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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사랑,그리고 택하신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

by 영동장로교회 2023. 4. 23.

2023. 4. 23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사랑,

그리고 택하신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얻어오던 그 날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모세는 어떤 의도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 또 이 기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로 소식이 없자 그가 죽은 줄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모세가 그 산에 올라간 지가 사십일이나 지났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사십 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는데 살 수 있을까!

(24: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니라

(24: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는 모세가 죽었다고 믿었다. 이제 그 모세가 죽고 없으니 모세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이 있어야 하겠다하고 그 신을 만들자고 요구한 것이다.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라

 

그들의 요구는 과격했다. 그 요구가 얼마나 과격하게 흘러갔을지는 아론이 취한 행동에서 알 수 있다. 아론은 제사장이니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드는 그 일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능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론이 우상을 만드는 그 일을 행했다. 아론이 그리한 것은 만약 그들의 요구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는다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요구에 아론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우상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 대신에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의 귀에 매달린 금고리를 가져오라고 했다.

 

금고리는 여자들의 치장용으로 귀한 장식품이니 그것을 가져오라하면 그들이 쉽게 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 금 송아지를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꾀를 낸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들을 인도하던 모세가 없어지자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고, 그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들을 인도할 인도자로서의 새로운 신에 대한 갈구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 욕구는 이성을 넘어 광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신앙적 어리석음은 이와 같은 광기를 지닐 수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그들의 과격한 행동은 아론으로 하여금 그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2: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그래서 금송아지가 만들어졌다. 애굽에서 그들이 늘 보아왔던 그런 새겨 만든 우상이었다. 애굽에서는 여러 형상을 새겨 만든 우상들을 신이라고 섬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그곳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살 때에 그것을 보며 살았기에 그 우상들에 대해 친숙했을 것이다.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기에는 그들의 신앙적 수준은 참으로 미숙했다.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보이는 신인 우상에 대해 더 익숙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보고서야 믿는 자들로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었다.

 

우리 중에서라도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니 계시므로 내게 응답하지 않음이로다“하고 신앙생활을 포기해버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그런 자들 중의 하나였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에 대해 보지 못하고서는 믿지 못하겠노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보지 못하고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해주셨다. 참된 믿음은 진리에 대한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믿음에 대해 과학적 증거를 구하는 일을 하고 있음은 어찌하랴!

 

홍해 바다가 갈라진 과학적 증거를 찾아 헤매고, 노아의 그 방주를 찾아다니는 그 일을 한다. 주님이 부활하신 그 증거를 요구하며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어찌 천국이 존재함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가!

성경적 증언에 기초한 그 지식과 이에 대한 확신과 찬동만으로도 능히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들이 만든 신은 애굽에서 본 아피스(Apis)였다. 아피스는 황소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드디어 보이는 신을 만듦으로써 그들은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무지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인도한 그 모세를 신처럼 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자리를 비운 그 시간동안에 그들은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피스를 본 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으니, 그래서 안심이 되었고, 그들은 마음껏 즐겼다. 그 즐김은 오직 육체적 만족을 위한 그 즐김이었을 것이다.

(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이 순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줄을 전혀 몰랐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절일이라 말한 그 날에 하나님을 위하는 그 일보다 자신들의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이스라엘과 같을지도 모른다. 주일이라는 그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그 일을 더 먼저 생각하고 행하고 있음 때문이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행할 때가 많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 불편을 해소하려고 교회를 간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을 섬기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러간다고 표현한다. 스스로 구경꾼이라고 고백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예배가 짐스러울 수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 예배에 대한 기쁨이 없다면 한 번쯤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상을 만들고 스스로 쾌락을 즐기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에 하나님이 진노를 표하셨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하셨을까?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자이시다.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입을 닫고 계신다면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진노를 표하시는 그 행위는 의로운 자를 사랑하셔서 그를 지극히 아껴 보호하시려는 그 배려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하나님이 이런 행위에 대해 눈을 감으시면 의로운 자가 도리어 해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됨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의로운 자를 사랑하신다 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이라 말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택하신 족속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그들을 모세의 백성, 네 백성이라고 하신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모세를 선택하셨다. 다시 말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일에 모세가 얼마나 헌신하는지를 보시려고 물으신 그 물음이 바로 네 백성 이스라엘이었다.

 

그렇다면 모세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했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구원해 내어야 할 그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얼마나 그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느냐로 평가될 수 있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의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려하심이었다.

 

만약 모세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왕과 같이 군림할 자로서의 욕심을 가졌더라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하나님의 그 제안, 즉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모세에게서 난 후손들로 나라를 이루려고 한 그 제안을 재빨리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오직 그들만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구원해 낼 수 있는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말씀에 그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주의 백성이라고 분명히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그 사랑을 드러내어 말했다.

