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6.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이다. 좋은 일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아니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고, 이를 시정할 목적으로 쓴 글이 바로 고린도서이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분쟁이 생겨났다. 어떤 이는 스스로 바울에게 속하였다하고, 또 어떤 이는 아볼로에게, 또 어떤 이는 게바에게, 또 어떤 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서로 주장하는 분쟁이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에 왜 이와 같은 분쟁이 생겨났을까?
(고전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 1: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어떤 주석가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에서 바울을 너무나도 존경하여 그를 따르려고 한 무리들이 주축이 된 파당이 바울파였고, 비교적 학식있는 자들이 그때 학식이 높았던 아볼로를 존경하여 따른 자들의 무리가 아볼로파였고, 율법 위주로 믿음을 고수한 자들은 게바를 따르는 입장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 정도의 이유로 그들이 파당을 지었을까?
사람의 본성에는 남들보다 내가 나아 보이려고 하는 욕심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인 그들은 유력한 지도자를 추종함으로써 자신들이 우월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이름 있는 이런 지도자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지목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여 보다 영향력이 있는 위치를 장악하려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과연 그들이 바른 신앙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이런 행태를 보인 그 근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 출석했지만 아직 복음의 근본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가련한 인생들을 구원하여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발로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복음의 본질은 사랑이다. 이 사랑에 대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르게 깨달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이 이런 사랑을 이해했더라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그 일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행하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내가 누구에게 속했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며 자신을 높이려고 했을까?
유한자는 무한자의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유치원아이들이 벌코프의 그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벌코프도 유한자이며, 아인슈타인도 유한자이다. 이들과 같은 유한자들의 그 생각도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전능자이며, 무한자인 하나님의 그 뜻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이 고린도서신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라고 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고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그 지혜를 다 알 수 있겠는가!
욥도 하나님께서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고 고백하고 있고, 다윗도 하나님의 의와 구원에 대하여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욥 5: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욥 9: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욥 37:23)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 하심이라
(시 71: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속성이신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인들로서는 그 깨달음이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그 복음에 대해 표적을 구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7)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그들이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더라면 자신들을 살리시려고 메시야를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해 깊이 감사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예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음으로써 복음을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헬라철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 인간인 그들의 생각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었고, 그들은 그 철학에 갇혔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철학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헬라철학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그것으로 어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러했으니 성자하나님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그 사랑은 또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고로 그들에게 전해진 그 복음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미련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그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로 들렸을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인의 죄를 대신지고 죽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죽은 자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소리였을 것이다. 어찌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말인가!
부활은 그들로서는 도무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런 것을 말하고 다니는 자들이 그들의 눈에는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그들의 눈에는 참으로 미련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어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대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세상적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그 일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자랑을 담은 그 공력을 바울은 그리스도를 터로 한 그 위에 세운 나무나 풀이나 짚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것들은 불에 얼마나 잘 타는 것들인가!
그래서 이런 공력을 세운 자들은 해를 받을 것인데, 이런 자들이 받을 구원은 불 가운데 얻는 구원이라고 바울은 표현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복음에 빚을 진 자들이기에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의 빚도 또한 진 자들임을 깊이 깨달았어야만 했다. 그랬다면 주의 은혜로 거듭난 자신들이 얼마나 거룩한 존재들인지도 알았을 것이고, 자신들의 심중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여 모셨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셨을 것이고, 그들의 심중은 하나님의 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교훈하심으로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과연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셨을까?
여전히 세상적인 욕망으로 가득했으니 하나님께서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라도 있었을까!
주님도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그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그 마음속에 세상적인 욕심이 가득함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늘 주님이 계심으로 그들의 마음속이 주님의 거처가 되기를 원하셨음이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세상 욕심으로 가득하였을 뿐이었으니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우리 역시 그런지도 모른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여전히 속마음에는 세상적인 욕망이 가득하여 주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단지 창고일 뿐이지 결코 성전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만으로 가득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는 그 공간이라면 이는 진정으로 성전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자신을 미워함이다.
왜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
이는 참 지혜가 없음 때문이다.
참된 지혜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자신을 또한 바르게 알 수 있음이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주장할 수 있을까?
지극히 겸손한 자의 자리에 섬이 하나님을 아는 자가 취할 행동이다. 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 진리를 알기에는 아직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스스로 미련한 자가 되라고 훈계하고 있었다.
(고전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 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린도교회는 세상교회의 축소판이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이제 겨우 신앙생활에 들어간 신입 신자들이 모인 초보교회의 전형이었다. 초보교회로서의 고린도교회에서는 심지어 이방인들 중에서도 없을 그런 음행이 있기도 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음에도 그들 모두는 이를 묵과하기도 했다.
(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어쩌면 드러난 것이 그 일이었을 것이고, 다른 이들도 그리했지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랬으니 그들의 행동이 그와 같았을 것이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분명히 간음하지 말라했다.
(신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
(신 5:18) 간음하지도 말지니라
(신 5:19)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
(신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
(신 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간음한다는 것은 그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음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았더라면 이웃에 대한 그 사랑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음행하는 그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온전하지 못했기에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그런 음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속에 악함을 용납하지 않음이다. 만약 그 속에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용납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영원한 파멸로 인도하고자 함이다. 이런 일을 어찌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교회는 한 지체이므로 그 속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자기 사랑에 대한 이 진리를 고린도교회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에 교회 내에 존재하는 그 음행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명했다. 어떤 형제라 함은 교회 안에 거하는 같은 교인된 자를 말한다. 음행한 그 교인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로서의 사랑함이다.
(고전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전 5: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고전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그러나 교회 밖의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자들과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그 이유는 기회가 주어진 자에게 대해서는 책임 물으심이 따름에 있다. 이미 복음을 듣고 기회를 얻은 그런 자들이기에 그런 자들이 그런 짓을 행하는 것은 알고도 행함이 된다. 따라서 이는 마땅히 하나님의 책임 물으심에 해당하는 일이 되기에 그 책임을 따라 그들과의 사귐을 금하는 것이다.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나 이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그런 일을 행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행함이었으니 그런 자들에게는 기회를 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기회를 주기위해 그들과는 사귐이 필요하였다. 이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도무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교우들 간에 다툼이 있었고, 급기야는 그 다툼을 세상의 판단에 맡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고린도교회의 이 모습이 그 옛날에만 있었던 지나간 이야기일 뿐일까?
어쩌면 지금의 이 땅에 있는 교회의 그 모습을 고린도교회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교훈은 그의 사랑에 관한 교훈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믿음 안에서 능력을 행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의 이 가르침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달았더라면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는 일은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고, 송사를 벌이며 세상의 재판장에 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음행하는 일과 그런 자를 징계하는 일을 미루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믿음과 소망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정말로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면 그때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믿음은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지속되어야할 그것이다. 소망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에 대한 그 기대를 담은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는 참으로 소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에는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다. 그래서 더 이상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그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할 그 일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중요한 덕목으로서는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을 제일이라고 강조하여 교훈한 것이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는 이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믿음에서의 지식 없음으로 인한 그 비극들이었다. 믿음의 수준에서 초등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이 고린도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바울의 이 심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은혜로 비교적 온전한 깨달음에 이른 그의 입장에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의 이 답답한
행실에 대해 얼마나 속이 탔으면 이렇게까지 살뜰하게 교훈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사랑에 대해 무지한 이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이 섬기는 이 땅의 교회들의 그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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