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21.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주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치실 때에 그 따르는 무리에게 특별히 기도에 힘쓸 것을 말씀하시며 이렇게 가르치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한다는 것은 곧 기도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하는 그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가 기도하는 그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또 전지하신 자이시다. 그런고로 원하신다면 우리의 구하는 그 모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실 자이시다. 만약 그에게 그런 전능하심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기도하여 구하는 것을 능히 이루어주실 수 없을 것이니, 그런 경우라면 우리의 기도는 공허할 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전능자이시고, 또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는 그 기도는 결코 공허하지 않을 것이다.
(욥 36:5)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이 무궁하사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반면에 우리는 유한자이다. 능력에서 유한하며, 아는 지식에서도 유한하다. 유한자는 그래서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유한자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불완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애초에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그를 완전한 자로 지으시지 않으신 것은 그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그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하려 하심이었다. 따라서 그가 그 땅에 존재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은 신앙적 삶이 완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아담의 그 모습을 보심으로 기쁨을 얻으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능력이 유한한 고로 매 순간마다 능력 주시는 자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필요를 구하는 그 구함이 바로 기도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담의 경우에 그는 모든 면에서 유한하여 부족함을 채우는 그 일이 필요하였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 즉 신앙적인 면에서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그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이 자라가는 그것을 지켜보시는 그 일을 가장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그 의도는 그의 삶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가 사는 그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로 하여금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그 일을 금하심이 그런 의도에서 그리하셨음이었다.
그가 그 땅의 모든 들짐승과 하늘의 각종 새들의 이름을 능히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비교적 넉넉히 주셨음을 뜻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 즉 신앙적 지식과 지혜에서는 초보적인 자로 지으셨던 것이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그래서 그는 늘 하나님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부족을 채우는 그 일을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의 삶을 살았어야만 했다. 그 삶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이런 삶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는 그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그 일은 우리의 삶에 유익과 편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결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과 관련되는 그 일들이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해야 하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을 이루는 그 일과 관련된 그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참인 것은 주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신 그 가르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이 땅이 복음으로 충만하여질 그 일에 대한 구함이다.
왜 이 일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기도해야할 항목이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그 지으신 사람과 더불어 사는 그 관계 속에서 이루시려고 하셨다.
이 땅에서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룸으로써 누리는 그 행복보다 더큰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아내가 중한 병에 걸렸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려서라도 그 아내를 살리려 할 것이다. 아무리 큰 부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 재산을 아내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 남편의 그런 생각은 그 가정의 행복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줌이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아이가 유괴되었다면 아무리 큰돈을 요구하더라도 그 요구에 응한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바꾸자고 해도 그렇게 하고 만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심어두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일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는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그 일에 해당한다. 따라서 복음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되는 그 일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복음이 이 땅에 충만해지게 하는 그 일이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그것을 구하는 그 기도가 그래서 가장 귀한 것이기에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면 이 일은 과연 내개도 가장 소중한 일이 될까?
이 땅을 산다는 것은 참된 삶이 될 수 없다. 온갖 시험과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곳이 이 땅에서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게 될 참된 삶이란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참된 복이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는 더 이상 눈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런 자들에게는 진정으로 복된 삶이 약속될 것이니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할 수 없고 참된 제사장과 참된 왕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다시는 눈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리에 서는 그 일이 그의 나라를 구하는 그 기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이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대체적으로 초신자들은 아직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알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그 기도가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실 리는 없다. 그런데 신앙적 연륜이 깊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기도가 이런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 초신자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그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나님은 참된 의미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런고로 그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단지 기도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간구하는 그것을 허락하실까!
아버지 된 자가 그 아들이 떡을 달라했을 때 돌을 줄 자는 없다고 하셨다. 사람의 아비가 그러할진대 참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늘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애를 쓰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자신이 기도한 것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분명 내 기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 기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는지 아니면 나의 유익을 구한 세상적인 욕심으로 한 기도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그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실 때 ‘먼저’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우리의 구하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그 기도여야만 하는 것은 맞지만 오직 그 기도만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때로는 우리의 일용한 양식에 대한 그 기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그 사업을 할 때 세상재물이 전혀 필요가 없던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무슨 힘으로 복음을 전하겠는가!