 

이 표현을 담아 모세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진노하시지 말 것을 간절히 애원하는 그 기도를 드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

 

모세는 그 때 이스라엘의 왕과 같은 권력을 지닌 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모세는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탐하는 일을 단 한번이라도 행한 적이 없었다. 죽는 그 날까지 오직 자신이 사랑한 그 이스라엘 족속들의 생명을 구하는 그 일에만 헌신하였다. 평생에 이 같은 사랑을 그 백성들에게 쏟아 부은 왕이 있었던가!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은 모세처럼 그렇게 세상적인 욕심 없이, 오직 자신이 돌보아야할 성도들만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이 사실을 확인하신 후에 그 노를 그치셨다. 진실한 사랑이 하나님의 그 진노도 잠재울 수 있었다. 과연 우리가 모세라면 그와 같은 놀라운 사랑을 베푸는 그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

우리라면 욕심이 앞서 하나님의 그 제안을 덥석 물었을 지도 모른다.

(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드디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진영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그 두 돌판을 던져 깨트려버렸다. 이는 하나님을 대신한 그 공의를 집행한 의로운 분노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 앞에 그들의 진멸하실 그 일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했던 모세였다.

 

이 순간 그의 거룩한 분노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몬 그 일당들에 대한 공의로운 분노였다.

(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32: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32:17)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 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32:18)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32: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32: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32:22)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32: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32: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32: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모세는 그 일당들을 레위 자손들이 손에 맡겨 그 백성들 중에서 제하였다. 이는 악을 온전히 제함으로써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살리려는 공의로운 처사였다.

(32: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32: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그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백성들을 대신하여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의 기도를 드렸다.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그 지독한 사랑이 담겨진 기도였다.

 

얼마나 그 백성들을 아껴 사랑했으면 이 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그 일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될 천국에서의 그 삶이 무위가 되어버리게 하는 생명책에서의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그 일을 선택하였을까!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다함은 그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천국이 아닌 영원한 형벌이 행해지는 그 지옥에 들어가는 그 일이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으면 그들이 살아 천국에 가고, 자신은 그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고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게 해달라고 애원했을까!

(32: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32: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이는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택하신 자들을 살리시려고 성부하나님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그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그 기도와 닮아있었다. 결국 주님의 성부하나님께 드린 그 간절한 기도는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한 그 기도였다!

주님의 그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린 모세는 그래서 오실 주님을 참으로 예표한 자가 되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모세가 이 날에만 그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은 그 말을 했을까?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를 하던 그 날에도 모세는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 그 일에서 이스라엘을 진실로 사랑한 모세의 그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전투가 치러지던 그 날에 모세는 산에서 기도를 했다. 오직 이스라엘이 살기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했던 것이다.

 

모세의 손이 들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의 그 손은 기도하는 손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을 담은 기도가 그의 들린 손이었다.

(17: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7: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그런 그의 손이 내려간다는 것은 그의 기도가 멈춤이었으니, 기도가 멈춤은 하나님께 구함이 없는 그 순간을 의미한다. 구함이 없으니 어찌 하나님이 주실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한 것이 바로 이 말씀이었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전쟁이 해가 지도록 이어졌으니 들어 올린 모세의 팔이 얼마나 힘이 들고 아팠을까!

그러나 모세는 그 팔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그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참기 힘든 그 고통을 이겨내어야만 했다. 그 백성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당하신 그 고통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랑하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는 그 모진 고통을 참아내셨다. 누가 이런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할 수 있을까!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으로부터 주님을 지켜낸 것은 오직 우리를 살리시려는 주님 안에 간직된 그 사랑이었다.

그런데 어찌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을 모른 채하는가!

 

내가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하는 그 사람을 외면하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의 그 사랑을 외면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말렉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을 뒤에서 공격하여 넘어지게 하는 자, 즉 사단을 상징한다. 사단은 자신이 갈 곳인 영원한 죽음의 곳으로 믿음의 백성들로 하여금 같이 가게 만들려는 자이다.

 

따라서 아말렉을 진멸함은 이 악한 사단을 이겨냄이었다. 모세가 이 아말렉을 도말하라고 명한 것은 사단을 온전히 물리침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러니 모세가 아말렉과의 이 전쟁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 이 기도를 멈출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사랑이었고, 이 사랑은 결국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사랑을 예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25:17)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25:18)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7: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모세의 그 간절한 기도들은 결국 우리를 위해 언제나 홀로 산에서 기도하신 주님의 그 일들을 예표한 것이었다.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그 사랑이 담긴 기도는 그의 시내산에서의 사십 일간의 기도로 절정을 이루었다. 바위투성이인 그곳에서 어디 물이나 있었을까!

물은 고사하고 먹을 것조차 없었을 것이니 그곳에서 어찌 사십일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가 그렇게 힘든 사십 일간의 금식 기도는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려는 그 사랑 때문이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길, 즉 십계명을 허락해주셨다. 살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모세의 그 사랑은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 것에 대한 그 약속에 대한 동인이 되었고, 이 약속은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 것에 대한 약속의 동인이 될 수 있었음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신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신 4: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신 4: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4: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신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신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모세가 그 백성들을 사랑하여 기도한 시내 산에서의 그 기도는 주님의 광야에서의 사십 일간의 그 기도에 대한 암시가 되었다. 모세가 이룬 그 사십 일간의 기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길인 십계명이 주어진 것을 결과함과 같이 주님의 광야에서의 사십 일간의 그 금식 기도는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그 일을 결과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랑으로 이루신 위대한 헌신의 결과였다.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이제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해 빚을 진 자가 되었다. 주님의 그 사랑에 빚진 자가 된 우리로서 할 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