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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by 영동장로교회 2023. 12. 31.

2023년 12월 31일(2023년 마지막 주일)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얼마 전에 허브 한 송이를 선물 받았다. 겨울이라 창가에 두면 따뜻한 햇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책상 옆 창가에 두었다. 꽃대가 자라면서 창가 쪽으로 기울어지길래 반대쪽으로 돌려두었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창가 쪽으로 꽃대가 기울어졌다. 살펴보니 창문 너머로 태양이 그렇게 비스듬히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꽃들이 그렇게 태양을 향하도록 만드셨을까?

 

여름날에는 식물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그렇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무들도 서로 많은 햇빛을 받으려고 경쟁적으로 키를 키운다.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이유가 광합성을 하여 보다 많은 영양분을 만들려고 그리한다고 말한다.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바로 이 빛이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생명의 빛을 주는 존재는 태양이다. 그래서 태양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식물을 창조하실 때 그 식물이 태양을 향해 자라도록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을 사모하라는 그 뜻을 담아두신 것이 아닐까?

 

그 식물들이 태양을 사모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시려고 거기에 그 비밀을 담아두셨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첫 순간에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실 그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것이 무엇임에 대한 암시였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의 첫 기록에 그 무엇보다 먼저 이 빛에 대해 기록함으로써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담아두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요한의 이 기록에서의 빛이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살리실 그 예수를 가리킴이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래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그 빛이신 예수를 사모하는 그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 속에 그 진리를 담아두셨던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하는 그 일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예수를 닮고, 그 삶을 따라 하는 일은 우리가 천국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그 일을 배워가는 일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사모하며 그에게서 배워서 따라 해야 할 그 일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 배반자를 사랑하셨다. 그가 스스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은 그의 참된 사랑의 실천이셨다.

 

가룟 유다가 예수와 열한 명의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장에 함께했다. 그때 예수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만약 예수께서 그 가룟 유다라는 제자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리하실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가 그런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치 않을 자라는 것을 이미 아셨기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그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셨다.

 

가룟 유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니, 분명히 그를 사랑하셨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마 26: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마 26:21)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마 26:22)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마 26:23)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26: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과연 우리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이제는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고 계셨다. 한 해가 저무는 이 순간에 우리 스스로 “나는 과연 예수처럼 그런 사랑을 실천했는가?”라고 자문하여 볼 것이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예수께서는 공생애 삼 년 동안 참으로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나 살다 간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베드로를 위시한 11명만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얼마나 영광된 부르심의 자리이던가!

 

그러나 베드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그 자리가 그렇게 영광되고 복된 부르심의 자리인줄을 몰랐다. 주님이 붙잡혀가던 그 날에 그 제자들은 오로지 자기 목숨만을 보전하려고 모두 도망을 갔다. 예수께서 이미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다. 아실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까지 하셨다.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막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막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렇게 미리 직접 말씀하심은 어쩌면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 배반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채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시는 그 심정을 드러내신 일인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아무 오점도 남기지 않은 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가 있을까?

 

아벨과 에녹과 노아가 의인이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죄인이기에 아무 죄도 없이 살다 갔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럴지라도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후로는 정말 아무 흠 없이 그렇게 주를 섬기며 따른 자가 되기를 바라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 제자 베드로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말씀과 그런 마음으로 대하실 수 있었겠는가!

 

만약 나를 따르는 자가 곧 나를 배신하고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나는 과연 주님처럼 그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었을까?

 

그런 베드로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진심으로 사랑하셨음이 드러나는 그 성경 구절의 말씀이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였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또 예수께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며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모습도 보이셨다. 한 부자 청년이 구원을 사모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가상히 여기시고 그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 청년을 위해 깨닫도록 말씀의 은혜도 베푸셨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는 우리 역시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애를 쓴다면 주님의 그 사랑을 받아 누릴 수가 있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 잘못을 범할지라도 주님은 능히 우리의 그 허물을 사하시고, 사랑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과연 이 한 해 동안 우리는 그러한 정성을 드러내어 보였던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쫓아 떠났다. 그러나 그러한 자일지라도 주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선택된 우리에게는 그 사랑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기도하실 것이다. 이 약속이 참일 것에 대한 그 증거를 보이셨으니 그 일이 바로 자신을 배반할 그 제자들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도하심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택하신 자들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선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심이다. 그 제자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 선택하신 그 제자들이란 곧 구원을 얻게 될 우리를 대표한 자들이고, 그들을 위해 예수께서 끝까지 기도하심은 구원 얻을 자로 선택된 우리를 위해 끝까지 기도하실 것에 대한 그 증거가 됨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이처럼 애를 쓰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예수를 위해 애를 썼다면 예수의 그 복음에 관해 내 이웃에 있는 자들에게 분명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몇 명을 주님께로 데려왔느냐는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이다. 우리는 오직 말씀을 전하는 그 일에만 정성을 다하면 된다.

 

만약 그가 선택된 자였다면 그 복음에 응답하였을 것이고, 선택되지 않은, 유기된 자였다면 아무리 그에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되지 않은 고로 그 영혼은 죄로 인해 죽어있는 상태이기에 그 복음에 전혀 반응할 수 없음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한 해 동안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했을까?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 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요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그 마음속에 오로지 호의만을 지니고 계셨다. 그래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그들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드렸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그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신의 그 가르침을 완성하신 그 순간이었다.

 

예수의 이 모범을 과연 우리는 따라 할 수 있을까?

그럴지라도 우리에게 그리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셨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예수께서는 배반한 자와 원수 된 자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배반하고 떠났던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그를 용서함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찾아오실 수가 있었겠는가!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을 부인했던, 주님을 배반했던 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내 양을 돌보라 하심으로 그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거리로 삼은 저들도 미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의 그 무거운 죄를 아시고, 그 무거운 죄를 사하여 달라고 죽으시는 그 순간에도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그 기도를 하심으로써 그들을 용서하셨다.

 

주님의 그 마음, 원수에게 호의를 베푸는 그 마음을 닮자.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담아 이 한 해를 마무리하자.

원수를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그 위대한 모범을 친히 우리에게 보이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이같이 함으로써 이 한 해를 마감하자. 그것이 우리로서의 주님바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