이럴 때 필요한 기도는 세상의 물질을 구하는 그 기도가 될 수 있지만 그 필요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한나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것은 아들을 달라는 기도였다. 한 남자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그 한 여인이 한나였다. 그 대적 브닌나는 아들이 있었지만 한나는 무자하여 업신여김을 당하였던 것이다.
분한 마음에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며 매달렸다. 동기는 세상적인 욕망에서 시작한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아들을 허락하시니 이가 사무엘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지자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결국 한나의 그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비록 세상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그 기도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 서원, 즉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라고 함으로써 선지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겠노라는 그 서원을 하나님께서 외면치 않으셨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기도 속에도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삼상 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삼상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삼상 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삼상 1: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삼상 1: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삼상 1: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삼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삼상 1: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주님께서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그 말씀에 이어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 땅에서 믿음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의를 행하는 것이 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의 그 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의로움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에 의라는 것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의로움이 있지 않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의로움을 입는 그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반드시 그 의로움을 입어야만 한다. 이는 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런 의가 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그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이 기도를 하라하신 것이다. 이 기도를 하는 그 순간이 나의 마음의 빗장을 푸는 순간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안에 임할 수 있게 되니, 그 순간에 성령이 나를 감동시킴으로 내가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획득함이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날에 그리하셨으니, 그가 원하실 때 그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잘 드러낸 표현이 “~있으라 하시매 있었고,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였다.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그 하실 모든 일을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심으로써 이루게 하셨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일이 그렇고,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신 일도 그러하다. 솔로몬과 엘리사와 에스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한 그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심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도 그러했다.
(왕상 3: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대하 1:7) 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더 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신 것은 그 모든 공을 그 사람에게 돌리려 하심이셨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일을 결과하게 하려 하심이셨다. 외면상으로는 사람이 그 일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하심이 하신 것이 아니던가!
그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그 공로를 전가시켜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시려고 용기를 북돋워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를 통한 그 말씀이셨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구하라’는 것은 간구의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의사 표현이 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움직여주실까?
하나님은 나의 인격을 무시하고 당신의 뜻대로 막무가내로 행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교류를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의 간절함이 담긴 그 기도를 기다리신다. 이런 유의 기도만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노예나 종으로 부림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먼저 내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를 치른 날에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가 이끈 이스라엘이 이겼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결국 모세의 손은 그 전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모세의 손은 기도하는 손이었다. 그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이 전투에서 이겨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간구가 담긴 그 기도였고, 여호수아의 그 손과 발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손과 발이었다.
아무리 모세가 기도한들 여호수아의 그 움직임이 없었더라면 그 전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모세는 구하는 기도를 하였고, 여호수아는 찾는 기도를 함으로써 함께 하나님께 기도한 자들이 되었다. 결국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일을 이루었다.
(출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고자하는 그것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음을 암시한다. 구하는 그것이 얻어질 그 순간에 다다른 것이다. 그 순간에 멈추어 서게 되면 얻고자하는 그것이 얻어지겠는가!
마지막 그 순간에도 그 문이 열리도록 두드리는 그 일을 계속함이니 이는 간구의 기도를 마지막 그 순간까지 그치지 않는 인내를 요구하심에 대한 표현이다. 이처럼 집요하게 기도를 해보았는가?
기도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지쳐서 그만두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 간절함을 끝까지 지켜보신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며 구하는 그것이야 말로 참되게 구한 그것이 된다.
그것은 기도하는 그에게 참으로 귀한 보석과도 같은 것이 될 것이기에 그가 얻은 뒤에 그것을 가벼이 여기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구한 그것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이 시험해보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끝까지 인내하지 않고 구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쉽게 주시면 그 사람이 그것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며 간직할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그 일은 이처럼 소중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귀한 것을 얻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을 위해 구하는 그것이 이처럼 귀한 보석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주님의 그 가르침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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