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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by 영동장로교회 2023. 5. 28.

2023. 5. 28.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도대체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는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자들이었다. 과연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죄인의 신분으로 이 땅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는 자의 자리에 섰음을 의미한다. 믿음에서는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우리 역시 선민이라 할 것이다.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심이 다른 민족의 수효보다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이 가장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주장할 것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고로 그들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항상 겸손을 보여야만했던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그러했을까?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 땅의 어떤 족속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가!

그러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는 선민으로서의 그들의 그 자만심은 하늘을 찌를 만큼 강했다. 그러나 그들은 택하심을 입은 이 은혜에 대하여 곡해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자의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다른 족속들에게 나타내어보여야 하는 그 사명을 망각하게 만드는 그 일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 외에 또 다른 부작용으로는 타민족들에 대한 멸시 내지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 은혜로우심을 그 땅의 많은 족속들에게 드러내어 전해야하는 자신들의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결과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려고 선택한 족속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들의 실책이었다.

 

또한 그릇된 선민사상은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그 삶으로의 회귀를 이루기보다는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과 가치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보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끝내는 이것이 자만과 오만을 낳았고, 결국은 실수와 잘못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했다.

 

그런 그들임에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방치하여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들을 선택하셨기에 끝까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셨다. 그들을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주심이 그러했고, 끝내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이 그러했다. 그렇게 오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한 가지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그 말씀이셨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사람이면 누구든지 쉬운 것과 편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취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그 본능은 그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생겨난 것으로서 고약한 본성으로 되었다. 그래서 죄인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이루는 것은 많은 수고를 요하는 일이 되었다. 과연 그 땅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좋을 대로 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갔다.

(창 6: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특별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이스라엘 족속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또한 인격적 존재로 지으셨기에 그들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으셨다. 그러하셨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들의 그 죄악한 본성에 따른 그 선택을 하였기에 그 결정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그 일이 되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편안함은 신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사람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그 본능에 따라 편안함을 찾는다.

 

본능적인 욕구는 생존과 번식과 같은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고, 인지적인 욕구는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하고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 본능적인 욕구에 비하여 인지적인 욕구는 의지력이 요구되기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힘이 들 것이라는 말이다.

 

주님을 따르는 그 일 역시 우리의 의지적 노력을 요한다. 그냥 본능에 맡기면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에 그 본능은 죄로 향한다. 주님을 따르는 그 일은 이 죄로부터 역방향으로 나아감일 것이다. 죄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힘을 거슬러야만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그 뜻을 따르는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과 같이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 일은 영적으로 산 자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그 일을 행하는 것이기에 이 일에는 거짓 선지자와 위선자들을 분별하는 그 일이 선행되었고, 많은 고난과 시험을 견딜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이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을 결과하게 된다.

 

주님이 이 땅에서 가르치신 그 말씀들은 분명히 능력의 말씀들이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을 변화시키셨고, 또 다른 많은 자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셨다. 그러나 만약 그 땅에 있던 자들이 모두 죄인된 자일뿐이었다면 그 말씀이 능력을 보였을까?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전능하셔서 뜻하시는 바를 이루지 못하실 것이 없으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한 그 약속하신 바는 반드시 지켜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영적으로 죽은 자가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하신 것도 그가 정하신 것이니 정하신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셔야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들릴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인 되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라면 주님의 이 말씀은 아무런 능력을 보일 수가 없다. 이스라엘도 죄 중에서 태어난 자들이기에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주님은 그들에게 그런 말씀을 선포하셨을까?

 

하나님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이 땅의 모든 자들 중에 특별히 구별하여 살리실 자를 정하셨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민족적으로는 구원하실 족속으로 선택하셨다. 그래서 끝내는 이 족속들을 구원하여 살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시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깨달음에 이르게 하시려고 이방족속들 중에서도 구원하여 살리실 자를 정하시고 그 일을 선행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도록 하셨다. 이 일들이 완전하여지는 그 때까지는 이스라엘 족속들 가운데서 더러는 구원에 이를 자로 세우셨다.

 

그 뜻에 따라 그 족속들 가운데서 살리실 자를 정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하셔서 거듭남을 이루는 중생의 은혜를 입게 하셨다. 이 중생함을 입은 자들은 그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었다. 주님이 그 땅에서 사역하시던 그 때에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자들이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화되는 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려 하심이었다. 우리 역시 은혜로 산 자의 자리에 섰으니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그의 영혼이 소생된 자들은 주님의 그 말씀이 거울이 되어 자신들의 죄에 대해 깊은 뉘우침, 즉 회개를 이룰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이 말씀은 중생한 자들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이 음성을 듣는 중생한 자들이라면 주님의 그 말씀에 자신들을 비추어보고 얼마나 부끄러워했을까!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 자신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 즉 중생한 자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된 상태에 있었을 때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면 얼마나 송구스러웠을까!

중생함을 입은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함을 입어 영적 생명이 살아난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구별된 모습일 것이다.

 

영혼이 죽어있는 여전히 죄악한 자들, 즉 하나님의 살려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한 죄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착각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그런 주님을 비방하고 업신여기며 결국 구세주를 십자가에 매다는 그 일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다.

 

구원하는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애초에 죄악한 본성을 지닌 채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들의 본능에 따라 죄악한 본성이 추구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의 유익을 추구하는 그 일에 전혀 부끄러움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 조상들이 광야를 지나가는 생활을 하던 그 때에 그 광야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만나를 주셨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의 그런 은혜에 감사하기보다는 오직 자신들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바빴고, 그래서 그들은 그 하루분치의 일용할 만나만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러 날을 먹을 수 있는 만나를 챙겼지만 결국 모두 썩어버려 먹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다.

(출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출 16: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출 16: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출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출 16: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 16:21)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출 16:22) 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출 16: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출 16:24)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그러면 그들은 그 일에 대해 너무나도 부끄럽게 생각하여야 할 터이지만 그런 양심의 가책은 전혀 느끼지 못한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애초부터 구원할 자에게 포함시키지 않으셨으니 그들의 양심은 깨어날 수 없었다.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이니 양심이라는 것도 여전히 죽은 상태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만나를 통해 믿음의 백성되는 그 훈련을 시키고자 하심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그들의 2세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를 자들이었기에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많은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세상적인 욕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라 하심이었다. 많은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죄악한 본성이 추구하는 그 욕망이었을 것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나 그들은 만나를 통해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의도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후손들에게도 그 깨달음이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 중생함의 은혜를 입은 자들조차 중생함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중생한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주님이 지적하셨을 때 비로소 그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그들이었으니 그들로서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으로 이르시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선택된 자로서의 성화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셨다. 온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가 구할 지상최대의 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꿈조차 구원을 이루는 그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심으로써 구원의 은혜에 이르는 그 일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셨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스라엘 중에서 중생한 자로서 그런 말씀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자들은 모두 주님 앞에 나아왔고, 이 땅에 선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님의 그 가르침을 전하는 그 삶을 살아갔다. 선택되어 중생함의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는 과연 이런 깨달음이 있는가?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 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행 4: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 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만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 노력할 것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마땅히 할 바, 의무일 뿐이었다. 의무를 이행하는 책임을 다했다는 것으로는 결코 상급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