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30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자신의 시대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한 자들에 관하여”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최초의 사람 아담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성경 전체에 걸쳐서 기록되어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성경에 등장한 것은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으심일 것이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면 그 기록은 성경일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에 언급된 이름을 가진 자의 그 삶은 분명히 우리의 구원에 대해 무엇인가를 교훈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성경에 언급된 여러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가 선지자라고 칭하는 자들의 그 삶은 우리에게 어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것일까?
모세는 난지 삼 개월 만에 나일강에 버려졌다. 나일강에 버려졌다는 것은 곧 죽음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난지 석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강에 버려졌다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출 2:1)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출 2: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출 2: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 2: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의 딸에 의해 건짐을 받았다. 목숨을 건졌다는 말이다. 모세가 강물에 버려졌다가 건짐을 받은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세는 아담의 죄를 유전받은 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원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였다는 것이 그가 강물에 버려짐으로써 드러났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자의 모습이 어린 모세의 이 사건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손을 통해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곧 죄인되어 죽을 처지에 놓였던 자가 구원을 얻어 살 자가 되어진 그 일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바로의 공주의 손에 의해 건짐을 받은 이 일이 우연이었을까?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출 2: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에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출 2: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강에서 건짐을 입은 모세가 젖을 먹고 자란 후에 바로의 공주 앞에 데려감을 입었고, 그때 그를 건져준 바로의 공주가 이르기를 “이는 내 아들이니라”고 했다. 건져주어 목숨을 구해준 자의 아들이 되었다는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죄로 인해 죽을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게 된 그것에 대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출 2: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출 2: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출 2: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출 2: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그렇게 애굽의 왕자로 자란 모세가 광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사십년을 지내게 된 것은 구원 얻을 자의 그 연단을 상징한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을 자의 자리에 섰다할지라도 그 순간의 그는 여전히 죄악한 본성을 그대로 지녔기에 도무지 하나님과 함께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악한 본성이 여전하므로 절대 선하심을 지닌 하나님과 어찌 마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득불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하지 못한 죄를 제하시는 그 일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하나님 편에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자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성화를 이루는 훈련을 받게 하셨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 연단을 받은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교만과 스스로 의롭다 하는 그것을 제하는 훈련을 받게 하셨다. 그렇게 40년이 지남으로써 모세는 지극히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그가 팔십 세가 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팔십은 팔에 십이 곱해진 숫자이다. 팔과 십으로 이루어진 이 숫자에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어떤 의도가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팔이라는 숫자는 칠 다음의 숫자이고, 칠은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그 모든 창조를 마치신 후에 안식을 취하신 날이었다.
(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안식한 이 일곱째 날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하나님과 함께 할 그 날을 상징한다. 여섯째 날까지는 모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있지만 일곱째 날인 안식하던 그 날에는 이 표현이 없다.
저녁이 된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그 일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침이 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이 표현 속에는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를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시는 그 일을 행하심에 대한 암시가 담겨진 그 표현이다.
그래서 여섯째 날까지의 그 일들은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에 관계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한 암시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그 안식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그 날에 대한 상징이다.
