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4.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누군가가 예수께 나아와 구원을 얻는 자의 수가 적으냐고 물었다.
(눅 13: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성경은 이 질문을 한 자가 누구인지는 밝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 성경에 이 질문이 등장한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유대교 안에서는 이 질문에 등장하는 대로 구원얻는 자의 숫자가 얼마일까 하는 것이 중대한 관심사였고, 그래서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이 질문을 한 자 역시 그 당시 주요 관심사였던 이 주제를 예수께 던짐으로써 예수로 하여금 궁지에 몰리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들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예수께서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하실 때 구원 얻는 자의 숫자가 많다고 하면 어찌 저런 죄 많은 자도 구원하시느냐고 트집을 잡아 하나님을 무르신 하나님이 되게 만든다고 하면서 예수를 비난하였을 것이다.
또 만약 예수께서 그 숫자가 적다고 하면 하나님을 엄격하고 딱딱한 무정한 하나님으로 만든다고 하면서 예수를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려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난해한 질문을 만들어서 예수께 다가왔었다. 이 경우도 그와 같은 사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다. 그래서 자신은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때의 유대인들도 대체적으로 그러했다.
그들은 모세가 가르쳐준 그 율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여기고 오직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힘을 썼다. 모세가 가르친 그 율법의 내면에 감추어져있는 하나님의 그 뜻은 무시한 채 습관적으로 율법의 외형만 고수한 그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행하는 그것이 거룩한 일이라 여겼고,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은 구원에 이를 자들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런 그들이기에 당연히 이 질문도 내가 아닌 남인 그들에 대해서 구원에 이를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 시비를 가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신앙적 고정관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족속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다. 그래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그들의 조상으로 세우신 후에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때가 되매 한 선지자 모세를 세워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심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하나님의 그 뜻을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삶을 살았더라면 그들 모두는 구원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신앙적 삶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일어났다.
세상이 어떤 곳이던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 세상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그들일지라도 믿음 안에서 깨어있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필경은 사단의 지배 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믿음에 변질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변질은 믿음에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된다. 본문에서의 그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상태에 놓여진 자들이었으니 그들의 신앙 속에서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마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 25: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골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이 오래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는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은 모두 사라져버렸고 신앙적 아집만 두껍게 형성되어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그런 신앙으로 변질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그래서 늘 믿음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사단의 지배 아래에 놓인 자는 사단에 속하였으니 당연히 사단의 그 뜻을 따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 즉 죄를 이루는 그 삶이 된다.
그런 삶을 산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당연히 그 결과는 구원에서의 이탈이니 그 경우에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그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었다할 것인가!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모른체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니 그것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되는 그 자리로 돌아오라 부르시는 그 일을 행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돌로 치기도 하였다. 이 일을 주님께서 성전에서 말씀하실 때 이 사실도 함께 언급하시기도 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들로 부르셨으면 아예 그 이후로는 그들의 믿음이 변치 않도록 그렇게 만드셔서 사단의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보고만 계셨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인격을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시기에 우리의 인격을 훼손하는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는 분명히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능히 그렇게 조치를 하셔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하셨다면 그 행하신 그 일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지 없는 자가 되게 하는 그 일이 되고 만다.
스스로 행하는 일, 즉 자율하는 것이 참된 자유자가 되는 것이며, 자유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선택된 자에게 사단의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그런 장치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원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그 일을 기대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하나님께서는 참된 기쁨을 누리실 수 있으시고, 그래서 그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일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의지를 최대로 발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바로 우리의 삶이며, 그런 삶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생활인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아 참된 신앙생활을 하였더라면 감히 예수께 “구원에 이를 자가 적지요,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진 이런 질문은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질문 속에는 유대인들의 신앙적 교만도 감추어져 있었다.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에 이를 수 있는 훌륭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 교만이 감추어져 있음이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때의 주님께서 느꼈을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바로 그 교만이 그들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있기에 그런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불러들이려고 오신 자가 바로 주님이신 예수가 아니시던가!
