팔 복은 성령의 은혜로 거듭남으로써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에 이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 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 팔 복을 말씀하신 의도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해 도덕적으로 교훈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애를 입은 자는 마땅히 거듭난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미처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자들을 깨우시려고 부르신 말씀이 이 팔 복의 말씀이셨다.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 잠에서 깨어나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르셨던 그 제자들은 마침내 주님의 그 부르심에 의해 그 깊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평생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팔이라는 숫자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고 있음은 할례를 시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그 명령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할례는 난지 8일 만에 시행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모든 남자아이는 난지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심으로 이루어졌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할례받은 자의 삶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암시하고 있다. 할례 시에 흘리는 그 피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음에 대한 상징이다.

 

할례 시에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해 주시는 그 은혜, 즉 속죄와 구원의 은혜가 임함에 대한 응답이니 이는 진실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라 할 것이다.

(사 52:1)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여담이지만, 8일째 되는 날은 혈액의 응고에 관여하는 비타민 K와 프로트롬빈의 양이 최고에 달하기 때문에 출혈을 피하기에 가장 좋은 날이라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그 첫 순간에 하신 말씀이 이 팔 복이었다고 언급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구원 얻기로 정해진 자들을 부르시기 위해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참인 것은 그의 기록에서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가 세례요한의 이 독설을 기록한 것은 다분히 그런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보다 분명하게 그런 의도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그 근거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그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답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신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고 밝힌 그 대목에서 분명해졌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선택애를 베푸셔서 구원하여 살리실 자들을 부르시려고 오신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 팔 복도 구원 얻어 살 자들에게 베푸신 말씀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팔 복의 해석도 구원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바르게 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도덕적으로 교훈하기 위해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면 예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고 말 것이다.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예수께서 온유한 자와 그가 누릴 복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팔 복의 그 말씀 중에 세 번째로 하신 말씀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왜 세 번째로 말씀하셨을까?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과연 온유란 무엇일까?”하는 것이다. 온유하다는 것에 대한 사전적 설명은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럽다”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온유라는 것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예수께서 언급하신 온유한 자란 타고난 그대로의 성품으로서의 온유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언급한 온유한 자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져 입게 된 그 성품으로서의 온유함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온유한 성품이란 거듭난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런 온유한 성품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였다. 성경에서는 모세를 온유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온유한 성품을 지녔을까? 그는 과연 처음부터 온유한 자였던가?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가 태생적으로 온유한 자였다면 그가 왕자였을 때 어떤 애굽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는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그리고 또 그가 하나님의 명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가는 그 과정에서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그 혈기를 부릴 수 있었을까?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온유한 성품은 죄인된 자에게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 자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남을 입는 중생의 은혜가 임하고, 그 결과로 영혼이 새롭게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에게서만 발견된다.

 

중생하는 은혜를 입은 자는 새롭게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되어져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한 깊은 회오를 하니, 이때의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다. 이 모습을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하셨다.

 

이런 자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천국이 저의 것이 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진실로 복된 자가 되므로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 하신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그 사실 자체가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슬퍼하게 되니 이런 자를 주님은 애통해하는 자라 하신 것이다. 애통해하는 이 단계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니 이는 자신과 관계되는 변화일뿐이다.

 

그다음 단계는 그의 영적인 눈이 외부로 옮겨지니, 이것이 타인과의 관계로의 이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웃이 그에게 다가와 인식이 될 것이다. 이때 자신처럼 구원에 이를 자들임에도 여전히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잠자고 있는 그 상태의 상대를 보게 되면 얼마나 측은한 마음이 들겠는가! 이때의 심정이 온유함이다.

 

만약 그때 그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비방하거나 욕설을 내뱉는다면 어찌할까?

 

자신이 죄인인데 어찌 의로운 자라 주장하며 혈기를 부릴 수 있겠는가!

죄인이 죄로 인해 비난받는 것을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따질 수 있을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거듭남을 입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 죄인임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따른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이 바로 이 온유함이다.

 

모세는 그 죄에서 거듭남을 입은 자였고, 자신이 죄인임에 대한 그 깨달음을 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온유한 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을 수 있고,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자의 자리에 섰다.