구원이 완성되었으니 더 이상 죄로 인한 죽음의 그 두려움은 존재할 수 없고, 다시 살 것에 대한 소망 그 자체는 이미 이루어져 더 이상 소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그 표현은 맞지 않음이다. 그래서 그 표현이 없는 것이다.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구원이 완성된 그 일곱째 날 다음이 여듧째 날, 즉 팔일이다. 그래서 이 팔일은 구원의 은혜를 입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날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의 그 깨달음을 얻은 그 이후의 삶이 바로 팔일에서 시작된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난지 팔일 만에 행하라고 명하심으로 “이는 내가 선택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로 한 자이니, 그것을 기념하여 징표로 삼으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듭난 새 새명을 얻은 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라는 그 명령이 주어진 그 날이 할례를 베푸는 그 날인 것이다.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레 12:3)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새롭게 여듧 번째에 해당하는 월요일을 시작하게 하신 것도 주일을 통해 새롭게 된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날로 삼으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세가 팔십 세에 부름을 받은 이 일은 그가 그 광야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온전하게 거듭남이 완성된 그 날을 의미하고, 또한 이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그 날임을 암시하는 그 숫자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그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에 적당한 정도가 아니라 만족하실만한 정도라는 것이 그 팔에 이은 십이라는 숫자에 담긴 의미로써 이해할 수 있다. 십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실 때 특별히 열 가지를 들어 십계명을 주심이 믿음의 백성이 완전하여지고, 온전한 믿음을 이루게 하시려는 그 열망이 담긴 표현이 이 열 가지로 드러남이었다. 하나님께 드릴 대표적인 예물을 십일조로 정하신 것도 믿음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릴 온전하고, 완전한 것 중의 최소한을 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십이란 하나님 앞에 완전함과 온전함을 상징하는 그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팔십이었다는 것은 구원 얻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주시는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에 합당하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주어진 정하신 때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한 사람 모세로서 어찌 그 땅의 최고 권력자 바로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감히 그 바로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그 시대에 누가 있을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을 자로 약속된 그 자리에 선 모세로서는 하나님 앞에 구원의 큰 빚을 진 자가 되었다. 빚진 자 모세로서는 그 시대에 자신이 어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인지를 그가 팔십에 이른 그 날에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고, 그는 오직 믿음으로 그 사명을 감당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사랑한 이스라엘 족속들을 구원해 내는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내었다. 그 일은 모세로서 자신의 시대에 스스로 감당한 사명이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해낸 그 일은 오직 한 번뿐이었고, 그 일을 모세가 해냄으로써 그 일은 모세만이 그 자신에게 주어졌던 그 시대에 그가 감당한 하나님의 사명이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하여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그는 오실 주님을 예표하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난 후에 결국 그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책임 물으심을 당하게 되어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맞게 될 그 무렵에 한 선지자가 나타났다. 눈물의 선지자라 불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였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로 선택함을 받았다는 그 사실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는 표현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이다.
영원한 그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별하여 선택하셨다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가 받은 그 은혜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이는 이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기쁨이다. 그리고 또한 태어나기도 전에 구별하셨다는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그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리에 선 것이 아님에 대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구원을 받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또한 빚진 자로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로 부름 받은 그 일에 대해 또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 표현이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였다. 이 표현 속에는 사명자로서의 그의 비장함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혼돈의 시대에 열방의 선지자로서 그 사명을 감당한다면 그 땅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의 그 비위를 거스릴 수 있는 말을 하여야 할 것인데, 그에 따르는 그 고난은 가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애굽과 바벨론과 유다의 이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그가 던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불난 곳에 화약을 던져 부음과도 같을 것인데, 그들이 그 말씀에 순순히 따랐을까!
그런 선지자로서의 삶이 과연 복되다 할 수 있을까!
그의 선지자로서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참으로 불행한 삶이었을 것이다.
(렘 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 1:3)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렘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이 엄청난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스스로 느꼈을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았겠는가!
격동의 시대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메시지에 대한 그 부담이 얼마나 컸을까!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것마저도 힘들 정도의 시대라는 것을 안다면 누구라도 예레미야처럼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움추려 들어가는 그 말을 내뱉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한한 능력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고백이 바로 그 말이었다.
(렘 1: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그 일이 사람의 욕심에서 이루려는 그 일이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이니 하나님이 모른 척 하시고 눈을 감으시겠는가!
모세가 스스로 입이 둔한 자라고 말할 때 그 입에 할 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움추려드는 예레미야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셨다.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고 하심으로써 그의 능력이 되어주며, 힘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 능력으로 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세상적인 학문을 통달하여 참으로 능력있는 자였던 바울도 에덴에서의 그 사역에서는 실패했다.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루리라고 했을 때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능력있는 바울도 실패했는데, 우리라고 가능할까!