그래서 주님은 그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그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자신의 사역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 시점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그 심정이야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셨을까?
이 심정이 잘 드러난 기사가 바로 이 사건이 기록된 그 앞부분의 이야기이다. 빌라도가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그 일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 죽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그런 반면에 자신들은 죽지 않았으니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으니 이는 당연히 구원을 얻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는 그릇된 교만이 가득하였음을 능히 드러내어 보임이었다. 과연 그들이 그런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들이었을까?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성자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의 그 마음을 모르실리가 없으셨고, 또 그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도 아셨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과 그 마음으로 하실 그 뜻이 바로 주님의 대답에서 드러나셨다.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즉 이 말씀은 그들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말씀이시다.
자신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의 그 대답으로 하나님은 그들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스스로 선줄로 여기지 말고 넘어질까 늘 조심하라는 그 말씀의 교훈은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교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참으로 귀중한 교훈이 되고 있다.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들의 그 질문은 주를 시험하는 질문이었지만 결국은 자신들을 넘어지게 하는 그 질문이었으니 참으로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주님의 입장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는 그들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을까! 어쩌면 그런 그들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분명하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셨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인가?
(눅 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일, 즉 자신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그 일이다. 만약 그들이 의인이었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죄인이 이 땅에 없었더라면 구세주를 보내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인이지만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 중에서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그들을 살리시려고 자신의 독생자이신 성자하나님을 구세주로 삼아 이 땅에 보내셨다. 그가 바로 예수이시다.
그런고로 예수는 성삼위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자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죄인 중에서 특별히 선택하신 그 죄인을 살리시려고 오셨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그 고백이 없이는 그에게 그 죄를 사해주는 일, 즉 ‘칭의’를 하실 수가 없다.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 (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는 바로 이 회개에서부터 시작된다. 회개를 한 자만이 주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을 수 있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할 때, 나의 이 죄를 사해줄 자를 찾을 수 있게 되니, 이 죄를 사해줄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이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아담이 하나님과의 그 행위언약을 위반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를 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자하나님이신 그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그 예수만이 이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세자이시다.
그 예수가 내 죄를 사해주실 수 있으시며, 내 죄가 사함 받음으로써 내가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자, 즉 의인으로 인정받는 그 일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바로 ‘칭의’이다. 내가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음으로써, 드디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그 관계는 바로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다시 창조하시는 자,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 일은 내가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그것이니, 즉 이를 ‘수양(收養)’이라 한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래서 결국은 내가 천국의 소유자가 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니, 결국은 내 구원이 이루어져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며 화평을 누리는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일이 천국의 백성되는 그 일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이루는 그 일은 회개가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주 예수께서 그토록 회개하라고 외치며 가르치신 것이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 회개는 언제까지든지 기회가 주어지는 그 일이 아니다. 어쩌면 평생에 그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자는 전혀 구원을 얻을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
(눅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무정하신 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자, 즉 가장 복된 자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 하에 둠으로써 그것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왕의 지위에 있는 자로 지음을 입었다. 그 이상의 복은 더 있을 수 없는 그렇게 가장 완벽하게 복된 자로 지음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의 시조 아담이었다.
이 땅에 있는 누구라도 이미 그의 허리에 있는 자로 모두 선택되었으니 만약 아담이 그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아담의 그 복이 모두 자신의 것으로 될 수 있는 그런 지위에 있었던 자가 바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에게 은혜로 주어진 그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죄를 범함으로써 죄인된 자리에 섰고,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죄인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죄인된 자가 그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일이 되지 못한다. 더더군다나 그런 자를 하나님이 외면하여 버려두심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 일은 언어도단이다.
그런데 그런 죄인들 중에 특별히 구원할 자를 선택하셨으니, 이것이 구원하여 살리실 자를 ‘예정’하심이다. 그러면 누구는 선택하여 살리는 그 은혜를 입게 하고, 누구는 버려두어 외면하시는 그것은 정당한가?
