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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란 무엇인가

by 영동장로교회 2023. 4. 2.

2023. 4. 2 영동장로교회 최규만목사

 

 

“율법이란 무엇인가?”

 

언약이란 말로 약속을 하는 것으로서, 이 용어가 특별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사용될 때는 성경적 언약으로의 그 의미를 갖는다.

성경적 의미로서의 이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숙하고 거룩한 계약으로서 위반 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성경에서 언급된 최초의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니, 이를 우리는 ‘행위언약’이랴 칭한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행위언약에서는 위반 시에는 반드시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도록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언약을 맺으실 때 이처럼 전적으로 아담에게 불리한 조건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런 계약을 체결하셨을까?

 

아담이 그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취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그 계약의 첫 번째 조항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오직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두 번째 조항으로 하셨다. 이 두 번째 조항을 어기면 그 대가로 죽을 것이라는 단서를 다셨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조항을 잘 지킨다면 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그 대상이 인격적일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땅에 지으신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과는 결코 언약을 직접적으로 맺으신 일이 없다. 오직 사람과만 언약을 맺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고,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시기에 그 형상을 따라 지음을 입은 그 사람도 분명히 인격적인 존재일 것이다.

 

인격적 존재는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하고, 또한 그 책임과 의무를 능히 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사람을 제외한 이 땅의 생명체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약속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그들과는 언약을 맺지 않으신다. 오직 사람만이 그럴 능력이 있으므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모든 생명체들을 다스리게 하셨고,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셨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을 위반했을 때 이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땅의 모든 존재들에게 그 효력이 미친 언약에는 아담 외에도 노아와 맺으신 그 언약이 있었다. 아담과 맺은 언약은 그 땅이 저주 하에 놓이는 일을 결과했지만 노아와 맺은 언약은 그 땅의 모든 생물이 복을 얻는 일을 결과했다. 이는 노아와의 언약 속에 이미 주님의 그 구속의 공로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가 담겨져 있음이었다.

(창 9: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창 9: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창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행위언약이 맺어진 이후로 거듭해서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러한 언약들은 행위언약과 마찬가지로 항상 복을 주실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 언약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가 뒤따랐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에 따른 결과였다.

 

하나님은 그 도덕적 속성으로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소유하셨으니 자신의 거룩하심을 원인으로 하여 죄를 도무지 눈감으실 수 없으셨다. 이는 의로우심으로 드러났고, 그 의로우심에 따라 죄를 벌하셔야만 하는 공의를 집행하시는 것이었다.

 

또한 그 언약이 항상 복 주실 것을 전제로 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은 그의 선하심에서 기원한 그 사랑이 드러남이었다. 그가 지으신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그에게 복을 베푸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복이 선행하였고, 공의의 집행은 항상 후행했던 것이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으로는 노아와의 언약이었다. 이 언약에도 하나님의 복 주실 것이 담겨져 있었으니 그것은 곧 구원에 대한 그 언약이었다. 그 땅의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나 노아는 살길을 얻었다.

 

그가 방주에 올랐을 때 그는 사는 자가 되었다. 노아가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구원 얻을 그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가 방주에 올라탔을 때 그 삶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장차 우리가 주님의 그 보혈의 공로에 올라탐으로써 구원 얻을 그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그 언약을 모두 지켜냄으로써 산 자가 되었다. 노아가 언약을 지킴으로 산 자가 된 것은 아담의 그 원죄로 인해 영영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림이었고, 그래서 그 일은 우리가 살 것에 대한 그 표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노아의 그 언약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그 언약이 될 수 있었다. 아담이 그 언약에서 실패함으로써 절망 가운데 놓였던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가져다준 그 첫 번째 구원의 빛으로 드러난 것이 노아의 방주사건을 통한 그 언약이었다.

(창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노아 이후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언약을 기억치 아니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일종의 충격요법을 채택하셨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한 족속을 택하신 그 사랑이셨다. 한 족속을 택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어 보이시고, 그들을 살리심으로 그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어 보이신 그 역사였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대표로 선택되었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그 언약은 언제나 인간에게 복을 주실 것을 전제로 하셨다. 그리고 이 언약에는 항상 그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이행할 것에 대한 요구가 뒤따랐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 언약도 그랬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고, 하나님은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창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창 17: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창 17: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 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그들 개개인과의 관계를 맺으심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에 대한 약속을 이루실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하신 일이기도 했다.

 

이삭과 맺으신 언약도 그에게 복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삭의 자손이 번성한다는 것은 곧 이삭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상징이었다.

(창 26: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창 26:25)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야곱과 맺으신 언약도 마찬가지였다. 자손이 티끌처럼 많을 것이라는 것은 사람에게서 가장 큰 복이다. 이것 역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 그 복에 대한 암시였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1)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창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창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특별히 할례를 행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이 특이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할례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할례는 이미 그 당시 중동 지역에 널리 퍼진 성년 의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특별히 이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신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 할례는 그 당시 그 지역에서 행해지던 그 할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라 하신 이 할례에는 구속사적인 비밀이 담겨져 있음이었다.

 

할례는 남자 아이의 성기 표피를 베어내는 일이다. 성기라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 기능을 가진 기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더불어 그 후손들이 심히 번성하게 될 것도 또한 약속하셨다.

 

그 후손이 번성하여 창대케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이 되며, 또 다른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삶이 영속됨을 뜻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생명이 지속될 것에 대한 약속이 성기라는 신체기관에 행해지는 이 할례의 의미 속에 이미 담겨져 있음이었다.