아덴 사람들은 헬라철학에 정통했으니 바울도 철학적으로 전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롱하거나 다시 듣겠다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것은 바울의 전도가 실패했음을 의미하고, 바울 자신도 다시는 그런 세상적인 철학이나 방법으로 전도하지 않을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는 말 속에 담아 표현했다.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과 그의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할 것이다.
(렘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렘 1: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아나돗 땅으로 향하던 예레미야가 유다의 반바벨론파에 속하는 방백에게 붙잡혀 매를 맞고 토굴 속에 갇혔다. 이 일은 그들이 예레미야가 바벨론에게 항복을 하러 간다는 협의를 덮어씌움이었다.
(렘 37: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렘 37: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하여
(렘 37: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로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렘 37:14)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렘 37:15) 방백들이 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으로 옥을 삼았음이더라
(렘 37:16)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여러 날 만에
(렘 37:17)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렘 37:18)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관대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렘 37:19)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이 일이 일어났던 그 때의 유다는 이미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있었고, 그래서 요시야왕의 셋째 아들인 맛다니야가 바벨론의 왕에 의해 이름이 시드기야로 바뀌어진 상태에서 유다의 왕위에 있던 상황이었다.
(왕하 24: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언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왕으로 기록에 남았다. 비록 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하였을지라도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것이었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예레미야가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염병에 모두 죽을 것이고, 만일 항복하면 살 것이라고 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택하여 유다를 징계하시기로 정하셨으니 이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로인해 예레미야는 방백들에 의해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졌으니 그 구덩이는 진흙구덩이였다.
(렘 38:1)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밀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렘 38: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살리라
(렘 38: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렘 38:4)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렘 38:5) 시드기야 왕이 가로되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
(렘 38:6)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
죽음을 무릎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한 선지자로서, 또 자신의 이웃인 유다족속을 사랑했기에 감당해야만했던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감당한 선지자로서의 예레미야의 그 삶은 오직 그 시대, 예레미야가 살아가던 그 시대에 예레미야가 감당해야만했던 예레미야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결국 애굽에서 유다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의 삶은 전적으로 오실 주님의 그 사역을 예표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오실 주님을 예표하는 자가 되었다.
엘리야는 성경에 등장한 참으로 환상적인 삶을 산 선지자였다. 그가 살았던 북쪽이스라엘은 이세벨이라는 참으로 잔인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왕비가 현존하던 때였다. 그의 남편 아합은 이세벨의 허수아비처럼 움직였다. 이세벨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했으면 요한계시록에 거짓 선지자로서의 이세벨 이름이 등장하기까지 했을까!
(계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의 이 악독한 탄압 때문에 그 땅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았다. 대신에 많은 선지자라 하는 자들이 이 이세벨의 편에 가담하여 우상을 섬기는 그 일을 자행했다. 이때에 오직 한 사람 엘리야만이 그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하고 갈멜산에서 이세벨의 거짓 선지자들과 영적 전투를 벌였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왕상 18: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왕상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왕상 18: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왕상 18: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 18: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왕상 18: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 18: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왕상 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왕상 18: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왕상 18: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왕상 18: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전투를 승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일은 엘리야가 자신이 살아가던 그 시대에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시대적 소명을 감당한 일이었다. 엘리야가 그 사명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셨다.
성경에 등장한 이들 선지자들의 삶은 서로 전혀 다른 모양이었지만 공통된 것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그들의 그 삶이 자신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맡기신 사명을 완수한 그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의 시대에서 시대적 사명을 바르게 깨달았기에 그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고,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그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사랑한 행위가 되었고, 그 사명은 그 땅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을 살리는 그 일이 되었기에 이웃을 사랑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여 수행한 것은 율법을 모두 이루는 일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결과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성경 속에 그들의 삶이 기록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 사랑하는 줄을 드러내어 보이라 하심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순간에 하나님은 “이제사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로 알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그 일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신 그 일이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함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아브라함은 그때 그 순간에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자가 되었고, 결국 그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과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하라는 것일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악한 말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함이 없이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시 34: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시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시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서 자원하여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그 징표를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시대의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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