이사야 선지자와 사도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이 주권에 대한 변호를 하였다. 과연 그러하다. 토기장이가 한 줌의 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토기장이의 고유한 주권이니 그 그릇들이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그런데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촉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죄인들에게 베푸신 은혜였다.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도 분명히 그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도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을 농락하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아닌가?
구원하여 살려주실 것도 아니면서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권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을 놀리는 일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모두가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마음이 잘 드러난 것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 가운데 언급하신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는 그 표현 속에 담겨져 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런데 왜 그런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구별하여 선택하셨을까?
죄인된 자는 이미 하나님을 향하는 그 영이 죽어있는 상태이다. 그 영이 죽어있는 상태이니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겠는가!
주님이 하나님이실지라도 영이 죽어 있는 그들에게 하시는 그 말씀은 결코 그들의 귀에 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 전해진 그 말씀은 아무런 능력도 행할 수 없고, 결국 그들을 회개하는 자리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나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살리시기로 정하신 그들은 중생하는 은혜를 받아 누린다. 즉, 다시 태어남을 입는 재창조의 역사가 그들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죽어있던 영이 살아났으니 당연히 주님의 그 음성을 알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 중에 더러는 주님의 그 복음을 듣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백성된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역사는 오직 성령하나님의 그 은혜의 역사였다. 성령하나님의 나를 중생시키는 그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제자된 자리에 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리에 나아올 수 있게 하시려고 특별히 죄인들 중에서 더러는 구원하여 살리실 자로 구별하여 선택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그 말씀은 또한 거듭난 자로서의 책임과 그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이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살리실 자로 선택하시는 그 은혜를 베푸셨지만 우리의 정성을 무시하시는 그 일까지 하시지는 않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노력도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그렇게도 하실 수가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 되었을까?
우리가 그런 구원을 얻는다면 그 일에 대해 우리의 상급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또 그 이상의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계획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일을 이 땅에서 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그 삶을 이 땅에서 미리 연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이 바로 ‘성화’이다. 이 성화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게 하는 그 일을 결과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상주시는 그 일의 근거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주의 가르침을 듣는” 그 일은 나의 세상적 욕망을 이루기 위한 그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일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겉모습으로는 그런 일을 행했을지라도 그 일들이 모두 자신들의 세상적 욕망이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꼬집어 말씀하셨다. 그것이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는 그 말씀이었다.
(눅 13: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눅 13: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눅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런고로 그들은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 주님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는 그 말씀이었다.
만약에 그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이 자신들의 그 주장대로 그들 모두가 의로운 자였다면 과연 주님이 그들 가운데 오실 이유가 있었을까?
많은 이 땅의 죄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시기를 정하신 그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주님께서 이 땅의 많은 족속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 족속을 택하셔서 오신 것은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그들 중에서 죄인되었지만 특별히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할 자가 분명히 있었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죄인들 중에서 선택함을 입은 구원받을 자의 주님이시다. 그런고로 자신들이 믿음 안에서 의로운 자로 여기고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 그 주장대로 그들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었음이 주님이 그들 가운데 오심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얻는 자의 수가 적으냐”고 묻기보다는 “내가 죄인이니 어찌하면 구원을 얻겠나이까”하고 물었어야만했다.
오늘 우리라면 과연 어떤 질문을 하였을까?
분명히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오셨다고 밝히셨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도대체 그들은 부끄러워하기나 하였을까?
어쩌면 그들의 그런 염치없고 뻔뻔함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있을지 모른다.
'주일설교-링크 클릭하면 재생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0) | 2023.05.28 |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0) | 2023.05.21 |
주님의 신부된 자에 관하여 (0) | 2023.05.07 |
자신의 사명을 감당한 자들 (0) | 2023.04.30 |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사랑,그리고 택하신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 (0) | 202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