 

하나님에 의해 그의 영혼이 통제되는 그때에 비로소 그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온유함이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얻게 되는 그 성품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그 성품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도 이 온유함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가 그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그 도중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온유한 자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계속적으로 인도하셨다. 중생하는 은혜를 받고 회개하여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칭의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입을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온전한 의로움을 당장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의로움을 입는 훈련을 감당해나가야 한다. 이를 성화 과정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온유함은 더욱 자라간다. 모세도 그런 과정을 밟아간 것이다. 그 훈련의 과정에서 그가 범한 실패가 바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친 사건이었다. 얼마나 후회하며 하나님께 회개하였을까! 그래서 모세는 더욱 온유한 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었고, 모세의 그 온유함은 결국 그 백성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 백성들이 점차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의 자리로 나아갔다. 결국 그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이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일은 모세의 온유함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이 다시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려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또 다시 말씀을 주셨다. 이는 택하심을 입었으나 영적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들을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는 그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으니 다시 한 번 더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셨다. 그 말씀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그 말씀이셨다.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이같이 하셨을까!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가?

(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37: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시 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모세의 온유함이 이스라엘을 변화시켰듯이 온유한 자의 그 음성은 이웃을 화평케하고, 변화하게 한다. 모세의 그 음성은 광폭한 그 이스라엘을 유순하게 만들 수 있었다. 불평과 원망을 일삼던 그 백성들을 결국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이 모세를 통해 증명해 보이셨다.

 

모세는 또한 그의 누이 미리암의 분노를 잠재웠다. 미리암은 자신의 그 행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병에 결렸고, 그때 모세는 온유함으로 그녀의 분노를 잠재웠을뿐만 아니라 그녀의 병도 치료할 수 있었다.

(잠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온유한 자는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자신이 죄인임과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대한 감사를 깨달아 중생한 자로서 드디어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그 자리에까지 나아간 그 상태를 표시함이 바로 온유함이다. 그런고로 온유함이란 참사랑을 베풀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되니 참되게 온유한 자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된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현재의 복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얻게 될 참된 복에 대한 약속이다.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현세의 복은 장차 올 미래의 진정한 복에 대한 증거로 보여 주심이 되었다. 따라서 온유한 자가 땅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구원 얻은 자가 궁극적으로 얻게 될 참된 복에 대한 증거였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는 일인 거듭난 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실천 사항은 사랑이다. 바울은 사랑을 정의할 때 이 온유를 언급함으로써 결국 이 온유란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랑의 또 다른 한 면임을 보여 주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다윗이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온유함이 그를 크게 하였노라고 했다.

(시 18:35)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이는 그가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에 한 고백이었다.

(삼하 22:1)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삼하 22:36)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그러면 다윗이 말한 하나님의 온유함이란 무엇이었을까?

 

다윗이 말한 이 온유함의 히브리어 ‘아나’는 첫째로는 응답, 둘째로는 수고, 노고, 셋째로는 낮은 마음, 관대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에 여기서 첫 번째의 의미로 해석하면,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다윗이 크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며, 둘째의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수고로, 마지막의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로 다윗이 크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어느 경우를 채택하든 내용상의 큰 문제는 없겠으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마지막의 경우를 지지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막연히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문맥적으로 다윗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일일이 응답하시는 그 관대하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이 관대하심이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릴 수 있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온유함이 있다면 그 온유함은 다윗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하나님의 그 온유함과 같을 것이다.

 

그러하니 내게 있는 이 온유함이 나와 관계하는 모든 믿는 자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그 큰일을 감당하는 자의 자리로 이끄는 그 능력이 될 것이다. 사실이 그러함은 내가 소유한 그 온유함이란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온유함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란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로 정하신 자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다윗은 이미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났을 때에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시 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니, 이 온유는 그 열매 중의 하나라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베드로도 본도와 갈라디아 등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 온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결국 이 온유함이란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로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고로 이를 귀한 것으로 여겨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에게 드러내어 보여야 할 것이다. 이는 구원 얻은 자의 마땅한 태도이다.

(벧전 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벧전 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도 이 온유함에 대한 이웃과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권하기를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하고 있다. 이 온유함은 믿음의 성도들 간에 생겨나는 모든 불협화음과 갈등을 해소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야고보도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 온유의 은사에 대해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었다.

(약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온유함의 은사를 행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 행하여야 할 의무이다. 이웃을 사랑하라 명하신 주심의 지상 명령에 따라 이 온유함도 함께 행하는 것이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된다.

 

이로써 모세의 온유함이 이스라엘을 변화시켰듯이 구원 얻을 백성들이 크게 변화를 입는 놀라운 역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일에 주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