(시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 127: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시 127:5)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성기란 자손의 영속성을 이루게 하는 기능을 가지니, 아브라함에게서의 할례는 곧 그의 삶의 영속에 대한 약속이었다. 또한 이 할례에는 반드시 피흘림과 그로 인한 고통을 수반하니,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이 할례는 장차 우리를 살려 영원히 살 자의 자리에 세우시려고 십자가에서 피흘림의 고난을 당하실 주님의 그 사역을 예표하고 있음이었다.

 

성경에서 여성은 남성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렇기 때문에 언약의 효력의 범위와 영향은 양성(兩性)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따라서 할례 의식 역시 여성을 대표하여 남성이 행하는 상징적인 의식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할례를 대신할 신약 시대의 침례 의식에 뭇 남성과 여성이 다 함께 참석하고 있는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할례를 시행하는 시기를 정해주실 때 난지 팔 일 만에 시행하라 하셨다. 도대체 이 팔 일이란 무슨 의미는 담고 있기에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시행하라 하셨을까?

 

의학적으로는 아기가 가장 고통을 적게 느끼고, 피가 가장 빨리 응고되는 때가 바로 이 때라고 한다. 할례의 시기가 지정되어 있는 그 속에는 생리학적인 이 이유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담겨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다고 하셨다. 창조에 관한 모든 일이 완성된 일곱 째 날의 다음이 팔 일이니, 이는 새로운 시작의 날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도 바로 안식일 다음날인 팔 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팔 일이란 새로운 시작의 그 날을 의미하니, 이 팔일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그 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 하신 것은 구원하여 살리실 그 복이 임한 자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그 날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할례를 시행하는 이 팔 일은 주님의 그 구속사역을 대망하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이 할례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만 한시적으로 유효했고, 주님의 그 사역의 완성으로 폐기됨이 예정된 의식일 수밖에 없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했던 고로 이 할례의 의식을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그 사역이 완성된 그 때에도 여전히 할례를 고수했고, 이방인으로서 교회에 입교한 새신자들에게도 이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했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행 15: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

 

실제로 이 문제가 갈라디아지역의 여러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라고 한 말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갈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갈 2: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이 할례를 포함한 모든 율법의 말씀은 어린 신앙의 소유자였던 광야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초보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말씀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살리려 하셨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만했다. 이것을 ‘회개’라 한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죄인됨과 주님의 그 피흘림이 없이는 도무지 구원 얻을 길이 없음에 대한 그 고백을 해야만 한다. 구원에 대한 이 원리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그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직 오시지 않은 주님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율법을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을까?

(신 5: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신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을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고 있다. 십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와 ....하라”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는 모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이다. 우리의 시조 아담이 죄인의 자리에 선 것은 바로 이 순종을 이루지 못함 때문이었는데, 그들이라고 이 명령에 순종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그 계명을 순종하지 못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로인해 죄인의 자리에 섰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죄인된 자들로 버려두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절망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셨을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제사’라는 제도도 마련해 주셨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사함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삶을 살아야할 그 책임과 의무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있음에 대해 온당하게 깨달았던가!

(레 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4: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레 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레 4: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레 4: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레 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레 4: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레 4: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레 4:18)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레 4:19)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레 4:20) 그 송아지를 속제죄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레 4:21)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레 4:22)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 4:23)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레 4:24) 그 수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레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 4:26)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희생의 기름 같이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레 4:27)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 4:28)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

(레 4:29)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희생을 번제소에서 잡을 것이요

(레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레 4:31)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희생의 기름을 취한 것 같이 취하여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오히려 그들은 그 율법을 지켜내는 그것으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려고 했었다. 본질적으로 죄인의 신분인 그들이 율법의 하나정도를 겨우 지켜낸 것으로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행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롬 2: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롬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미숙한 신앙적 지식을 지닌 그들이 율법 아래에 있었을 때에는 그 율법에 매인 종과 같이 살았던 것이다. 이를 사도바울은 비유로 설명하기를 그 때의 이스라엘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유업을 이을 어린 아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치 종처럼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과연 이스라엘은 율법에 얽매여 율법의 종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삶의 기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나심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셔서 아들의 명분을 찾게 해주실 때까지라고 한정했다.

(갈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갈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이 뜻을 이스라엘은 바르게 알고, 그 율법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옳게 깨닫는 그 깨달음이 있어야만했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이스라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도록 인도했다. 그는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아예 없다고 단정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주 예수의 마음을 닮음이 없이는 누구도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곧 내 속에 내가 주인됨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심이다. 이렇게 될 때 성령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우리의 능력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켜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모세는 그 율법을 지키라 하였을까?

 

모세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오로지 문자적인 그 율법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지켜낸 율법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그 일이 되고 말았다.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의가 있을 수 있는가?

 

세상에는 의로운 자가 아무도 없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모세의 그 가르침은 하나님을 대신한 가르침이었다. 어린 신앙인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선생을 붙여주신 것이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 했으니 모세는 그 율법을 전해준 자였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한 몽학선생이었던 것이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소한의 실행준칙일 뿐이다. 어린 신앙의 이스라엘로서 최소한의 행동 규범이었으니, 이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로서는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그 규범의 범위는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그 계명에 대해 이미 그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마땅히 생각할 행동규범의 범위에 대해 정의해 주셨다.

(출 20:14) 간음하지 말지니라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러므로 구약의 그 율법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로서 행할 최소한의 행동규범이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공로를 이룸은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율법을 지킨 것을 조건으로 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선택된 자로서 마땅히 지켜 행할 바로서의 책임과 의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신 주님이 직접 오셔서 그 율법을 가르치셨으니 그때에서야 그 율법은 완전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하나님이셨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누구도 결단코 그 율법을 완전히 지켜낼 수 없다. 온전히 주의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요, 또한 이웃을 당연히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일의 최소한을 정한 것이 모세의 그 율법이었다.